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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꿈은 뻘배를 타고 가는 저 아낙네의 갯벌에 있을까
시인의 꿈은 뻘배를 타고 가는 저 아낙네의 갯벌에 있을까 ⓒ 이종찬
"'우르릉∼ 꽝!' / 맑은 하늘에 갑자기 한줄기 섬광이 일더니 천둥이 내리친다. 시원스런 빗줄기가 쏟아진다. 그리운 이가 찾아올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날이다…

빗줄기도 멈추고 환한 햇살이 내리쬔다./ 내 나이 마흔하고도 아홉. 살아온 세월로 보면 시집을 냈어도 몇 권을 냈어야 할 나이(?)다. 남들은 문단에 중견 시인으로 자리매김을 했을 나이다. 하지만 난 이제야 늦은 발걸음을 뗐다. 갈 길이 멀다." - <창작21> 신인상 당선소감 몇 토막


그렇다. 시인 조찬현은 또래의 시인들이 중견시인 소리를 듣는 나이에 '섬달천의 노을' 외 4편의 시를 문예계간지 <창작21>에 투고,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시인의 말처럼 정말 '갈 길이 멀다'. 더불어 아무리 열심히 써도 돈이 되지 않는 시를 들고 문단에 뒤늦게 나타난 그를 바라보면 왠지 소름이 끼친다. 그가 시의 날을 뒤늦게 벼리는 이유를 잘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대체 시가 뭐라고, 귀밑머리 희끗희끗 나이에 부나방처럼 시단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그의 당선소감을 다시 한번 곰곰이 되새겨보자.

"언젠가 시 습작을 하고 있는 아빠를 보고 큰 딸아이가 하던 말. '아빠! 시 쓰면 못 산데, 어렵게 산데'/ 아내 역시도 시를 쓴다고 하면 그와 비슷한 말을 하곤 했었다. 시를 쓰면 사는 게 힘들다고, 시대로 살게 된다고…."

그리고 그는 "어느 시인의 '글만 써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귓전에서 자꾸만 맴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 역시 "그런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가.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어쩌면 그 또한 모진 세상살이를 통해 그 자신의 삶이 곧 돈이 되지 않는 시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봄을 샀다 나만의 봄을
꼬깃꼬깃 구겨진 해묵은 지폐로
팬지와 데이지, 사랑초...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봄이 쉬이 올 것 같이 않아서
하나, 둘, 셋...
봄을 샀다

봄을 바라본다
노점상 할아버지가 건네 준
온실에서 피워 낸
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봄은 그렇게 또 내게로 왔다

- '봄을 샀다' 모두


조찬현 시인이 "꼬깃꼬깃 구겨진 해묵은 지폐로/ 팬지와 데이지, 사랑초…" 같은 봄을 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봄이 쉬이 올 것 같이 않아서"이다. 그래서 시인은 좀처럼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며 "하나, 둘, 셋… 봄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 봄은 시인이 늘상 꿈꾸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누구나 돈 걱정 없이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시인이 꼬깃꼬깃 손때 묻은 지폐로 산 봄, "노점상 할아버지가 건네 준/ 온실에서 피워 낸" 봄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또 가난한 시인이 살 수 있는 봄은 따가운 햇볕을 먹고 건강하고 풍족하게 싹트는 그런 봄이 아니다. 시인이 살 수 있는 봄은 물질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온실 안에서 핼쑥하게 자라는 인공의 봄일 뿐이다.

아무리 진짜 봄(희망)을 사려 해도 살 수 없는 힘겨운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곳이 조찬현 시인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런 까닭에 그 세상에는 진실이 없다. 삶의 진실은 온데간데없고, 대형 유리창 속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네킹처럼, 모조품만 판을 치는 그런 세상에서 시인은 정말 고집스럽게도 삶의 사리를 찾고 있다.

