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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일 오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미무역대표부 부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미FTA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비아냥이 아니다. 마음으로 이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한미FTA는 유령인 듯 하다. 한미FTA가 이른바 '중도개혁세력', 또는 '민주화세력'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결을 한 지금, 한미FTA는 이미 유령이 아니라 실제이다. 협정문은 한미 FTA가 앞으로 우리의 사회경제를 주조할 기본 틀이 되리라는 증거이다. 어쩌면 100년이 갈지도 모르는 엄청난 대사건이다.

과장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 치하 36년이 끝난 지 무려 60년이 더 지났어도 일제 잔재는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과거사정리위의 고전을 보라), 박정희 시대가 종언을 고한지 30년 가까워 오는데도 그는 혈육으로, 또 환상으로 여전히 강고하다.

'선진통상국가론'의 원조가 박정희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자각한 유시민의 고백처럼 이를 잘 대변하는 일이 또 있을까('쇄국 대 개방'이라는 기이하도록 단순한 구도에 이 영특한 정치인이 빠져있는 것이야말로 경이로운 일이다).

한미FTA가 국회의 비준동의를 거치면 법률이 된다. 훗날 이 한심한 '초헌법적 협정'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한미FTA시대'의 후유증이 일제 시대나 유신시대의 그것만 못할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런데도 정치권, 나아가서 이른바 시민사회세력까지도 이 냉엄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려고 한다. 두말 할 나위 없이 대선 때문이다. 한미FTA는 최대 이슈가 되는 순간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피하고 싶은 폭탄이 되었다.

[한나라-반한나라] '반대' 김근태와 '찬성' 손학규도 대통합하고 있다

▲ 한미FTA협상 타결직후인 지난 4월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한미FTA협상 타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나라당 처지에서 한미FTA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우'가 될 수 있다. 줄잡아 국민의 절반이 반대하는 정책이 최대 이슈가 되는 경우 10년간 절치부심한 '정권교체'는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자 몸조심이 상책이다.

'중도'에 목을 매다는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난 10년간 달콤한 집권의 비결은 '반 한나라당 연합전선'이었다. 한나라당의 '냉전적 수구'의 이미지는 여전히 남북문제에 남아 있으니 아직도 의미가 있다. 한나라당 정권이 한미FTA를 추진했다면 이 전선은 더욱 유효했을 것이다.

문제는 참여정부가 한미FTA를 추진했다는 점에 있다. 한나라당으로선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었고 '민주화세력'의 후예들은 혼란에 빠졌다. 나아가서 한미FTA가 21세기 들어서 최고조에 달한(그러나 또한 그러한 사실 자체가 급격한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다) 시장만능론의 영구화라는 점 역시 대안이 만만치 않으니 이들에게 한미FTA는 '전선'을 흐트러뜨리는 금기의 낱말이 되었다.

한미FTA에 반대하여 '목숨을 건 단식'을 한 김근태가, 한나라당 후보들보다 더 명료하게 한미FTA를 찬성하는 손학규를 '대통합'의 울안으로 불러들인 것은 '중도개혁'의 고민, 또는 정신분열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민주화 투사들의 이 '소연정'이 동시에 한미FTA를 둘러싼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니 이보다 더한 코미디가 또 있을까.

한나라당과 대통합세력의 '대연정'이 다다른 결론은 '차기 국회에서 처리하자'는 방침이다. 원칙적으로 찬성하건 반대하건, '꼼꼼하게 검토한 뒤'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한미FTA에 대한 판단 유보다.

▲ 한미FTA에 반대하여 '목숨을 건 단식'을 한 김근태 전 의장과 한나라당 후보들보다 더 명료하게 한미FTA를 찬성하는 손학규 전 지사가 손을 잡는 것이 지금 '중도개혁'의 상황이다. 사진은 지난달 17일 '선진평화연대 창립대회'.
ⓒ 오마이뉴스 권우성
[미래구상] '굴욕적 한미FTA'라더니, 반대하면 저차원?

이 방침은 범여권에서 가장 강하게 한미FTA에 반대하는 천정배는 물론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를 들고 나온 '미래구상'이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미래구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첫째, 구조화된 사회적 양극화와 한미FTA 등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모순구조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양극화와 한미FTA는 과거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연합을 승계하는 새로운 사회연합의 형성을 예고하는 조건으로서, 이 전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사회적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정대화, <오마이뉴스> 2006.9)

이것은 지극히 올바른 인식이다. '새로운 사회연합'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그 모순점에 서야 하며 이것이 다른 정치권과의 연대의 가장 중요한 원칙일 터이다. 정대화의 인식은 미래구상의 발족 취지문에도 반영돼 있다.

