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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반찬은 하나도 없고, 순 '저 푸른 초원 위에' 밥상이다
고기반찬은 하나도 없고, 순 '저 푸른 초원 위에' 밥상이다 ⓒ 조명자
여름 손님 맞기가 더 힘든 이유

어렸을 때는 물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할머니나 엄마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손가락이 쩍쩍 갈라지는 엄동설한이라면 몰라도 찬 물에 손 담그고 일할 수 있는 여름 일이 뭐가 힘든단 말인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여름 손님의 의미를 처절하게 절감한 때가 서른 중반이었으니 그때까지는 비교적 뜨거운 국물 맛이 뭔지 모르는 세월을 산 셈이다. 내가 처음으로 여름 손님을 그것도 '빡세게' 맞은 기억은 삼십대 중반이었다.

연탄 아궁이가 있는 13평 서민 아파트에 세를 살 때였는데 그 아파트형이 방 하나는 크게 만든 대신 마루가 없는, 그러니까 콧구멍만한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형태였다.

방문을 열면 작은 방 문짝이 코앞에 나타나는 그런 집에서 한여름에 그것도 장기 투숙객(?)을 맞았을 때는 정말로 눈앞이 캄캄했다. 겨울이라면 문이라도 꽁꽁 닫고 잘 텐데 여름에는 대책이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을 찾아 온 손님도 내가 모시기 어려운 남편의 선배였다.

그 나이 때만 해도 남편 쪽 손님은 정성을 다해 모시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어서 그 고충은 말할 수 없었다. 세 끼 밥상 차려주는 것은 고생 축에도 못 든다.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무더위에 옷을 마음대로 벗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반바지를 둥둥 걷어 올려도 되고 선풍기 앞에서 민소매 티를 펄럭이며 바람을 쏘여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여름에, 그것도 무진장 어려운 손님이, 하루도 아니고 주야장창 일주일씩이나 있어야 한다니 정말로 기절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남편한테 짜증도 낼 수 없었다. 장기복역수로 감옥에 있다가 출소해 셋방 들어 갈 때까지만 신세를 지겠다는데 마다할 수 없지 않는가. 하여튼 그 후 여름 손님은 정말로 호랑이보다 더 무섭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궁하면 통하느니...

며칠 전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여름 손님이 불쑥 찾아왔다. 이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나이라 웬만한 손님 정도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어려워하지 않고) 대접할 수 있는데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봉지라도 차타고 나가야 구할 수 있는 궁벽한 산골에서는 불쑥 찾아 온 손님상에 내놓을 반찬이 마땅치 않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그러나 궁즉통이다. 한여름 시골의 제일 큰 장점이 뭣이냐? 바로 대문 밖만 나가면 얼마든지 반찬거리를 조달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냉장고 야채 박스를 뒤지니 며칠 전에 사다 둔 콩나물 한 봉지가 있었다.

나물 한 가지는 해결됐고 그 다음엔 마당 텃밭으로 향했다. 너울너울 호박순이 싱싱하다. 호박잎 따다 겅그레에 살짝 찌면 깔깔한 입맛 돌리는 데는 최고다. 텃밭의 호박잎과 가지 부추 그리고 여린 들깻잎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고는 뒷집 할머니 텃밭으로 갔다. 얼마 전에 할머니께서 당신 텃밭에 있는 고구마 줄기를 끊어 가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구마 밭에 가니 무성한 고구마 줄기가 땅이 보이지 않게 뒤덮였다. 통통한 줄기만 골라 한 바구니 꺾고 덤으로 고구마 밭 옆에 심어놓은 어린 열무 몇 포기를 뽑았다. 이렇게 저렇게 마련하다 보니 벌써 진수성찬감이다.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인 강된장. 안 그래도 사진 실력이 별로인데 손님 없는 짬 내 찍고나니 사진이 가관이다.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인 강된장. 안 그래도 사진 실력이 별로인데 손님 없는 짬 내 찍고나니 사진이 가관이다. ⓒ 조명자
반찬거리를 끌고 들어 와 그때부터 씻고 다듬고 요리를 시작했다. 호박잎은 살짝 쪄 접시에 담고 호박잎 싸먹을 강된장을 끓이기 시작했다. 호박잎이나 양배추처럼 살짝 찐 쌈은 생된장보다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인 강된장이 제격이다.

된장을 짙게 푼 뒤에 멸치, 매운 고추, 양파를 송송 썰어 넣은 뒤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끓이면 쌈 싸먹어도 좋고, 밥에 비벼 먹어도 꿀맛이다. 고구마 줄거리는 껍질을 벗겨 데친 뒤 갖은 양념을 넣고 된장에 무쳐도 좋고 아니면 조선장으로 간을 해 기름에 볶아도 맛있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가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다. 가지는 살짝 쪄 조선장에 참기름, 깨소금, 마늘, 파를 넣고 무친다. 부추는 생으로 갖은 양념 넣고 살짝 버무려도 좋지만 내 입맛에 맞게 전을 지지기로 했다.

마침 언젠가 먹다 남긴 생 오징어 다리가 냉동실에 굴러다니기에 오징어 다리 송송 썰어 다지고, 매운 고추와 부추 숭숭 썰어 밀가루 반죽을 했다. 오징어 다리도 생선이라고 부쳐놓고 보니 졸지에 부추 해물전이 되어 버렸다.

어린 열무는 쌈으로 먹고, 들깻잎은 살짝 데쳐 고구마 줄거리처럼 기름에 볶았다. 그 많은 가짓수를 상에 쭉 늘어놓으니 정말로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고기반찬이 없고 순 나물뿐이라 '저 푸른 초원 위에' 밥상이 되었지만 이만한 시골 밥상 만나기 그리 쉬운 건 아니다.

한 시간 반, 땀 뻘뻘 흘리고 차려낸 밥상 앞에 마주앉아 손님과 둘이 배터지게 먹고 나니 왕후장상이 안 부럽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여름 손님이 자고 가겠다면 어떻게 할까? 그럴 땐 숙소를 밖으로 뺀다.

바람이 없는 날은 시골집이 도시 아파트보다 더 덥다. 무덥고 끈적끈적한 시골집에 퀴퀴한 곰팡이 냄새, 괴롭다. 더구나 화장실도 한 개이니 주인이나 객이나 불편하고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우리 집은 지네 때문에 모기장 텐트를 치고 자는데 아무리 허물 없는 사이라도 좁은 모기장 텐트 속에서 살 맞대고 잘 수는 없지 않은가.

방 개수는 많더라도 손님은 지네에 물리든 말든 싸가지 없이 주인만 냉큼 모기장 텐트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해서 마련한 것이 옆 마을 민박집으로 소개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 집엔 지네가 출몰할지도 모르니까 쾌적한 민박집으로 가시오." 그러면 온 손님 백이면 백 모두 좋다고 야단이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여름 손님 맞기' 나만의 노하우가 빛을 낼 때다. 밥 해먹이기가 조금 힘들 뿐이지 이제는 여름 손님에 대한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 참 나이는 공짜로 먹는 것이 아닌가 보다. 가면 갈수록 손님맞이가 대수롭지 않아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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