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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늦게까지 마시는 날에는 새벽까지 운행하는 9403번 버스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다. 탈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잠실에서 타는데, 그 늦은 시간에도 앉을 자리가 없을 때가 많다. 오늘(13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잠실에서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늘 그렇듯이 휴대폰에 알람을 맞춰놓고 잠을 청했다.

분당에서 잠을 깼다. 20여분 더 가면 내릴 곳이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안이 소란해졌다. 바로 뒷자리에 탄 여자 승객이 소리를 쳤다.

"이 아저씨가 계속 몸을 더듬어요. 몇 번이나 뿌리쳤는데 계속 그럽니다. 기사 아저씨, 경찰서로 가주세요!"

7월 13일 새벽 1시 35분. 조용하던 버스 안이 갑자기 술렁거리며 여기저기서 말이 튀어나왔다.

"거,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다른 자리로 가세요!" 어떤 아저씨의 말이었다.
"아까부터 봤는데요, 계속 집적거렸어요. 다른 자리가 있는데도 일부러 그 자리 빌 때까지 기다렸다가 앉았어요. 의도적이에요. 빨리 경찰 불러주세요." 버스 뒤편 어느 아가씨의 말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바로 경찰서에 전화하고 버스를 정차했다. 아마 분당 한솔마을이나 정든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경찰은 감감무소식이다. 성질 급한 승객들이 소리를 쳤다. 경찰서에 또 전화해라, 다른 차로 갈아타게 해 달라….

할 말을 잃었다. 성추행을 당한 여자 승객이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는데 제 갈 길 바쁜 승객들은 버스가 한동안 정차한 것이 못마땅한 것 같다. 종점까지 겨우 20분밖에 안 남은 거리인데….

성추행을 당한 여자 승객이 소리쳤다. 성추행범 도망 못 가게 잡아달라고. 그 아저씨(결혼반지를 끼고 있었으므로 아저씨가 맞다), 술 취했으니 이해해달라는 듯이 중얼중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9403 후행 버스가 다가왔다. 승객들이 그 차로 갈아타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기사 아저씨가 앞문을 열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려갔다. 그 광경이 못마땅해 답답한 마음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성추행한 아저씨가 줄행랑을 쳤다. 순식간이었다. 버스 앞자리에 있던 젊은 청년과 기사아저씨, 그리고 몇 명이 쫓아갔다. 버스 앞문에 있던 요금통은 쓰러졌다. 바쁜 승객들은 뒤에 있던 차로 갈아타고, 분개한 승객 몇 명은 성추행범을 쫓아갔다. 그때까지 경찰은 오지 않았다. 신고한 지 15분여 지날 때쯤이었다. 나와 다른 여자 승객만 남아 자리를 지켰다.

기사 아저씨 자리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분당 경찰서였다. 왜 안 오냐고 물었다. 오고 있단다. 기다렸다. 오지 않았다. 20분 정도 지난 것 같다. 답답해서 내가 또 전화했다. 사고가 많아 늦다는 것이다. 범인은 이미 도망가고 승객들도 모두 사라졌다고, 어서 빨리 오라고 말했다.

멀리서 기사 아저씨 혼자 걸어왔다. 놓쳤단다. 너무나 순식간에, 빨리 도망치는 바람에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단다. 그때서야 경찰이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말했다. 경찰은 인상착의를 물었다. 집으로 가다가 되돌아온 어떤 여자 승객이 인상착의를 답했다.

베이지색 바지, 감색 티셔츠, 건장한 체격, 네모난 얼굴, 찢어진 눈, 30대 후반의 나이, 결혼반지 착용.

성추행범을 잡으러 쫒아갔던 어떤 청년의 지갑이 차 안에 떨어져 있었다. 지갑을 경찰에게 넘겼다. 경찰은 인상착의를 말한 여자 승객을 경찰서로 데려갔다. 버스는 출발했다. 나와 또 다른 여자 승객만 태운 채.

기사 아저씨가 말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머뭇거리다 그냥 지나쳤다고. 하지만 딸을 키우는 처지에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경찰에 신고하고 기다린 것이라고. 그런데 승객들이 내려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놓쳐버렸다고. 답답하다고.

나도 답답했다. 이미 늦은 시간, 늦어봐야 얼마나 더 늦는다고, 성추행 당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제 갈 길 바쁘다고 소리치며 내려달라는 사람들이.

"아저씨들,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울먹이며 호소하던 그 아가씨의 말이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

#버스#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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