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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의 역사는 유비, 관우, 장비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세 사람을 모신 청두 우후츠.
촉의 역사는 유비, 관우, 장비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사진은 세 사람을 모신 청두 우후츠. ⓒ 조창완

위·촉·오 삼국을 지금의 동아시아와 비교하면 어떨까. 3국 정립(鼎立)기를 놓고 볼 경우 기자는 한국을 촉, 중국을 위, 일본을 오나라에 비교하고 싶다.

우선 한국은 대의명분과 덕을 갖춘 지사의 나라다. 촉은 도원결의를 통해 사람을 얻고, 삼고초려를 통해 인재인 제갈량을 얻었다. 비록 탄생도 늦고 규모도 작았지만 인재는 많았다. 이런 힘은 유비의 정통성과 덕에 기초한 것이다. 한국도 인재가 많은 나라다. 초강대국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만 인재를 바탕으로 3국 정립의 한 축이 됐다. 그런 면에서, 촉처럼 쓰촨 같은 안전한 땅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을 촉에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위나라와 비교할 만하다. 위나라는 조조의 치밀한 전략 아래 황제를 뒤엎고 세운 최강대국이다. 환관 집안을 바탕으로 한 조조는 낙양성의 군관으로 있을 때 엄정한 규율을 세워 세상의 주목을 받고 정계의 풍운아로 성장한다. 이후 반동탁 연합군을 모으는 주축이 되고, 결국은 황제가 자신에게 의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관도 싸움에서 몇 배나 많은 군사를 보유한 원소를 무찔러 중원의 중심세력이 된다.

그래서인지 이중톈이나 청쥔이 등 최근 <삼국지>를 풀어쓰는 이들은 조조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중국은 사회주의로 시작한 초발심을 잃고 패권국가의 면모를 서서히 갖춰가고 있다. 거대한 땅과 자원, 인구를 확보하고 있는 만큼 중국을 위나라에 비유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일본은 오나라에 비유할 만하다. 일본은 문화적 자산을 뒤늦게 보유했지만 새로운 자산을 빠르게 받아들여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자기 것은 지키면서 외래 사상과 물질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여 자기화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패전을 겪었지만 여전히 세계 2위의 강대국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

손권이 이끈 오나라 역시 적벽대전 이후 급성장한 신생국가로 강남의 비옥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화동(저지앙, 지앙쑤)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지역이지만 창사(長沙)에 기반을 둔 오나라가 화동의 인문적 소양을 완벽하게 받아들인 것 같진 않다. 따라서 신흥 강국 정도로 두면 맞을 것 같다.

형주 고성은 평지에 세워진 성으로 상대적으로 공격은 쉽지만 방어가 어려운 구조다.
형주 고성은 평지에 세워진 성으로 상대적으로 공격은 쉽지만 방어가 어려운 구조다. ⓒ 조창완

제갈량은 왜 형주를 고집했을까

기자는 중국 전역을 대부분 다녀봤다. 그 가운데 가장 신비한 땅이 형주(荊州)다. 기자는 형주가 전략적 요충이라는 말에 100% 공감한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형주가 강대국에게는 적합한 땅이지만 약소국에게는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땅이라는 점이다.

일단 형주를 살펴보자. 형주는 동으로 창지앙(長江)의 평원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 위쪽은 오나라 땅이었다. 동남으로는 동정호가 시작되는데 이곳도 오나라의 영토였다. 서쪽으로는 싼샤(三峽)가 시작되는데 이곳은 후에 촉의 기반이 되는 땅이다. '구글 어스' 같은 지형 프로그램을 보면 이곳이 전략적 요충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전략적 요충을 촉나라 같은 신생국가가 보유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전략적 요충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변국에서 모두 눈독 들이는 곳을 촉이 갖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자는 제갈량의 정치적 실패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형주의 가장 큰 난점은 본부인 촉의 중심 청두에서 너무 멀다는 것이다. 제갈량은 적벽대전으로 형주를 얻은 후 관우에게 이 지역을 지키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용맹한 관우라고 할지라도 그의 힘으로 이 전략적 요충을 지키는 것은 무리였다. 이 형주 싸움에서 실패하면서 촉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 분에 못 이긴 장비가 술을 먹다가 부하의 손에 죽고, 유비 역시 화병으로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하의 지형에 밝았던 제갈량이 왜 형주를 고집했을까. 얻은 땅이기에 내놓기 싫다는 것이었을까. 화용도 싸움으로 이미 촉 내부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만큼 관우와 벌인 기 싸움에서 밀릴 일도 없었을 텐데 왜 관우에게 형주를 지키게 했을까.