"굴욕적인 한미FTA는 국민의 생존권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미래구상 준비위원회 발족 취지문, 2007.1)

불과 6개월이 지난 뒤, 미래구상은 "한미FTA 비준동의안의 차기 국회 상정"(2007.7)을 중요 정책으로 내걸었다. 놀랍게도 '대연정'의 결론에 똑같이 도달한 것이다. 내친 김에 몇 발자국 더 나아간다.

"진보라고 해서 한미FTA를 무조건 반대하고 보수라고 해서 찬성하는 사고가 가장 위험하다…(환경이슈의 중요성을 들어) 과거의 진보냐 보수와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 반대한다고 해서 진보가 될 수 있나. 그런 것은 저차원적인 진보다." (최열, <프레시안> 2007.7)

최열은 '새로운 사회적 모순구조'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것도, 국민의 생존권과 안전을 위협하는 한미FTA를 반대하는 것도 '저차원적인 진보'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환경문제가 고차원적(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이라거나, 또는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그 환경문제와, 한미FTA에 대한 모호한 태도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한미FTA가 환경정책에 미칠 영향을 진지하게 들여다봤다면 환경운동이야말로 한미FTA 반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야 정상이다.

▲ 지난 4월 17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2007 대선승리를 위한 미래구상·통합과번영 통합 기자회견'이 정대화 미래구상 공동집행위원장, 김선택 통합과번영 대표 등 양측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미FTA 유보하고 정권 잡아서 뭐하려고?

물론 그들의 고민을 모르지 않는다. 국민들에게 잘 부각되지 않는 한미FTA 때문에, 시장만능과 반통일, 반평화로 일로매진할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도 느껴진다. 이제 무엇을 위한 연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졸속성에 대한 비판'은 누구나 받아들이는 명제이니 여기까지만 후퇴하자는 합의가 이뤄진다.

과연 한미FTA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서 정권을 잡을 수는 있을까? 또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으면 한미FTA는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잡을 수도 없으며 잡아도 결국 지배계급 내에 압도적인 찬성론자들의 뜻대로 갈 것이 뻔하다.

새로운 대연정 구상이 속살거릴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과학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일단 시행해 보면서 부작용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정 안 되면 그 때 폐기해도 늦지 않은 것 아닌가?"

다시 반복하지만 한미FTA에 관한 한, 한나라당과 대통합론자들은 전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큰 역사적 사건을 해석할 능력도, 느낄 만한 절박함도 없다. 일제 하의 개량주의자(예컨대 이광수)나 유신에 참여한 지식인들(예컨대 박종홍)과 무엇이 다른가?

급해도 낭떠러지로 갈 순 없다

▲ 지난달 29일 한미FTA 체결 저지 범국민대회에 참가한 농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다 경찰에 가로막히자 항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아무리 급해도 낭떠러지가 지름길이 될 수는 없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그 때는 지금과 또 다르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사회경제는 그 틀에 맞춰 변해 나간다. 부작용이 본격화하면 그 때는 이미 너무 늦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설령 죽지 않는다 해도 다시 길을 찾아 절벽을 기어올라야 한다.

대선과 총선까지 아직 시간은 많다. 쓸데없는 정치공방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문제이다. 진보의 정의를 어떻게 내린다 해도, 또한 그 결과를 어떻게 예측한다 해도 한미FTA는 일단 저지해야 한다. 진보 또는 개혁세력이라면 어떤 통합, 어떤 연대를 말하든 '한미FTA 반대'라는 원칙을 앞세워 찬성론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장만능론을 대체할 사회경제정책을 요구받을 것이다. 연대의 폭을 넓힐 지점은 이 대안의 구체성과 현실성에 있는 것이지 결코 원칙, 또는 대전제의 묵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미FTA는 우리 국민 대다수,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까지 엄청난 파멸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민중은 스스로에게 닥친 위험을 지식인보다 훨씬 더 잘 느낄 수밖에 없다. 덧씌워진 환상을 깨뜨려서 맨 눈으로 한미 FTA의 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 대선 승리의 길이다. 한미FTA 저지는 연합전선의 방해물이 아니라 관건인 것이다. 터무니없는 환상, 진실의 은폐 속에서 오히려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작금의 '대연정'이 과연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될까?

덧붙이는 글 | 정태인 기자는 경제평론가로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냈고, 성공회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태그:#한미FTA, #대선, #진보개혁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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