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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한 마리의 곤충이 산사의 향이 물씬 배어날 것 같은 단주 위에서 막 거미에게 잡혔습니다. 가장 불교적인 장소에서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를 파하는 파계의 순간입니다.
ⓒ 임윤수

살다 보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누군가가 죽어 온 가족이 슬퍼하는 상가에서 축가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행위, 뭔가 좋은 일이 있어 잔치가 벌어진 집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행위는 '때'도 아니고 '장소'도 아니지만 '경우'도 아닙니다.

눈치가 빠르면 절집에서도 젓국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절집에서 젓국을 얻어먹을 만큼 약삭빠른 눈치는 아니더라도, 적절한 자리에서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것은 분별력이거나 눈치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경우나 도리일 때가 더 많습니다.

거미가 살아가는 한 방법이며 일상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불자의 눈으로 보면 '때'도 아니고 '장소'도 아닌 곳에서 엄청난 파계, 살생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도덕 같은 '계', 법 같은 '율'

속인 사회에 '도덕'과 '법'이라는 것이 있듯 불가에는 '계(戒)'와 '율(律)'이라는 게 있습니다. 계가 속세의 도덕에 해당한다면 율은 법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법의 바탕이 도덕이고, 법의 최고 가치가 도덕이듯, 율의 바탕과 가치도 계일 거란 생각입니다.

▲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어떻게든 거미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곤충의 발버둥에 거미와 곤충의 위치가 위아래로 바뀌었습니다.
ⓒ 임윤수
▲ 살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던 곤충이 얼마의 시간이 지나 무릎을 꿇고 몸부림을 멈췄습니다.
ⓒ 임윤수

법이나 율에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정량적으로 제시되지만 도덕이나 계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무량이기에 더 어렵고 존귀합니다. 법이나 율을 초월하는 도덕과 계는 있어도, 계나 도덕을 능가하는 법이나 율은 없을 겁니다.

불제자가 되려면 불자로서의 자기 맹서, 불자로서 이것만은 지키겠다는 최소한의 도덕에 해당하는 계를 수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형식적일지는 모르지만 재가불자냐, 아니면 출가 수행자가 되느냐에 따라 수계의 항목은 달라지는데 어느 경우에도 다섯 가지,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淫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는 이 다섯 가지는 기본이 되는 오계이기도 하지만 율에도 포함됩니다.

훔치고, 음행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술을 마시는 것도 계와 율로 금하고 있지만 그 계율에 첫 번째로 금하고 있는 것은 살생입니다. 계중의 으뜸에 해당하는 살생이 절집, 불교용품 위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야말로 파계 중의 파계가 분명합니다.

풍경소리마저 그늘로 찾아드는 산사의 오후

산사의 오후는 조용합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는 후텁지근한 여름 숨결도 담겨있지만 뎅그렁거리는 풍경소리도 실렸습니다. 같은 바람이라도 아스팔트거리에서 맞았다면 기분 나쁠 만큼 끈적거렸겠지만 산사에서 맞는 바람이라서 그런지 수풀의 싱그러움이 바람에서 묻어납니다.

▲ 목숨이 끊어진 곤충은 거미가 끄는 대로 먹잇감이 되어 질질 끌려갑니다.
ⓒ 임윤수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입니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법담을 나누는 사람들 모습이 한가롭기만 합니다. 작열하는 햇살을 피해 나무그늘로 들어간 이도 있고, 법당 지붕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추녀 아래로 들어선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습관적으로 그늘로 찾아드니 풍경소리도 허공에만 머물지 않고 그늘을 찾아 사람의 귓전으로 스며듭니다.

필자도 햇살을 피해 불교용품이 전시되어 있는 매점 그늘로 들어섰습니다. 물씬 불심이 배어 있을 것 같은 이런저런 불교용품을 구경하고 있는 중입니다. 108염주도 있고, 반야심경이 음각된 목각, 명상의 소리가 녹음된 녹음테이프, 액운을 막아준다는 이런저런 용품들이 보였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솔솔 향내가 피어날 것 같은 목각품으로 눈길이 갑니다. 황토색에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지는 목각품들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콩알만한 구슬로 깎아 꿴 108염주가 있는가 하면, 나무구슬을 눈깔사탕만큼이나 크게 깎아 꿰어 만든 단주도 보입니다.

▲ 그렇게 죽어간 곤충은 거미가 번쩍 치켜 올려도 반항은커녕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 임윤수
불그스레한 빛깔, 손에 착착 감길 것 같은 알이 큼지막한 나무 단주는 질감도 좋아 보였지만, 읽을 수는 없지만 온갖 액운을 막아주고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은 문양이 있어 더없는 불교용품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단주, 산사의 풍경과 불자들의 계율이 함축되어 있을 것 같은 그 단주 위에서 끔찍한 살생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단주 위에서 파계의 살생을 하는 거미

벌처럼 생긴 곤충 한 마리가 막 거미에게 걸려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거미줄이 처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거미의 앞발에 머리 부분을 잡힌 곤충이 발버둥을 칩니다.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 다리를 허우적대고,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는 듯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실랑이를 합니다. 몸이 훌떡 뒤집히며 발악을 해보지만 얼마 가지 못해 부르르 떨리던 다리가 더는 떨리지 않았고 움직이던 날개도 멎었습니다. 그러더니 거미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갑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펄떡거리던 생명이 사그라지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먹고 먹히는 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대입되는 생태계의 질서며 곤충계의 먹이사슬일 게 분명합니다.

▲ 다시 모습을 나타낸 거미의 입에는 곤충의 머리 부분만 남아 있었습니다.
ⓒ 임윤수

당연하다고 인정할 수도 있는 먹이사슬 구조, 생존을 위한 생태계의 질서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현장이 생명존중을 가장 우선시하는 산사, 산사의 의미와 향기를 아름아름 머금고 있는 불교용품 위에서 벌어지는 살생현장을 목견하고 있으려니 와지직 부서지는 파계를 보는 듯한 기분입니다.

도덕을 저버린 인간은 금수에 빗대고, 계를 파한 승려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파계승으로 올려지지만 버젓이 살생을 저지르는 거미의 삶을 보면서도 그게 생존을 위한 생태계의 법칙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자연계의 질서가 아리송할 뿐입니다.

불자의 눈에는 분명 파계며 살생이었지만 이 또한 생태계의 모습이며 거미가 생존하는 한 방편임을 인정하려니 흔들거리는 가치가 아이러니의 거미줄로 머릿속에 줄을 칩니다.

태그:#파계, #거미, #파계승, #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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