웅장한 기상이 느껴지는 싼샤는 세계적인 명승지다.
웅장한 기상이 느껴지는 싼샤는 세계적인 명승지다. ⓒ 조창완

촉에서 너무나도 먼 형주

형주에서 촉의 수도 청두에 이르는 길을 보면서 한번 돌이켜 보자. 지금은 징저우로 불리는 형주성에서 청두까지 직선거리는 780km다. 결코 먼 거리가 아니지만 그 사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창지앙이라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물길을 따라가면 이창(宜昌)에서 충칭까지 648km며 여기에 이창-형주 120km, 충칭-청두 338km를 더하면 총 1106km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게다가 중간에 있는 싼샤는 이동하기에 쉽지 않은 거대한 협곡으로 돼 있다.

그래서 형주가 위험에 빠지면 그 소식이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본부에서 구원하러 가기가 너무나 어렵다. 실제로 위험에 처한 관우가 손을 써볼 틈도 없이 패전한 것도 이런 지형의 탓이다.

그 때문에 필자는 제갈량이 형주를 오나라에 넘겨주고 싼샤를 막아둔 채 촉의 북방라인인 광원(廣元), 한중(漢中), 오장원(五丈塬)을 거쳐 장안성을 향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하는 가정을 해본다.

이 라인의 전략적 요충은 촉이 갖고 있고, 출사표 이후 오장원까지 진격한 것만 봐도 가능성이 충분한 라인이었다. 만약 이 라인을 따라 장안을 되찾고 낙양을 거쳐서 위나라를 위협했다면 촉에 충분한 승산이 있지 않았을까.

이런 가정을 차치하고 형주를 살펴보자. 형주 인근에는 <삼국지>의 극적인 장소가 많다. 그 중 한 곳이 장판파(長坂坡)다. 조운이 미부인이 몸을 던진 우물을 덮고 유비의 아들 아두를 안은 채 적군의 포위를 뚫고 나오는 장면에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렇게 온 조운을 본 유비가 아두를 바닥에 던지며 조운을 걱정하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역사 해설자들은 이런 일들을 거의 부인하지만, 사실 이런 재미조차 부여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에만 충실한 <삼국지>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촉의 멸망이 잠긴 비극의 싼샤

형주에서 굽은 강줄기를 타고 조금 상류로 향하면 이창이 나온다. 중소 규모의 소도시에서 지금은 공항까지 있는 중대형 규모로 성장한 곳이다. 이창을 만든 것은 싼샤댐 공사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댐으로 기록된 싼샤댐에선 수위 170m에 육박하는 거대한 공사가 거의 마무리돼 있다. 이창 너머에 있는 즈구이(姊歸)에서 시작된 거대한 댐은 충칭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는 <삼국지>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우산(巫山)에 조금 못 미친 곳에 공명이 비결을 숨겼다는 공명비가 있었는데, 싼샤댐에 물이 차면서 그 표식은 사라졌다.

바이티청에 있는 탁고당. 유비가 죽으면서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모습. 유비의 두 아들은 꿇어앉아 있다.
바이티청에 있는 탁고당. 유비가 죽으면서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는 모습. 유비의 두 아들은 꿇어앉아 있다. ⓒ 조창완
시링샤, 우샤, 취탕샤의 싼샤를 지나면 바이티청(白帝城)이 나온다. 관우가 죽은 후 이성을 잃은 장비는 장달과 범강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죽었고 유비는 더욱 화가 난 상태에서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다. 관우와 장비 같은 맹장이 사라진 촉군은 결국 이창 인근에서 육손이 이끄는 오나라군에 패퇴해 쓸쓸히 강을 거슬러 돌아간다. 제갈량은 바이티청에 못 미친 곳에 있는 취탕샤의 끝에 팔진도를 펼치며 오나라군을 괴롭히지만, 다가오는 유비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유비는 이곳 백제성에서 '유비탁고'(劉備託孤)를 마친 후 죽는다.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면서 '자식이 무능하면 정권까지 넘봐도 좋다'고 까지 한 유비탁고는 결국 제갈량을 계속된 충성의 길로 이끌었고 유비와 제갈량, 두 사람의 이름이 덕의 상징으로 남는 데 일조한다.

바이티청을 지나 한참 가면 장비묘(張飛廟)가 나온다. 용맹하지만 다혈질의 상징인 장비는 후에 운양(云陽)에서 강주(江州, 지금의 충칭)에 이르는 지역을 책임진다. 장비는 천하의 맹장이었지만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해 결국 허무한 죽음을 맞는 비극적 인물이었다.

