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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수면 아래로 사라진 고향

인간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 무슨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수구초심이라,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굴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는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때로는 한 개인에게 있어 고향이란 이 세계의 전부를 뜻할 때도 있으며 세계와 맞바꿀만한 가치를 가진 곳일 수도 있다.

어린 날의 내게 고향이란 말은 할머니의 무르팍을 의미했다. 오냐, 내 새끼. 안아주던 할머니의 품이 바로 고향이나 진배없었다. 그렇게 고향에 대한 내 맨 처음 관념은 갓 태어난 젖먹이의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고향의 의미는 확대되어 동네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 됐고 오늘날에는 전라도라는 제법 큰 땅덩어리로까지 범위를 넓힌 말이 되었다.

14살이 되기까지는 단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외부 세계 나들이라곤 겨우 광주 시내에 몇 번 다녀온 것이 고작일 뿐이었다. 나는 더 크고 너른 세상이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할머니의 무르팍과 가슴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고향을 떠나 광주로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생애에서 최초로 경험하는 상실이었다. 상실이라는 감정의 등에 업혀 곧장 사춘기가 찾아왔다. 내 의식은 나름대로 세계를 응시할 만큼 자라 있어야 했지만 난 어느새 세계를 거부하는 달팽이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숨어 버렸다. 내 생이 점점 굽은 소나무처럼 휘어져 갔다.

중 2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난 고향을 내 기억의 칠판에서 아예 지웠다. 할머니는 내 삶의 원형이며 고향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므로 할머니가 없는 고향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곳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난 이 세계를 떠도는 유목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1976년 광주호 댐 막이 공사 완공으로 할아버지가 농사짓던 고향의 전답이 수몰되면서 고향을 망각하고자 하는 내 행위엔 어떤 당위성마저 생겨났다. 대개 시간은 사람을 망각의 늪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고향만은 시간의 법칙에서 예외다. 나이 들수록 더 기억이 생생하고 그리워지는 것이다. 고향에 대한 내 기억을 복원해낸 것도 시간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에 하얗게 물든 머리카락이 복원해낸 것이었다. 어느 날, 나는 상실해버린 고향이 남긴 추억의 가장자리에서 천렵의 풍경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농경사회의 마지막 뒷모습 '천렵'

▲ 광주호,전남 담양군 고서면 ·남면과 광주 북구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 '깊은통' 아래로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밖지실' 마을에 이른다.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이 밖지실이다. 거기서 1km가량 올라가면 조선시대 원림 소쇄원이 있다.
ⓒ 고병하
내 고향은 전남 담양군 남면이다. 근방 5리 상관인 광주 북구 충효동에는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세운 별서정원인 환벽당이 있고 건너편 지석리엔 조선시대 최고의 별서정원이라 일컫는 소쇄원이 있었다. 지석리는 바르뫼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고인돌이 있었으므로 '괸돌'이라 부르던 곳이다.

환벽당 아래를 지나 구름의 그림자도 쉬어가는 식영정 아래로 흘러가던 창계천 여울이 5리를 더 굽이쳐 내려와 우리 마을 앞 시내에 다다르고 자징이(잣정이) 직전에서 증암천과 맞교대를 했다. 잣정이는 큰 잣나무 정자가 있던 마을이다.

창계천과 증암천 중간쯤에 '깊은통'이라 부르는 시내가 우리 동네 아이들의 주무대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멱 감고 물장구치고 하면서 여름 한 철을 났다. 이곳이야말로 우리들에겐 하와이 해변이었고 와이키키 해변이었다. 때로는 옆 동네인 덕의리 수박밭에서 수박 서리를 하고 나서 잔뜩 부른 배를 이곳에 와서 수영하는 것으로 꺼쳤다.

'송장헤엄'이라 부르던 배영이나 숨을 쉬지 않고 물속으로 다니는 '개구리헤엄'이 고작이었지만 이 '야외 풀장'에서의 하루는 아주 신났다.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물귀신이 잡아당기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놀다가 천상의 낙원으로 가버린 아이도 있었다.

한여름이 되면 이곳 냇가에선 동네잔치인 천렵이 벌어졌다. 농촌이 가장 한가한 때는 세 벌 김매기가 거의 끝나는 칠월 칠석 무렵이다. 그 무렵이 되면 동네 어른들은 천렵 날을 잡고 나서 집집을 돌며 추렴으로 쌀이나 보리 등 곡식을 걷었다. 이윽고 천렵 날이 되면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몇 말과 소주를 달구지에 싣고서 냇가로 나간다.

