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저는 5·16은 구국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상황이 너무나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남북 간 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우리가 흡수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 혁명규약에 보면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하고'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기아선상에 헤맸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국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셨던 분들, 희생하고 고통을 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제가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난 19일 열린 한나라당 경선후보 검증청문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한 말이다. 5·16 ‘군사쿠데타’가 ‘구국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처음부터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건지 몰라도 ‘원칙’을 그렇게도 강조하는 박 후보가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정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을 두고 저렇듯 후한 평가를 내리다니,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새롭거나 파격적인 발언은 아니다. 오히려 일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를 변호하고픈 본능은 딸에게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 곁에서 자라면서 그러한 가치관이 오랜 세월 동안 몸에 배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깊은(?) 뜻을 자식 된 입장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즉 딸로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심정적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박 후보의 과거 청산 시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 후보가 아버지를 무조건 옹호해온 것은 아니다. 요 근래만 보아도 경선출마 선언을 통해, 또 위내용에 나와 있듯 검증청문회에서도 거듭 ‘아버지로 인해 피해 입으신 분들’께 사과를 표명했다. 얼마 전에는 고 장준하 선생의 부인을 만나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설령 대선을 위한 쇼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만큼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내 시선이 삐딱해서일까, 아니면 내 감정이 메말라서일까. 도무지 진정성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입은 ‘진심어린 사과’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정성의 발로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경선출마 선언을 하면서 박 후보는 “아버지 시대에 본의 아니게 불행을 당하신 분들께 사과를 드리는 것은 정말 저의 진심과 충정을 담은 말”이라고 했다. 사과가 맞긴 맞는데 ‘본의 아니게’, 그러니까 뜻은 그게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끼친 피해에 대한 사과다.

또한 고 장준하 선생의 미망인을 만나 박 후보는 이렇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와는 반대 입장에 계셨고 방법은 달랐지만 두 분 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서 생각하셨다고 믿고 있다." 그저 서로 ‘다를’ 뿐이라는 거다. 그의 말은 흡사 ‘민주’와 ‘독재’는 그저 서로 다른 것일 뿐, 가치판단은 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박 후보는 지난 1월 32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속칭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법원의 결정일 뿐”이라고 축소하면서 더 나아가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며 불편함을 표시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지금 그가 사과하는 대상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줄곧 주장해오고 있다.

박 후보는 아버지의 과를 겸허히 인정하라

종합해보면 이렇다. 박 후보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를 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거의 80개가 훨씬 넘는 나라들이 독립을 하거나 새로 탄생을 했다. 그 많은 나라들이 이른바 군사독재 정치를 겪었다. 그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개발에 성공을 한 나라”라고 말한다. 또한 그 시대의 피해자들은 아버지의 구국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당하신 분들이다. 즉 아버지의 공을 전제로 하되 부차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일정부분 생길 수밖에 없는 과에 대해 비록 고의는 아니나 사과는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의 근본부터가 다르니 사과의 진정성이 전해질 리가 없다.

박 후보가 진정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본의 아니게’와 같은 불필요한 표현은 빼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군사독재가 수많은 희생을 일으킨 ‘잘못’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진심과 충정을 말하면서 5·16 군사쿠데타를 구국 혁명으로 포장하고, 국가보안법 존속을 주장하며, 유신을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은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만약 유신의 평가가 바뀌면 사과도 철회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분분하다. 가장 보편적인 이분법, 즉 경제성장의 공과 군사독재의 과라는 측면으로 봤을 때, 그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나라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강력한 통치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의 아버지는 “박정희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만약 유신의 희생자가 당신의 가족친지 혹은 주변인이었다면 어떠했겠냐는’ 나의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신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군사독재정부가 아닌 민주정부가 들어섰다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 나라가 주저앉고 말았을까? 또 고속경제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우리가 잃은 것들, 우리가 아직도 앓고 있는 이 상처들은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어쩌면 경제성장을 담보로 그보다 더 큰 아픔과 사회적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 후보의 과제는 아버지를 극복해내는 것

박 후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극복해내야만 한다. 단지 딸이라서가 아니다. 바로 ‘정치인’ 박근혜의 자산 상당 부분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인식과 태도로는 그가 강조한 ‘자유민주주의가 활짝 꽃피는 선진 대한민국’을 이루어낼 수 없다.

가수 신해철의 노래 중에 “70년대에 바침”이라는 곡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발표를 시작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취임사로 끝이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마지막으로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누구나 말하긴 쉽지만 그때는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

한발의 총성으로 그가 사라져간 그 날 이후로 7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
수많은 사연과 할 말을 남긴 채

남겨진 사람들은 수만의 가슴마다에 하나씩 꿈을 꾸었지 숨겨왔던 오랜 꿈을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그 시절 우리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저마다의 꿈을 간직하고도 숨길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들이 못나서나 약해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가 평범한 사람들의 소중한 꿈을 억압했던 어두운 시대였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는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다른 누구도 아닌 박근혜 후보의 입을 통해 그 진실을 듣고 싶다.

태그:#박근혜, #박정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