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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부디 몸 성히 계시옵소서. 이 몸 고도는 공주님을 다시 뵈올지 이제 기약을 할 수 없습니다.'

서라벌을 벗어 난 후 청마산성을 숙영지로 삼고 있는 병사들을 둘러본 후 고도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불안함에 잠이 오지 않았다. 고도가 선잠을 자고 있는 곳으로 보초가 다가오더니 그를 조심스럽게 깨워 밖으로 불러내었다.

"무슨 일이냐?"

"장군께서 긴히 할 말씀이 있다며 부르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간편한 옷차림으로 보초의 뒤를 따르는 고도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보초가 으슥한 곳으로 유인해 칼이라도 휘두른다면 고도는 도망가는 것 외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용케 도망을 쳤다고 해도 그로인해 숙영지를 벗어나게 되면 탈영으로 간주되어 처벌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거 단검이라도 품고 있을 걸 그랬나.'

고도는 보초의 허리에 있는 긴 칼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별다른 일 없이 보초는 안에서 빛이 새어나올 정도로 호롱불을 가득 놓은 방으로 고도를 안내한 후 멀찍이 물러났다. 방의 입구에는 비장 두 명이 갑주를 두른 채 사천왕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여기서 죽는구나.'

고도의 가슴이 마구 뛰었고 발걸음은 더 이상 떨어지지를 않았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민다고 해도 고도는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뭐하는 거요? 들어가시오."

고도가 입구에서 망설이자 비장 중 하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도는 허리는 약간 숙이고 발을 질질 끌듯이 해서는 눈치를 보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왔는가."

김무력의 섬뜩하고 차가운 낮은 목소리에 고도는 저도 모르게 우뚝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김무력이 길게 눕다시피 앉아 있는 곳 주위에는 등잔불 수 십 개가 늘어서 있었지만 고도가 서 있는 곳은 등잔불이 하나도 놓여 있지 않았다.

"요즘은 이렇게 등잔불을 밝혀놓지 않으면 잠이 오지를 않는구나."

고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김무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너를 왜 부른 것 같나?"

김무력의 질문에 고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김무력은 한숨을 쉬었다.

"남부여의 대군이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파발이 방금 이곳을 지나갔다네. 이곳의 천 여 명도 안 되는 기병이 합세한다고 해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숫자가 아닌 모양이야."

고도는 더욱 더 가슴한쪽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남부여와 신라의 전쟁이 본격화된다면 화안공주와 자신의 운명은 앞날을 알 수 없었다.

"넌 여기서 도망이라도 가고 싶겠지?"
"아닙니다."

고도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김무력은 안면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넌 도망가도 죽고 나와 함께 가도 죽는다."

고도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허나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도 화안공주와 함께 말이다."

숙여졌던 고도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갔고 김무력의 부릅뜬 눈과 마주쳤다.

"난 화안공주와의 혼인을 없었던 일로 할 것이다. 네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런 화안공주를 돌볼 수가 있었지 않느냐?"

"어찌 그런…."

"날 속일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거라!"


김무력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가 숨을 돌린 후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해야한다. 내가 전공을 세워 내 공을 높여준다면 널 화안공주와 살게 해주마. 그렇지 않으면."

말없이 김무력의 말을 듣던 고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나도 죽을 뿐이오. 너 역시 살아남지 못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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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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