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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9일 사회봉사활동 오리엔테이션 현장. 봉천역 앞에서 봉사학생들이 시각장애 체험을 하고 있다.
ⓒ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봉천역 4번 출구를 나서자 화로 위에서 더운 김을 내뿜는 노란 옥수수가 눈에 들어온다. 구수한 향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일주일에 두 번 이 길을 나서는 임동식(44)씨에게도 봉천역의 옥수수는 한결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풍경을 '코'로 먼저 맞이한다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임씨와 같은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듣고 느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톡~탁~톡~탁~" 봉천역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일정한 간격의 마찰음. 인근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걸음 소리이다. 정확히 말해 시각장애인들의 보행보조기구인 '흰 지팡이(white cane)'가 지면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이다. 좌우로 호를 그리면서 내딛는 흰 지팡이의 끝은 지면의 변화와 장애물의 위치 등 보행정보를 알려 준다.

흰 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흰 지팡이를 짚는다는 것은 혼자서 걸을 수 있다는 자립의 표시이다. '흰 지팡이 헌장'에도 흰 지팡이를 동정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도로교통법 11조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도로를 보행할 때는 흰 지팡이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임동식(44)씨는 흰 지팡이를 휴대만 할 뿐 잘 사용하지 않는다.

"제가 1982년에 맹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학생들은 졸업하고 나면 흰 지팡이를 안 짚으려고 했어요. 장님, 소경, 봉사라고 불리는 게 싫었거든요. 그때부터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웬만큼 낯선 장소가 아니고서는 지팡이를 안 짚고 다녀요."

임씨처럼 맹학교 출신인 시각장애인들은 학창시절 보행훈련 등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정안인(正眼人·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단독보행이 가능하다. 전맹(시력이 전혀 없는 상태)이라도 안면신경을 통해 앞을 가로막는 큰 물체 정도는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보행을 위해 흰 지팡이는 필수품이다.

"제아무리 잘 걸어 다녀도 땅이 꺼지는 데는 장사가 없죠. 올 초에도 맨홀에 한 번 빠졌어요. 하하."

맨홀만큼이나 시각장애인들의 보행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인도 곳곳에 설치된 말뚝이다. 서울시내 차량의 보도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된 말뚝인 일명 '볼라드'는 시각장애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종의 도심 속 지뢰다.

"말뚝은 말뚝대로 설치되어 있는데, 인도에는 또 어찌나 차량이 많은지. 잘 피해 다니는 수밖에 없죠."

서울시 볼링 대표 임씨, 소리와 손끝 감각으로 경기 펼쳐

▲ 도우미와 가이드레일의 도움으로 볼링을 치고 있는 임동식 씨.
ⓒ 이대진
명동역 3번 출구. 여기 저기 설치된 볼라드를 '잘 피해서', 임씨는 매주 한 번 이상 볼링장을 찾는다. 구력 7년차인 임씨의 최고점수는 170점, 포 배거(4 begger : 네 번 연속 스트라이크) 경험도 몇 번 있다. 작년 전국체전에서 볼링이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어 서울시 대표로 출전하기도 한 임씨는 정작 볼링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몇 달 전에야 처음으로 볼링 핀을 만져보고 그 모양을 알게 되었다. 임씨는 소리와 손끝의 감각으로 볼링을 한다.

"공이 손에서 떠날 때 손가락 끝에 걸리는 느낌이 있어요. 그 느낌으로 스트라이크를 예감할 수 있죠. 핀이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대충 몇 번 핀이 남았는지 알 수 있어요."

"1·3 존(zone)으로 잘 들어갔는데 아깝게 5번 핀이 하나 남았네요."

아무리 다른 감각에 의지한다고 해도 전맹인 임씨가 혼자서 볼링을 치는 것은 무리다. 시각장애인 볼링은 크게 전맹부와 약시부로 나뉘는데, 시력이 전혀 없는 전맹부는 레인의 방향을 알려주는 가이드레일과 경기의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도우미가 필요하다.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볼링교실을 맡고 있는 안상용(30·사회복지사)씨는 설명해주는 사람만 있으면 시각장애인들이 대부분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정안인들 코칭보다 좀 더 자세하게 가르치는 정도예요. 보여주지는 못해도 대신 설명만 잘 하면 시각장애인들도 정안인들처럼 볼링, 수영, 요가, 인라인스케이트 등의 레포츠를 배우고 즐길 수 있죠."

