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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코아노조원 200여명이 농성중인 서울 서초구 킴스클럽 강남점에서 회사측이 매장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용접하고 열쇠를 채웠다. 16일 오후 한 노동자가 쇠사슬이 채워지고 용접 그을름이 남은 출입문을 쳐다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열 아흐레째를 맞고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켜보며 누구나 한번쯤 이런 의문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 아무리 보아도 그저 흔하디흔한 우리의 평범한 이웃인데, 도대체 누가 저런 극단의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며 자꾸만 '투사'의 길로 내몰고 있는가….

그렇다. 바로 우리 사회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자본에 백기 투항한 정치권력', 그 중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잘못이 가장 크다. 우선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이 사태를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이는 김영삼 정부에 의해 도입되고 김대중 정부에 의해 전면적으로 수용되었으며 노무현 정부에 의해 만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이제 사회 전 부분에 걸쳐 만성화된 폐해로 나타나고 있다는 하나의 증표다. 그들의 농성에는 우리 사회가 이같은 폐해를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가 담겨있다.

누가 저들을 '투사'로 내몰았는가

이제라도 시민사회 단체들이 이랜드 그룹에 대한 '소비자 불매운동'을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이번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가시적이고 긍정적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기업에 대한 소비자 불매운동이 지금 우리가 처한 '신자유주의적 위기'에 대한 근본적 답은 될 수 없다.

사실 이랜드 사측은 법률에 따라 자신들에게 보다 유리한 선택을 했다. 이를 두고 도덕성 측면에서 이랜드를 공격하는 것은 일회용 단기 처방은 될지 모르나 근본적 치료가 될 것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계속 신자유주의를 무한정 용인할 것인지 분명히 반대할 것이냐를 선택할 시점에 와있다. 반대한다면 어떤 '대안사회'로 나아갈 것이냐 또한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왜 이러한 상황이 올 수밖에 없었는지, 전 노동자, 전국민이 근본적 원인에 대해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활발한 사회적 담론을 통해 미래사회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결정할 매우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서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정치소비자 주권운동'을 시작하자

▲ 지난해 11월 3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보호법, 파견근로자보호법, 노동위원회법 등 비정규직 관련 3법이 직권상정돼 처리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인을 고르게 잘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한시적으로 위임된 모든 권력의 조정과 행사를 통칭하는 말과 행위'로 정의될 것이다. '고르게 잘 산다'는 것은 단지 사회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가치체계를 포함하지만, 의식주가 모든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국정치는 이러한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으로 다분히 '패거리 정치' '헤게모니 싸움'과 같은 '그들만의 리그'에 치중했따. 정작 '정치 소비자'이자 '정치 주체'가 되어야할 국민은 이용도구·희생물로 전락했다.

모든 정치행위란 일차적으로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의식주들이 결핍되지 않고 조화롭게 발전해 갈 수 있는 토대와 룰을 만들고, 이 룰이 공평하게 작동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제도적 장치와 서비스에 있는 것이다.

즉 정치는 본래 '서비스업'과 같으며, '고객만족'을 최우선에 두어야할 책무가 모든 정치인들에게 반드시 있는 것이다. 모든 정치행위는 당연히 정치주체이자 소비자인 국민, 즉 '주권자'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주권자 우선주의'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 되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입헌제에 의한 민주주의'를 채택한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정체이자 이념이며, 실질적 민주주의의 구체적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민을 배반한 정치세력은 반드시 심판해야 하며 위임한 권력은 국민에게로 언제든 다시 회수 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실질적 국민주권의 행사를 위해서는 단지 투표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이것이 언제든 작동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영역에서의 '소비자 주권운동'이며 민주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행사'이다.

