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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련을 세 포기 사다 심었는데 이렇게 많이 번졌네. 영준네 좀 줄께 가져가서 심어 봐." 우리 집에 있는 꽃 중에는 박선생님 댁에서 얻어온 것들이 많습니다.
"한련을 세 포기 사다 심었는데 이렇게 많이 번졌네. 영준네 좀 줄께 가져가서 심어 봐." 우리 집에 있는 꽃 중에는 박선생님 댁에서 얻어온 것들이 많습니다. ⓒ 이승숙
고 김남주 시인의 미망인이신 박광숙 선생님

지난 토요일(23일) 아침이었습니다. 그 날은 한 달에 두 번 있는 토요 휴무제 날이라서 느긋하게 아침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받아보니 박 선생님 전화였습니다.

"영준 아빠 계셔? 우리 집 잔디 깎는 기계 안 된다. 영준 아빠가 와서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마침 남편은 배드민턴 대회에 출전하느라 막 집을 나선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제가 박 선생님 집으로 가봤습니다.

제가 박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분은 박광숙 선생님이십니다. 박 선생님은 본인의 이름보다 돌아가신 남편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분이십니다. 박 선생님의 남편은 바로 고 '김남주' 시인입니다.

고무신에다가 고무줄 바지 차림인 박선생님, "아이구 차림이 이런데 어쩌지?" 그러면서도 아들과 함께 사진 찍는 게 좋으신지 활짝 웃었습니다.
고무신에다가 고무줄 바지 차림인 박선생님, "아이구 차림이 이런데 어쩌지?" 그러면서도 아들과 함께 사진 찍는 게 좋으신지 활짝 웃었습니다. ⓒ 이승숙
박 선생님을 알고 지낸 지가 벌써 햇수로 9년이나 됩니다. 늘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지만 막상 박 선생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스쳐 지나가며 본 사람에 대해서는 다 아는 듯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랫동안 근처에서 바라본 박 선생님에 대해서는 섣불리 아는 체 하기가 어렵습니다.

서점에서 우연히 박 선생님이 쓴 책을 만나다

1999년 1월의 어느 날, 서점에서 박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박 선생님은 부군이신 김남주 시인을 멀리 떠나보낸 슬픔에 잠겨서 오랫동안 땅 속에 묻힌 것처럼 살았던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입이 떨어지고 울음처럼 글이 나왔다고 합니다. 남편을 먼 곳으로 떠나보낸 지 5년이나 지나서야 박 선생님은 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거였습니다. 박 선생님이 온 마음을 다해서 쓴 글들을 묶은 책이 그때 막 출간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내가 그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강화도로 이사를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던 때였는데 박 선생님의 책을 보고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래, 이런 분이 사시는 곳이라면 분명 좋은 곳일 거야. 언젠가는 박 선생님을 만나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래서 우리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강화로 용감하게 이사를 했습니다.

꽃밭에 나있는 잡초를 우둑우둑 뽑다가 햇볕이 따가워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추랑 치커리 등을 얹고 비벼먹은 쫄면 맛이 하도 좋아서 그 후로 두 번이나 더 해먹었답니다.
꽃밭에 나있는 잡초를 우둑우둑 뽑다가 햇볕이 따가워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추랑 치커리 등을 얹고 비벼먹은 쫄면 맛이 하도 좋아서 그 후로 두 번이나 더 해먹었답니다. ⓒ 이승숙
처음 이사 와서는 강화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어디가 어딘지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박 선생님이 살고 계신 '불은면'이 단단하게 입력이 되어 있었습니다. 불은면에 땅을 사서 근처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인연은 닿는건가 봐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저는 박 선생님과 안면을 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좋은 이웃으로 박 선생님과 함께 해나갑니다.

그 당시 남편은 이웃 섬인 교동도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손에는 월간 잡지들이 여러 권 들려 있었습니다.