"길 가던 사내가/ 괜스레 풍뎅이의 목을 비틀어/ 죄의식 없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풍뎅이가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소멸하는 의식들)처럼, 시인도 괜스레 거짓과 가식의 목을 졸라매며 끝없이 펼쳐진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자신의 삶이 풍뎅이처럼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꿈틀대는 몸부림/ 윙윙거리는 절규가/ 소름으로 돋는 여름밤"(소멸하는 의식들)에도 시인은 진리의 새벽, 희망의 새벽을 기다리며 길을 재촉한다. 때론 울퉁불퉁한 물질의 돌멩이에 걸려 넘어져 무르팍이 깨지기도 하고, 때론 '가족'이란 그물에 걸려 주춤주춤 하면서도, 끝내 물질로 똘똘 뭉쳐진 이 세상과 악수하지 않는다.

그날, 나는
해 보다 먼저 떴다
소호바다 먼 발치 지평선에
징어리떼를 쫒는 고깃배의 불빛되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직, 선착장에는 목선들이
검은 물결에 버둥대며
삐걱 삐이걱 잠꼬대 한다

사내들은 여기저기
무수한 빛의 반짝임을
연신 끌어 올린다
세상 위로 떠오른 빛줄기
만선의 그물 안에
산란한 꿈으로 포획된다

- '만선의 꿈' 모두


"해보다 먼저" 떠서 "소호바다 먼 발치 지평선에/ 징어리떼를 쫒는 고깃배의 불빛되어/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시인 조찬현. 그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일까.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캄캄한 신새벽에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무작정 어둠을 가르며 선착장으로 나서는 시인.

시인은 그 선착장에 서서 무엇을 보았을까. "목선들이/ 검은 물결에 버둥대며/ 삐걱 삐이걱 잠꼬대"하는 그 선착장이 시인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세상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을까. 그리고 시인은 그 선착장에서 또 어떤 새로운 빛을 가슴에 품었을까.

시인은 이른 새벽 선착장에 서서, 저만치 수평선조차 잠든 캄캄한 바다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하게 반짝이는 빛의 잔치를 눈여겨 바라본다. 그 빛은 마침내 억센 어부들의 그물에 건져 올려져 이 세상 위로 떠오른다. 시인은 "만선의 그물 안에/ 산란한 꿈으로 포획"되는 그 빛을 가슴에 품는다. 시인이 꿈꾸는 세상이 마치 그 빛 속에 있는 것처럼.

너와 나 가는 길
두 손 맞잡고 가는 길
우린 서로를 볼 수가 없네
바라보는 곳
가고자 하는 곳 같은데
우린 서로를 품지 못 하네

수많은 사연 담고
세상사 도란거리며
오가는 이별의 열차처럼
사랑은 평행선
애닯기만 하네

곁에 두고도 볼 수가 없네
함께 하여도 간절한 그리움
일정한 간격의 운명 속에
끝이 없네
끝이 없이 내달리네

- '사랑은 평행선' 모두


2007 <창작21> 여름호에 시 '섬달천의 노을' 외 4편이 당선된 늦깎이 시인 조찬현
2007 <창작21> 여름호에 시 '섬달천의 노을' 외 4편이 당선된 늦깎이 시인 조찬현 ⓒ 이종찬
조찬현 시인의 투고작을 심사한 문학평론가 송용구(시인, 고려대 교수)는 "조찬현은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의 생명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세태를 비판한다"며 "그의 시는 물질문명이 유물처럼 남겨놓은 생명경시 풍조를 질타한다"고 말한다.

송 교수는 조찬현의 시 "'만선의 꿈'은 전통적 서정을 계승하고 있다. 이 시에서 '해 보다 먼저' 솟아오르는 시인의 정신은 '고깃배의 불빛'이 되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며 "그 '불빛'은 삶의 '그물' 속으로 '빛줄기'들을 '끌어올린다.' '무수한 빛'으로 반짝이는 시의 언어들이 이제 막 '산란한 꿈'처럼 '포획'되어 창작의 그물 안에서 신선한 생명을 꿈틀대고 있다"고 당선 이유를 설명했다.

시인 조찬현은 1958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1987년 육군대위로 예편한 뒤 개인사업을 하다가 지난 2005년부터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SBS U포터, <전라도닷컴> 전문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전라도닷컴>에 여행기사 '길에서 멈추다'를 연재하고 있으며, 인터넷신문 < NewsQ > 대표기자를 맡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큐>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조찬현#등단#창작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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