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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없는 세상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풀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거나 하다못해 염치를 차려 처신해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잡초'라는 표현을 자제하며 심어놓은 작물과 풀이 적절한 타협을 통해 공생하기를 희망했지만 그건 일방적인 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비닐을 씌운 고추와 야콘은 직접적인 풀의 공격을 덜 받지만 잔디는 풀에 밀려 모습을 감추었다.

옥수수와 콩은 풀에 시달려 맥을 못 추었다. 주말은 물론 주중의 오후에도 시간만 나면 아내는 호미를, 나는 괭이를 들었다. 그러나 열 마지 밭의 풀이 호미와 괭이로 잡힐 일이던가.

▲ 풀매기 전의 야콘밭
ⓒ 홍광석
"취미생활을 하는데도 돈이 든다는데 놀러가서 돈 쓰는 셈치고 사람 사서 풀을 맵시다."

골프장에 다니면서 몇 십 만원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마당에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골프장이 아닌 가벼운 여행을 하더라도 기름 값 몇 만원은 흔적 없이 사라질 판인데 좋은 공기 마시며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을 하고, 더구나 우리 손수 가꾼 것을 먹는 재미가 쏠쏠한데 돈 좀 쓴들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한 어려운 아주머니들에게 품삯을 주는 일은 소득 재분배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이웃 아주머니들께 부탁하여 풀에 갇힌 잔디는 겨우 구했다. 그렇지만 풀 속에 앉은 옥수수와 콩, 풀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참외, 수박과 호박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연 농법이 꿈으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가는 마을 노인들마다 제초제 사용을 권했다. 그러나 제초제 사용하지 않겠다고 시작했던 일 아닌가!

그래서 다시 마을의 아주머니에게 콩밭이라도 매달라고 했더니 한 평도 못 되는 땅만 헤집어놓고 손을 놔버렸다. 책임지고 잘 하겠다는 아주머니를 믿고 퇴근 후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술에 취한 아주머니는 제초제를 뿌리라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품삯으로 만원을 달라고 억지를 썼다.

혼자 하는 일이 재미없었을 수 있다. 굳어진 땅이 힘들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올바른 처신이랄 수 없다.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야박하게 따질 수 없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받아들고 돌아서는 아주머니 뒤에서 우리는 사람 잘못 봤다는 말을 하며 웃었다.

▲ 키가 큰 풀만 눕힌 후 찍은 야콘밭
ⓒ 홍광석
생각하면 지금껏 인연이라는 미명하에 만난 사람 중에서 뒤끝이 개운치 못한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한둘이던가!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사람도 헤아릴 수없이 보았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끼리도 있어서는 안 될 '동지'들끼리 음해를 일삼고, 옳고 그름을 떠나 이익과 손해를 따지며 나를 떠났던 '후배'들, 변혁 운동의 순수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일부 '동지'들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가!

교회 목사님이나 신부님을 보고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분노를 삭였지만 가끔은 내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들 때도 정말 많았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기대와 관심까지 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밭에 가득한 풀을 본다. 그러고 보면 감정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 풀이란 굳이 내가 적개심을 불태우며 원망할 상대가 아니다. 노여움을 품고 없애야 할 대상도 아니다. 어쩌면 한 순간이라도 생명의 꽃을 피워보겠다고 거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는 풀에게 순전히 내 이익을 위해 괭이질을 하는 일이 잘못인 줄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잘한 일이 아닐 지라도 질병 따위는 모른다는 듯 왕성한 생명력으로 시간을 다투며 옥수수와 콩은 물론 철쭉과 석류나무 밑으로 파고드는 풀까지 그냥 둘 수 없다. 다시 괭이를 들었다. 노력의 대가치고는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했던 아주머니 때문에 조금 속상해하던 아내도 "취미 생활에 들어간 간식비"라는 말을 하며 호미를 잡는다.

뒤집어 생각하면 풀을 상대로 아내와 나는 더욱 두터운 공동 전선을 형성한 꼴이다. 먹어보지도 못한 간식비가 우리의 연대 의식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고 본다. 부부의 유대감은 외적인 요인 때문에도 더 두터워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는 작물에 접근하는 풀을 매고, 나는 괭이를 들고 작물의 키를 넘는 풀만 쫓아다녔다.

▲ 아이 주먹만큼 자란 수박이 귀엽다.
ⓒ 홍광석
옥수수를 위협하는 풀은 뿌리를 뽑았다. 풀에 감추어져 있던 주먹만큼 자란 수박도 찾아냈다. 야콘 밭이랑에 바람이 통하고 며느리밑씻개와 경쟁하던 호박도 한숨을 쉰다. 콩밭은 매기도 전에 기나긴 여름해도 저물고 만다.

자두나무 아래 쉼터에 앉으니 자두의 무게에 늘어진 가지가 시선을 잡는다. 자두가 곧 익을 것이다. 꽃으로 희망을 주고 따가운 볕을 가려주었던 자두나무였다. 이제 열매를 선물로 주려 한다. 우리는 자두나무에게 무엇을 주었던가.

▲ 익어가는 자두 열매
ⓒ 홍광석

#자연농법#풀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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