배우는 데도 개인적인 차이는 있다. 안씨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나 취학 전 시력을 잃은 사람들보다 성인이 되어서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들을 가르치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예전에 볼링을 본 경험 때문에 더 힘들어 하세요. 제대로 안 되니까 화를 내실 때도 있고요. 반면에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볼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습관 때문에 오히려 학습능력이 뛰어나신 것 같아요."

후천적 시각장애인 오히려 더 힘들어 해

학습능력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차이가 난다. 출생이나 취학 전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맹학교에서 보행이나 점자교육 등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를 스스럼 없이 받아들인다. 반면 성인이 되어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시력을 잃은 뒤 몇 년 동안 집 밖을 나서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보는 것에 익숙했던 분들이라 많이 불편해 하시죠. 이분들을 위해 복지관에서 컴퓨터, 점자, 음악, 레포츠, 창업 등 다양한 사회재활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지만 참여하는 데 많이 힘들어 하세요. 특히 5년 이내의 장애를 가지신 분들은 도우미 없이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시지 못해요."

안씨의 말처럼 성인이 되어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장애를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5년 전 전맹 판정을 받은 이영희(53·가명)씨는 집 밖을 나서는데 10년이 걸렸다. 갑자기 발병한 뇌수종으로 시신경이 마비되어 시력을 잃은 이씨는 수치심 때문에 처음 2년 동안 아파트 복도조차 나오지 못했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성당에 다녔지만 그마저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끊었다.

이씨를 다시 세상 밖으로 이끈 것은 주변 사람들의 끈질긴 관심과 사랑이었다. "어느 날 수녀님이 집으로 찾아오셨어요. 문 밖으로 나오라고 6년 동안 설득하셨죠." 수녀님의 헌신적인 모습에 마음의 문을 연 이씨는 2003년 가을부터 사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복지관에서 점자, 컴퓨터 등의 교육과정을 이수했고, 산책과 헬스 등 레포츠 프로그램도 열심이다. 일요일이면 수녀님의 소개로 알게 된 친구와 함께 빠짐없이 성당을 찾는다.

"요즘엔 오히려 외출을 못하는 주말이 싫어요. 몸도 더 아픈 것 같고요." 장애를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졌고 자연스레 외출도 잦아졌다. 이씨가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걸린 10년의 시간 동안 그녀의 유일한 벗은 라디오였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 라디오를 켜놔요." 라디오를 통해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세상의 소식을 접했던 그녀는 요즘도 <손석희의 시선집중>(MBC·FM)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TV에서 간혹 화면해설방송(DVS : Descriptive Video System)이 나오지만 이씨에겐 보여주는 TV보다 들려주는 라디오가 훨씬 편하고 좋다.

화면해설방송(DVS)이란 시각장애인을 위해 인물의 행동, 심리상태, 장면전환 등을 성우가 설명해주는 방송이다. 주로 평일 낮에 지상파 3사에서 재방송되는 드라마가 DVS로 송출되고 있다. TV에서 아무리 상세히 설명을 해줘도 라디오에 익숙해진 이씨에겐 TV가 낯설다. "옛날 탤런트는 아는데, 요즘 TV에 나오는 젊은 애들은 누가 누군지 얼굴을 모르니까 답답해요." 옛날 탤런트 중에서도 이순재씨를 좋아했다던 이씨는, 요즘 한창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있는 '야동순재'의 인기를 모르고 있었다. "글쎄요, <거침없이 하이킥>이 화면해설방송으로 나온다면 이순재씨의 연기를 한 번 들어보고는 싶어요."

▲ 10년 간 이영희 씨의 벗이 되어 준 라디오.
ⓒ 이대진

스크린리더 이용해 포털사이트 기사 읽기도

정보화 사회로 접어든 오늘날, 앞을 못 본다고 해서 라디오만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원호(26·서울대 교육학과 특수교육전공 석사과정)씨는 PC화면을 읽어주는(스크린리더) 소프트웨어인 '센스리더'를 이용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를 듣는다. 센스리더의 가상커서를 기사의 상단에 위치시키고 연속읽기 단축키를 누르면 기사내용을 들을 수 있다.

비록 기계음이긴 하지만 PC화면을 읽어주는 소프트웨어는 김씨와 같은 시각장애인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학습도우미다. 한글, 워드, 텍스트 등의 파일로 작성된 글자를 읽어주는 것은 물론, 키보드로 입력하는 글자도 실시간으로 읽어준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센스리더'를 이용해 공부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공서적을 들으면서 읽고, 리포트를 들으면서 쓰고, 수업발표도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들으면서 한다.

