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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속 여백을 물빛 생명들로 채워간 그림, '숨바꼭질'
ⓒ 한지숙
요즘 짬날 때마다 컴퓨터의 하드를 비우는 중이다. 얼마 전 바이러스 때문에 A/S를 받고 치료했는데, 사진과 음악들이 너무 많아 속도까지 느리니 CD로 굽고 비우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파일들을 옮기고 예전의 사진을 들추며 폴더를 비우다 보니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골로 오기 전, 아이들과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한 세월이 짧지 않다. 이젠 내 손을 떠난 일, 그 시절의 학습 자료가 꽤 많은 편이라 예전에 이미 CD로 구워 따로 모았다 싶었는데 구석진 곳에서 꼬맹이들 자료를 한 뭉치 만났다.

기초편, 심화편으로 제본한 초등학생용 교재 두 권의 압축 자료를 찾아낸 것은 전혀 뜻밖의 수확이다. 각각 300권씩 제본한 것으로, 현재 내 손에 남은 건 달랑 한 권씩밖에 없으니 나로선 참 귀한 옛 자료를 찾았다.

내용을 들여다 보는 중에 과천에서 함께한 두 소녀와 보낸 늦봄 어느 날의 한나절 기록이 있어 오랜만에 그 시절 추억 속으로 젖어든다.

▲ 올챙이, 피라미를 풍성하게 본 날
ⓒ 한지숙
눈자위 시큼하게 / 내리꽂히는 뙤약볕 아래
서툰 자맥질로 / 들추어낸 바위틈엔
올챙이랑 피라미랑 / 참으로 오글오글 / 풍성하였다.


중고생들과의 수업에선 1년에 네 번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난 때가 포상(!) 차원의 다독거리는 시간이었다. 여러 작은 이벤트를 꾸며 함께 놀러다녔는데, 문제는 꼬맹이들이었다.

동화책을 건네거나 떡볶이, 순대를 먹으려고 재래시장을 전전하는 것까지는 수월했으나 위험 부담을 안고 멀리 나가는 일은 어려웠으니 '야외수업'을 핑계 삼아 도시락 싸들고 바깥 바람 쐬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 무서워서 건너가지 못한 나를 향해 웃는 아이들
ⓒ 한지숙
그때도 입버릇처럼 '시골과 자연'을 노래하곤 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시골로 옮겨 앉으려고 주말이면 전국 구석구석을 떠돌며 발품을 판 때였지만, 실제 시골에 관한 실속 있는 경험은 그리 깊지 않은 때였다. 모아놓은 자료들마다 시골과 자연의 풍경이 넘실대는 걸 보니 어지간히 쏘다닌 듯하다.

아이들과 공부하며 그림 자료를 많이 사용한 흔적이 곳곳에 드러난다. 잘 그리진 못해도 데생을 즐겨했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끌어내기에 그림만큼 좋은 눈높이는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려니. '그 시절에 이런 그림과 동화들을 어디서 다 구한 거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낸 글과 '클립아트(clipart)'라 이름 붙인 폴더의 삽화들을 처음 본 듯 신기하기도 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들여다 봤다. 인터넷을 모르던 때였으므로 아마 PC 시절부터 자주 이용하던 유료 포털사이트나 교육용 사이트에서 다운을 받아 모은 것들일 것이다.

▲ 얘들아, 그날 무얼 그린 거니?
ⓒ 한지숙
4월 마지막주, 과천 청사 뒤 계곡으로 야외수업을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준비하려던 도시락과 간식은 두 분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나의 시간 형편을 배려한 두 분의 정성은, 어쩌면 마트에서 대충 사서 채웠을지도 모를 부족함에 넘칠 정도로 화려한 바구니였고, 덕분에 그 해 늦봄의 어느 하루, 우리 셋은 자연의 품에서 유쾌한 한나절을 보낼 수 있었다.