우후츠에 있는 제갈량의 출사표. 송대 명장 악비가 다시 쓴 글을 복사한 것이다.
우후츠에 있는 제갈량의 출사표. 송대 명장 악비가 다시 쓴 글을 복사한 것이다. ⓒ 조창완

출사표도 막지 못한 촉의 멸망

운양, 강주를 지나서 더 가면 청두(成都)가 나온다. 이곳의 옛 이름은 익주(益州)다. 유표가 형주를 양보했을 때는 받지 않았던 유비는 유장이 지배하던 익주가 자신의 3국 정립 구상의 바탕이 될 만한 땅임을 파악하고 재빨리 차지해 촉의 정치적 중심으로 삼는다.

청두에 가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삼국지> 관련 장소가 우후츠(武候祠)다. 촉한 소열(昭烈)황제 유비의 묘임에도 무후사로 불리는 까닭은 이곳에 제갈량의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뿐만 아니라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이 도열해 있는 곳에 제갈량의 이름을 붙인 것은 충에 대한 보답 차원이라고 보면 맞을 것 같다.

도원결의의 주인공들이 죽자 제갈량은 자신의 미래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다. 물론 촉에는 조운, 강유 같은 명장이 여전히 있었지만 결핵에 가까운 병은 제갈량의 평정심을 잃게 한다. 이때 제갈량은 천고의 명문인 '출사표'를 쓰고 장안으로 향한다.

광원에 있는 밍위에샤(明月峽) 검문촉도 모습.
광원에 있는 밍위에샤(明月峽) 검문촉도 모습. ⓒ 조창완
장안으로 가려면 앞에서 말한 광원, 한중을 거친 후 다시 북진해 오장원을 지나서 동진해야 한다. 이 길은 검문촉도(劍門蜀道)로 불리는 천하의 난관이다. 길이 없어서 강가 바위를 뚫어서 한두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만든 매우 험난한 길이다.

제갈량이 이끄는 군대는 이 길을 지나 광원, 한중에 닿는다. 한중에서 벌인 싸움에서 촉군은 명장 강유의 활약으로 승리하고 다시 한참을 올라가 장안의 눈앞이라고 할 수 있는 오장원에 이른다. 오장원은 지금의 서안에서 서쪽으로 17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거기에 서안까지는 거대한 평원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물론 죽은 후 사마의를 희롱하는 기술(奇術)을 선보였다지만 제갈량의 정치적 성과는 거기까지였다. 그 때문에 제갈량을 실패한 정치가로 평하는 후세인이 많다. 하지만 제갈량은 천운이 다하는 순간까지 충성을 다했다. 맞수인 사마의가 조씨 집안에서 정권을 찬탈한 것과 달랐다는 점에서 제갈량은 천고의 충신으로 추앙받을 만하다.

제갈량은 실패한 정치가인가

제갈량의 사당이 있는 우후츠.
제갈량의 사당이 있는 우후츠. ⓒ 조창완
기자는 최우석 부회장과 함께한 답사 당시 기차를 타고 광원에 도착했다. <삼국지>와 큰 관련은 없지만 중국 최고의 여걸인 무측천의 고향인 광원은 아주 잘 정비된 느낌을 줬다. 하루를 묵은 후 차량으로 한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중간에서 검문촉도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한참을 달려 면현(勉縣)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제갈량의 묘와 더불어 삼국지 명장 중 하나인 마초의 묘, 유비가 황제에 등극했다는 배장대(拜將台)가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제갈량의 묘는 아름드리 고목이 자라는 전형적인 중국 고묘였다.

제갈량의 묘.
제갈량의 묘. ⓒ 조창완
솔직히 제갈량에게 왜 형주를 고집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만약 전장이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으면 <삼국지>의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제갈량은 출사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드러냈다.

사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된 것이 출사표다. 출사표를 통해 삼고초려와 제갈량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기자는 출사표를 보면서, 제갈량을 실패한 정치가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지만 공명에 대한 세상 사람의 추앙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제갈량은 영웅의 기운을 타고났지만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유비에게 3국 정립(鼎立)의 전략을 건의하고 결국 실현시켰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켜냈다. 이러한 제갈량이 정말 실패한 정치가일까.

아울러 기자는 '복잡한 정세에 놓여있는 우리 땅에서 제갈량처럼 큰 기상을 펼칠 수 있는 이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며 한탄했다. 그렇지만 어딘가에는 그런 인재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삼국지#제갈량#동아시아 3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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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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