마음이 닿으면 인연은 이어진다

이사를 하면 바뀐 주소를 출판사에 알려 줘야 하는데 알려주지 않아서 정기구독하던 책들을 그동안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새 학교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남편은 책이 안 오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출판사로 전화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주소불명으로 반송되었던 책들이 여름방학 무렵에 한꺼번에 다 온 거였습니다. 그 책들 속에는 <처음처럼>이라는 교육 잡지도 있었습니다.

<처음처럼>에는 '강화 이야기'라는 만화가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었는데 '마리서당'이라는 교육공동체의 이야기가 6월호에 만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만화를 보는 순간 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강화로 이주해 온 사람들 중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만든 교육공동체라니 제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바로 출판사로 전화를 해서 마리서당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김남주 시인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들인 '토일'이 모습에서 김남주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남주 시인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들인 '토일'이 모습에서 김남주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이승숙
마리서당은 강화로 이사 들어온 사람들끼리 만든 교육공동체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면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모여서 '四字小學'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체험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배워 나갔습니다.

그 곳에서 박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박 선생님도 우리 마리서당의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박 선생님을 '토일이 어머니'라고 겁도 없이 불렀습니다. 저랑 나이 차이가 십 년 이상이나 나는 윗분인데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저는 그 다음 해부터 마리서당의 '총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총무로 있을 때 박 선생님은 마리서당의 대표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 선생님에게 음양으로 많은 배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큰 나무 밑에는 나무가 못 자라지만 큰 사람 밑에는 사람이 큰다

박 선생님은 아주 단단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소녀 같은 분이십니다.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또 나이 먹었다고 내가 어른입네 하며 대접 받을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늘 열정적으로 배움에 임하시고 실천을 하는 분입니다.

박 선생님은 '외유내강'형의 분입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항상 여유롭게 대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고 그리고 뜨거운 열정을 담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박 선생님은 연세에 비해서 젊고 건강합니다. 박 선생님의 젊음의 비결은 바로 세상에 대한 깨어 있음과 사람에 대한 사랑인 것 같습니다.

보리수 열매를 땄습니다. 인심 넉넉한 박선생님은 다 가져가서 우리 애들 주라고 하십니다.
보리수 열매를 땄습니다. 인심 넉넉한 박선생님은 다 가져가서 우리 애들 주라고 하십니다. ⓒ 이승숙
전에 제가 어릴 때 친정아버지가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영웅호걸도 지(자기) 집 하인한테는 보통 사람인기라."

멀리서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사람도 가까이에서 보면 허점이 있다는 말씀이었겠지요. 우리가 이름으로만 아는 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있을 겁니다. 멀리서 보면 존경스러운 분인데 가까이에 살면서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박 선생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겪어본 박 선생님은 늘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배움의 열정이 많으신 분이시고 뜨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자신을 고집하지 않으시며 한결같이 그 자리에 지켜 서서 젊은 사람들을 북돋아 줍니다.

큰 나무 밑에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하지만 큰 사람 밑에 있으면 사람이 큰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바로 본보기가 되니 저절로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좁고 어리기만 했던 제가 박 선생님 근처에 있으면서 조금은 넉넉한 사람으로 클 수 있었습니다.

박 선생님이 제 가까이에 계셔서 참 좋습니다. 존경하며 따를 수 있는 어른이 제 근처에 계시니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작은 물들이 모이고 보태어져 논 한가운데 큰 수로를 그득 채우고, 수로를 채웠던 물은 수문을 맴돌아 흘러 내릴 곳을 찾아 다시 돌돌거리며 여울을 이뤄, 수문께에는 여울 모양의 돌살들이 무늬를 이루며 얼어붙어 있습니다.

저 꽝꽝 언 물이 봄이 되면 몸을 풀어 마른 논을 적시고 흙을 풀어 내고, 딱딱하게 굳은 볍씨와 풀씨들을 싹틔워 봄을 봄답게 하고 여름을 여름답게 무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 박광숙 책 <빈 들에 나무를 심다>에서

#박광숙#고 김남주 시인#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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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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