그리고 깊은통 옆 자갈밭에다 가마솥 단지를 걸어놓고 물고기를 잡는다. 그곳엔 모래무지, 피라미, 메기, 빠가사리, 징검새우 등과 다슬기가 참 흔했다. 고기를 잡는 방법 또한 얼마나 다양했는지 모른다. 몇 사람이 고기를 몰아오면 쪽대를 들고 있던 아저씨는 얼른 물고기를 건져 올린다. 어떤 아저씨는 싸리나무로 엮은 삼태기로도 물고기를 잡았다.

특히 나보다 5살 쯤 위인 기모형은 고기 잡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기모형은 메로 물고기를 잡았다. 물고기가 돌 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는 순간에 메로 돌을 힘껏 내리친다. 그리고 나서 돌을 떠들면 거기엔 십중팔구 기절한 물고기가 누워 있었다.

후에 기모형은 이 기막힌 솜씨를 밑천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고향을 지키며 광주호에서 어부 노릇을 하면서 5남매를 키운다. 삶이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구원이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다. 삶은 쉽사리 포기하거나 단정할 물건이 아닌 미묘한 물건이다.

우리네 꼬마들이라고 해서 건성으로 서 있지만은 않았다. 손으로 새우를 잡거나 모래를 살살 헤치고 다슬기를 주웠다. 어른들이 잡은 물고기를 고무신이나 구럭에 담아서 나르기도 했다.

이렇게 잡아온 물고기를 동네 아주머니들은 냇가 둑에서 주워온 나무토막 따위로 가마솥에 불을 지핀 다음 집에서 준비해온 고추장이나 된장, 마늘 따위와 근처 밭에서 현지조달한 고추나 대파 등으로 갖은 양념을 하고 나서 두어소끔 끓였다.

매운탕이 다 끓으면 어른들은 매운탕에 막걸리나 막소주를 기울이다 흥이 나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고 저릅대춤(막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놀았다.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 가세." 해가 마을 뒷산 가내미 고개를 넘어가도록 잔치는 끝날 줄 몰랐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에 보았던 이런 천렵의 풍경이야말로 농경 사회의 황혼이었는지 모른다. 저녁놀이 질 때는 장엄함도 있지만 쓸쓸함도 있다. 그렇게 정다운 고향의 모습은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만복이처럼 살아 봤으면

그 추억을 미처 지우지 못한 난 지금도 어디를 지나다가 누군가 고기잡이를 하거나 좽이질을 하는 걸 보면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오래도록 바라본다. 정현종의 시 '바보 만복이'는 천렵에 데한 내 추억을 환기시켜준다.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대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 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 정현종 시 '바보 만복이' 전문


시의 무대가 되는 장소는 거창 학동 마을이다. 그곳엔 천진보살인 만복이가 산다. 만복이는 보편성을 띤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마을 사람이기도 하다. 만복이는 암끗(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일찍이 우리집 감나무에 감 따러 올라갔다 떨어져 죽은 내 어릴 적 깨복쟁이 친구 영근이도 만복이 같은 아이였다.

만복이는 대체 몇 살이나 된 사람일까. 시는 만복이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내가 추측하기엔 미장가 전의 20대 전후의 청년이 아닐까 싶다. 짐작건대 만복이는 정신지체 장애 3급 정도에 해당하는 청년일 것이다.

물고기들도 만복이가 바보라는 걸 아는 모양이다. 파드닥거리며 반항하지 않고 그냥 순순히 잡혀준다. 물고기들이 만복이 사정을 봐주는 것인지 아니면 '시피봐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만복이는 물고기 잡는 데는 선수다. 전라도 말로 하자면 재주가 메주다.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 장자는 다리 위에서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노는 모습을 내려보고 '어락(魚樂)'이라는 말을 썼다. 만복이가 노는 모습이야말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어락'의 경지이다. 만복이가 물고기인가 하면 물고기가 만복이가 된다. 그렇게 만복이는 우리에게 물아일체의 풍경을 보여준다.

시를 읽고 그 풍경을 상상하노라면 '바보 만복이'가 바보가 아니라고 믿는 우리를,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겨준다. 세상에 선악을 따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 시냇가라면 어디든지 괘의치 않다. 언젠가는 나도 만복이처럼 선악에 물들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살아보리라.

오늘 나는 마음속에 간직한 몇 장의 흑백 사진을 꺼냈다. 광주호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 앉아버린 내 그리운 유년의 몇 장면들... 삶이 나를 배반할 적마다 더욱 그리워지는 이 풍경들이 던져주는 위안의 따스함이여.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마음을 데워주는 이 훈훈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속절없는 시간인가, 아니면 아직은 자본의 때가 덜 묻었던 때의 순수한 인간의 원형인가. 내가 때때로 고향을 그리는 것은 그곳에 만복이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한때는 만복이처럼 천진보살로 살던 나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사진 사용을 허락해 주신 고병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마이뉴스 블로그 <프라우고>로 가시면 제 고향의 갖가지 멋진 풍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향#담양#깊은통#고기잡이#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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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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