▲ 도시락을 펼치자 비둘기들이 다가왔다.
ⓒ 한지숙
이듬해 봄 / 가뭄으로 목마른 대지
물 오른 가로수만 덩그마니 / 봄바람에 하들거리고
그 화사한 벚꽃 / 모두 떨궈낸 / 눈길처럼 새하얀 / 오솔길 돌계단엔
그늘 떠난 병아리 햇살 좇듯
구구 비둘기 / 흠칠거리며 다가오는 / 꺼끌한 등짝


▲ 아이들이 펼치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
ⓒ 한지숙
한 아이의 그림을 담은 사진 제목은, '숨바꼭질-고래'.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고래, 그 아래 여백을 채우는 주제였나 본데, 순한 물빛 생명들이 고래처럼 여유있게 웃으며 헤엄친다.

또 다른 그림은, 다섯 가지 소품을 군데군데 앉혀 놓고 나머지 부분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채워가는 순서였다. 땀을 닦는 햇님, 꽃송이를 입에 문 벌, 강아지를 앞세워 달려오는 아이를 보고 역시 환하게 웃으며 마주 뛰어오는 코끼리. 세 마리 청개구리의 합창을 들으러 뛰어오는 것이었을까.

그림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아이들이 그린 것을 통해 그들이 품은 생각과 특히 빛깔에 관심을 두고 늘 눈여겨 본 듯하다. 햇님 위에 푸른 구름이 떠 가고, 한켠에선 비가 내리는데 검은 구름이 일품이다. 생각지도 않은 부분에선 쿡쿡 웃음까지 일었다.

벌이 포르릉 내려앉는 모습을 표현한 것. 이 정도면 콕콕 쏘아댈 벌이 겁나기는커녕 귀엽기만 하다. 나무 울타리를 세운 기와집 한 채도 정겹고 미끄럼틀과 푸른 그네. 두 소녀가 어떤 내용으로 이야기를 꾸며갔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지만, 아이들의 편안한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림들을 보며 지난 시간을 반추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 부모님이 일군 안성농장의 잔디밭. 이젠 어느 누가 가꾸는지.
ⓒ 한지숙
교재를 만든 때가 1996년. 도시를 떠나 과감히 전원생활을 시작한 부모님의 영향이었을까,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보다 귀동냥과 눈도장만으로 주억거린 시골의 모습들이 지금 나 사는 이웃의 모습이고 풍경인 것을 떠올린다.

고기와 생선 등 비릿한 것을 뺀 나머지는 거의 텃밭에서 일궈내 밥상에 올린 두 분. 1년 밑반찬으로 한 접이면 충분했을 마늘을 해마다 여섯 접이나 까며 훔쳐내던 어머니의 눈물, 콧물은 무엇이었을까, 오미자며 구기자, 결명자 들 씨를 애써 훑어내려 볕 좋은 날 말리던 씨앗에 대한 정성은 또 어떤 마음일까.

비려서 싫다는데 억지로 어성초즙을 내려 두세 병씩 짊어지고 올라오신 속내는 무슨 빛깔이었을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몰래 쏟아버리곤 잘 먹었다고 너스레떨던 철부지. 그런 내가 당신들의 삶을 따라간다고 종종걸음치지만 더디고 무딘 걸음은 여전히 헛발질투성이다.

▲ 세상을 맑고 밝게 그려가는 아름다운 생명으로 거듭나길.
ⓒ 한지숙
옛사진들을 들여다 본다. 부모님의 안성농장 모습이 짠하게 다가오는가 하면, 전국을 떠돌며 담은 구석구석의 그림들에선 발꿈치가 달싹인다. 어설프게 주섬거린 자연의 이야기들과 함께한 그때 그 아이들의 세계는 또 어떤 그림으로 펼쳐지고 있을까. 나를 어떤 그림으로 그리고 있을까. 관악산을 기억하니, 얘들아!

계곡이 아프다 해도
기운 없는 꽃대롱
눈길 한번 던질까 보냐
아,
조팝도 이맘때 여문다지

문지기 없는 계곡,
관악산을 기억하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자연을닮은사람들(www.naturei.net)'과 '경남연합일보(www.gnynews.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글쓰기#조팝나무#관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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