시각장애 1급이지만 전맹이 아닌 김씨는 화면확대 소프트웨어를 함께 사용한다. 화면 가까이에 눈을 갖다 대면 큰 크기로 확대된 글자를 어렴풋이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는 확대독서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저시력 시각장애인들이 책을 확대해서 볼 수 있도록 개발된 확대독서기는 대부분의 약시 학생들이 사용하는 기기이다.

시각장애인용 학습기구가 있다고 해서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맹 학생들이 점자로 프린트를 하거나 약시 학생들이 음성으로 변환하기 위해, 강의 교재를 컴퓨터 파일로 타이핑해주는 도우미가 필요하다. "전공서적 같은 경우는 워낙 양이 방대해서 출판사에 문의를 하는데, 저작권 때문에 컴퓨터 파일을 거의 얻을 수가 없어요." 김씨는 그동안 서울대 장애학생지원센터의 도움으로 근로봉사장학생이나 사회봉사학생이 타이핑해준 교재의 컴퓨터 파일을 제공받아 왔다.

▲ 화면확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노트북PC를 이용하는 김원호 씨. 실제로는 화면에 거의 붙을 정도로 눈을 갖다 대야 글자를 읽을 수 있다.
ⓒ 이대진

시각장애인용 학습도구 자존심 때문에 사용하지 않아

학교 차원의 제도적 지원은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초·중·고의 12년 교과과정을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 마친 김씨는 친구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게 공부를 해야 했다. 휴대용 확대독서기 등 당시에도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여러 가지 학습도구들이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에 대해 잘 모르는 친구들의 시선도 힘들었지만 역시 공부하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학창시절 힘들게 공부한 기억 때문에 김씨는 좀 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2001년 단국대 특수교육학과에 진학했다.

"처음부터 특수교육 쪽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냥 좀 편하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그런데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장애 때문에 얻게 되는 심리적인 장애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심리적 장애에 대해 학문적으로 더 연구하고 싶었던 김씨는 2005년 서울대 교육학과 특수교육전공 석사과정으로 입학했다.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장애인들의 심리적 장애를 치료해주고 싶다는 김원호씨는 오는 8월 미국 위스콘신대학(재활상담 석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정안인의 시각으로 시각장애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 시각장애인이 '바라듣고' '바라느끼는' 세상은 신기할 뿐이다. 세상은 당연히 바라보는 것이라는 믿음. 이러한 당연함에서 편견은 시작되고, 당연한 믿음은 시각장애에 대한 이해를 가로 막는다.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말을 당연하게 여겼던 임형섭(27·대학생)씨는 봉사활동을 통해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만난 뒤부터 인사말을 바꾸었다. '또 보자'는 표현이 앞을 못 보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임씨는 헤어질 때 꼭 "다음에 또 만나자"라고 이야기한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히 다른 무엇이 아니다. 정안인들이 들어'보고' 맡아'보고' 만져'보고' 맛'보는' 것처럼 시각장애인들도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물건을 만지고 맛을 느낀다. 다만 바라보는 것이 조금 불편할 뿐이다. "대충 설명해드렸더니 있는 그대로 얘기해달라고 따끔한 충고를 받았어요. 앞을 못 보시니까 어차피 잘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편견이었죠." 이번 학기 헬스교실 자원봉사를 했던 나승원(27·대학생)씨의 깨달음이다. 시각장애인 외출지원 자원봉사를 했던 고동욱(26·대학생)씨는 "거리를 다녀보니 너무 바라보기에만 편한 세상인 것 같다"며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편하게 듣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한다.

불편하지 않은 시각으로 시각장애인들을 바라보고 이들의 불편함을 덜어주려는 마음만 있으면 이미 시각장애에 대해 절반 이상은 이해한 것이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불행도 불능도 아니라는 사실. 정말 그런지 궁금하다면, 20만 시각장애인들이 바라듣고 바라느끼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다면, '센스리더'를 이용해서 이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휴대용 확대독서기.
ⓒ 이대진

덧붙이는 글 | 18일부터 21일까지 취재해서 이 기사를 작성했으며, 취재 관련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서울대장애학생지원센터, 방송위원회 등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태그:#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봉천동, #흰 지팡이, #화면해설방송, #정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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