<2>둘째,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을 시작하자

▲ 한미FTA에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13일 오전 미국산쇠고기 판매를 시작한 롯데마트 서울역지점 매장 수입육 코너에서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쇠고기 수입 판매 반대"를 외치며 강력반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정치영역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단지 소득과 분배를 왜곡시켜 사회전반의 양극화를 심화·확대시키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한 국가의 '민주주의'와 실질적 '경제발전'마저 심각하게 파괴한다는 데에 보다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얼마 전 한 언론에 보도된 기고문 '임박한 위기: 위협과 기회'에서 노엄 촘스키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18세기 이래 (강대국들이) 식민지들에 강제로 부과했던 정책" "주권을 잠식당한 나라에 부과되는 체제"라고 했다. 흔히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세계화'니 '자유무역'이니 하는 개념들도 모두 "현실의 묘사가 아닌 선전 용어"일뿐이고, "국제적 경제통합의 한 구체적인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한미FTA가 일방적으로 추진되어 국회비준만 남겨둔 지금, 민주적 절차의 문제뿐만 아니라 협정문의 구체적 내용들이 촘스키 교수의 지적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협정문이 타결되자마자 보수언론이 극찬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것처럼, 한미FTA로 인해 한국은 '신한미동맹' 즉 미국과의 경제통합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통합'이 결코 양국의 호혜·평등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구미에 맞춘 일방적 '불평등 조약'이라는 데 있다. 미국과 경제통합 안 하면 한국이 당장 무너질 거라고 선동하는 것은, 구한말 '대세론'을 외치며 '한일합방'을 선동했던 을사오적의 논리와 너무도 닮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미FTA만 발동되면 한국이 마치 금맥이라도 캐내게 될 듯 과대선전 하고 있는 노무현정부와 '자유무역맹신론자'들은 촘스키 교수의 다음과 같은 따끔한 지적에 귀를 씻고 경청할 일이다.

"사실 미국은 2차 대전까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서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을 실시하는 나라였고, 2차 대전 때에 이르러 자국의 경제력이 다른 모든 나라를 압도하게 되자 비로소 '자유경쟁'을 용인할 수 있었다…(중략)…'미국의 재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그러한 경우에 미국이 흔히 사용하는 도구인 '국방부를 동원'했다. 힘이 세고 특권을 누리는 자들을 보호하도록 설계된 이른바 '자유무역협정' 속에도 고도의 '보호무역 장치'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내장되기에 이르렀다."

이 주장은 "미국은 미국이 우월적 지위에 있지 않는 한 결코 타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않으며, 설령 맺었더라도 그 속에는 '고도의 보호무역 장치'가 내장되어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국방력'을 동원해서라도 자국의 손해를 결코 감수하지 않는다"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여, 이래도 '기마민족' '진취성' 운운하면서 돈키호테식 감상적 동원체제로 다수 한국인의 미래를 절단내고 싶은가.

주권국민으로 행동할 때다

▲ 지난 2004년 1월 참여연대는 기자회견을 갖고 '2004 총선에서 부패 반개혁 정치인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 남소연
잘못된 권력과 권력행사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민주국민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주권행사'에 속한다.

지난 민주화 20년은 단지 형식적으로 여야로 나뉘어 '세계화'라는 동일한 아이템으로 나눠먹기식 정치를 해온 반민중적 역사에 다름 아니다. 그 사이 다수 민중의 삶은 경제지표와 아무 상관없이 추락을 거듭해 왔다. 이제 지난 20년 식의 모델, 즉 '권력을 시장에 넘겨준 정치세력'들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은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서 '다수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반신자유주의 후보'를 선택하는 '당선운동'으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반신자유주의적 핵심쟁점과 '국민소환제' 등에 기꺼이 동의하고 이에 서명한 후보를 선택해 연대와 참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된 후보가 공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을 경우 임기와는 상관없이 국민소환제에 의해 언제든 파면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러한 운동에 만약 현행 선거법이 걸림돌이 된다면, 이는 기꺼이 뚫고 나가야할 시대적 책무다. 2004년 '낙선운동' 또한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국민의 힘으로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기억하자. '국민주권'이란 헌법 쪼가리 몇 줄에 박제된 언어의 조각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행사할 때만이 비로소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었다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들을.

따지고 보면 노동자 아닌 사람 누가 있으며, '농부의 자식' 아닌 사람 그 얼마나 되랴.

보라. 자신들이 만든 악법 앞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은 외면한 채 '민주세력입네' '군사세력입네' 아옹다옹 대권싸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저 파렴치한 정치인들의 면면을. 국가의 주권과 미래를 강대국에 팔아넘기고도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는 저 뻔뻔스러운 권력의 실체를.

선량한 국민을 '투사'로 만드는 자본의 하수인, 정치권력. 어떻게 저들이 감히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자보, 이스트플랫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국민주권#신자유주의#세계화#한미 FTA#이랜드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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