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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달콤 쌉싸래하다. 눈을 뜨면 먼저 아기를 재우려는 어머니의 손길 같은 배의 가벼운 진동이 등허리에서 느껴지고, 고개를 들면 멀리 흰 눈 모자를 쓴 산들이 천천히 뒤로 흘러가는 게 보인다.

구름은 산 중턱에 내려 앉아 잠시 다리를 쉬고 있고, 너부데데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는 물비늘을 퍼득이며 장난을 치며 놀고 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비가 내린다. 정처없이 떠다니는 유빙은 제 스스로 쓸쓸한데, 바닷새 몇 마리 그 위에 앉아 그를 위로하고 있다. 비는 새들의 좁은 어깨 위에도 내린다.

ⓒ 제정길
'비의 도시'라 불리는 알래스카의 캐치칸(Ketchikan)은 그 이름에 어울리게 비부터 내린다. 일년 중 비 내리는 날이 250일이 넘으며, 연 강우량이 4100mm나 되는, 인구 1만3000여명의 섬의 도시 캐치칸. 배에서 바라다 보이는 시가는 운무에 싸여 고즈넉하다.

배가 부두에 닿자 마치 환영 팡파르라도 울리듯 비는 제법 세차게 쏟아졌다. 비가 내리는 비의 도시를 무량하게 보고 있다가 비를 맞으며 비에 젖는 도시로 내려섰다. 시계는 오전 10시 30분. 관광안내소는 부두 가까이에 있었다. 아니 그곳에 가기 전에 배 닿는 코 앞에 관광안내 노점상(?)들이 팻말을 들고 빗속에서 호객을 하고 있었다(미국에도 이런 게 있네).

ⓒ 제정길
아무렴 어때,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들에게 가서 비에 적게 노출되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고 그래도 캐치칸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을 요구하여 표 두 장을 샀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하는 거란다. 비 사이를 다니며 가게 몇 군데에 들러 시간을 보내었다. 원, 가게라고는 반 이상이 보석 파는 곳이었다.

투어버스에 타자마자 관광가이드이자 운전기사는 이곳은 비가 안오는 날이 연중 50일도 안 된다며 오늘 같은 날은 화창한 날(Sunny Day)로 분류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너스레 덕분인지 얼마쯤 가자 슬그머니 비가 그쳤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볕이 쨍쨍 났다. 그의 말대로 화창한 날로 분류될 만한 날이 되었다.

ⓒ 제정길
투어버스의 첫 번째 정차는 길 옆의 크지 않은 개울가였다. 별로 신기할 것도 없어 보이는 개울에 대하여 그는 열을 올리며 설명을 장황하게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연어가 회귀하는 개천이란 거였다. 그러고 보니 유명할 만도 했다.

캐치칸의 또 다른 별명이 '연어의 도시'이고 시내 곳곳에 연어 부화장이며 연어 가공공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연어가 많이 오기는 하는 모양이다. 자료에 의하면 1930년대에는 한 해에 연어 포획량이 150만 상자를 넘었다고 한다. 힘 딸리는 연어를 위하여 개천 옆으로 난 우회길(Fish Ladder)이 이채로웠다.

ⓒ 제정길
두 번째 정차는 로터리 비치에서 였다. 끝없이 펼쳐진 해변의 오목한 곳의 끝을 막아 물을 가두어 놓고 수영장으로 사용한단다. 글쎄, 직접 바다에 텀벙 뛰어들어 헤엄치면 되지 무엇 때문에 갇힌 물에 수영을 해야 하는지, 조금 의아스러웠다. 해변가에는 어디에서 떠밀려온 뗏목들인지 몇 아름씩 될 목재들이 방치되어 썩고 있었다. 다만 갯바위에 붙은 노란 이름 모르는 풀꽃, 아름다웠다.

ⓒ 제정길
세 번째 정차는 우림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버스기사는 차를 주차장에 주차 시키고는 우리를 이끌고 우림(雨林) 속으로 들어갔다. 이 추운 지방에 왠 우림이냐고 생각되었지만 정말 우림은 있었다. 울울창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고 이름 모르는 풀들이 땅을 뒤덮었다. 주야장천 내리는 비가 이러한 숲을 이룬 모양이다. 자연의 힘이란….

ⓒ 제정길
우림을 빠져나와 도보로 토템 파크까지 걸었다. 100여년 전 현지 인디언들이 만들어 세워둔 거대한 솟대들이 하늘을 찌르고 서 있었다. 새의 모양도 있고 물고기의 모양도 있고 원숭이의 모양도 있고 인간 모양도 있었다.

ⓒ 제정길
그것들은 각각의 의미와 기원을 담고 여태도 서 있으나 그들의 기원은 이루어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땅은 빼앗겨 백인들 차지가 되었고 그들은 솟대나 쳐다보며 한숨이나 짓는 처지로 전락 되어버렸으니까.

ⓒ 제정길
마지막 정차지는 좀 특이하였다. 세칭 말하는 홍등가였다. 1903년 시의회는 당시 여러 군데 산재해 있는 사창가를 개울가의 한 곳에 모여 영업을 하게 하였으니 그게 이 거리가 만들어진 시초였다고 한다.

30여채의 영업집들이 각 1, 2명의 영업녀를 데리고 개울을 통해 밀반입되는 술과 여자를 팔며 (당시는 금주법 시대였다)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들은 가고 그들의 집은 다른 용도로 바뀌었으나 다만 지나는 관광객들 그때를 상상하며 쓸쓸한 미소를 짓고 간다.

ⓒ 제정길
3시간여의 관광을 끝내고 배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배가 출항하기에는 아직 2시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마침 지도에 보니 이글파크(Eagle Park)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사실 그놈의 흰머리 독수리를 꼭 보고 싶었다.

알래스카가 자랑하는 아니 미국이 으시대며 내세우는 그 흰머리 독수리를, 그 형형한 눈을 제대로 한 번 보고 싶었다. 어제 쥬노의 로버츠 산에서 보긴 했지만 그것은 야생의 상태가 아니라 갇힌 놈이었다. 어딘가 안내서에 보니까 거기에선 몇 마리의 흰머리 독수리가 야생에 가깝게 살고 있다고 했다.

지도를 따라 시내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독수리가 살 만한 환경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위에는 인가며 도로며 바다가 있을 뿐 숲은 없었다. 거의 한 시간을 걸은 것 같은데 가까운 시간 안에 숲이 나타날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상점에 들러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친절하게도 독수리의 날개 벌린 모양까지도 흉내내며 저쪽으로 가라고 가리켜 준다. 우리가 왔던 곳이다. 반신반의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 독수리가 비들기처럼 남의 집 처마 밑에라도 앉아 있다는 건가?

두리번 거리며 가고 있는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예상치 않은 것이 눈에 띄었다. 사방 10m나 될까 말까 한 조그만 공터에 나무로 만든 새가 한 마리 솟대 위에 앉아 있었다. 가까이 가서 그 아래에 붙어있는 팻말을 보니 왈 이글파크, 즉 독수리 공원이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을 투입하여 애를 써서 찾아온 것이 형형한 독수리의 눈은커녕 눈의 형태 마저 애매한, 삭아가는 나뭇조각 하나 였다는 것인가.

▲ 내가 독수리라고 생각했든 것은 애초부터 독수리가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잘못 그려낸 허상일 뿐.
ⓒ 제정길
날씨는 다시 흐려져 한 방울씩 비가 뜯기 시작하여 배로 돌아 왔다. 출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덟 시간의 많지 않은 하선 시간을 전반에는 투어버스라는 물체에 의지하여 내 의지와는 별반 관계없이 차 가는대로 움직였고, 후반에는 내 발로 움직이며 '볼거리'를 찾아 나섰으나 도달한 곳은 삭아가는 나뭇조각 하나 서 있는 곳이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일터에서 풀려나 '형형한 눈'을 찾아 떠돌아 보나 도달하여 보면 그것은 삭아가는 나뭇조각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 도대체 나는 지금 내가 찾으러 가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제대로 있기나 하는 것인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배 떠날 시간 가까워 오는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 평범한 '늘근백수'가 미국 등지를 떠돌며 보고 느낀 것을 기술해가는 여행기입니다. 여행은 4월 25일 시작되었고, 7월 말 쯤 끝날 예정입니다. 지금은 알래스카-밴쿠버 간의 크루즈 여행기를 올리는 중이고 이어서 캐나다 록키 패키지 관광 등을 게재하려 합니다. 글은 중간 거점인 새크라멘토에서 인터넷 작업을 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캐치칸#흰머리독수리#백수#알래스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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