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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박물관이 있겠다. 하지만 박물관의 진열실이나 수장고 안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옛 유물들은, 보존 면에서는 최선일지 모르겠지만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보는 이에게 옛 향기를 그대로 전해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런 면에서는 유서 깊은 건물이나 성곽, 커다란 불상이나 석탑 등과 같이 현장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문화유산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공간 제약으로 인해서 박물관으로는 들어가지 못한 이러한 문화유산들 역시 우리가 제법 사전 지식을 갖고 마주한다고 해도 겉모습에서 느껴지는 단편적인 인상이 감상의 전부이기가 쉽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유산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맺고 있는 구체적인 관계까지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문화유산들을 둘러본다고 해도 그건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이나 유적지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무늬와 숨결까지도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문화 보존 및 전승 방식은 없는 것일까?

100퍼센트는 아닐지라도 아마도 ‘민속촌’과 ‘역사 마을’이 그러한 방식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용인의 민속촌이나 제주도의 성읍 민속마을은 지나간 시대의 건축물들과 유물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옛 건물들과 그 건물들 곳곳에 놓여 있는 옛 유물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까지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관광객들이 구경하는 것은 물론이고 몸소 재현해 보는 기회까지 주기도 한다.

따라서 박물관보다는 문화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이, 그리고 문화유적지보다는 민속촌이나 역사 마을을 방문하는 것이 지나간 시대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민속촌이나 역사 마을에서는 단순히 구경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생생하게 재현된 그 옛날의 삶의 풍경에까지 직접 참여해 봄으로써, 지나간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체험해보는 재미까지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컴파스 커뮤니티 빌리지의 입구. 다 구경하고 나올 때쯤 되어서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정철용
뉴질랜드 북섬 베이 오브 플렌티의 중심 도시인 타우랑아(Tauranga)에서 시작하는 여행 둘째 날의 첫 일정을 우리가 컴파스 커뮤니티 빌리지(Compass Community Village)로 잡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뉴질랜드에도 옛날 모습을 재현해 놓은 ‘역사 마을(historic village)’이 몇 군데 있는데, 타우랑아의 컴파스 커뮤니티 빌리지가 바로 그런 곳이라는 것이 여행정보 안내책자의 설명이었다.

타우랑아에 조금 못 미쳐 있는 작은 마을 테 푸나(Te Puna)에서 우리가 묵었던 모텔을 출발한 시간은 아침 9시 30분경. 예정보다 30분이 늦고 있었다. 토요일이어서 사람들로 붐비지 않을까 조금 염려했는데, 웬걸, 10시쯤 도착한 컴파스 커뮤니티 빌리지의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출입문 옆에 있는 매표소에 들어가서 입장료를 내니 안경을 쓴 뚱뚱한 중년의 백인 아주머니가 안내전단함에서 이것 저것 챙겨서 건네주었다. 매표소를 나와서 받은 안내전단들을 펼쳐보니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손으로 대충 그린 듯한 성의 없는 지도도 그렇거니와 숫자에 따른 것도 아니고 동선에 따른 것도 아닌 이상한 순서로 번호가 매겨진 각 건물들의 설명문도 그랬다.

▲ '우드 뮤지엄'은 나무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나무로 만든 공예품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였다.
ⓒ 정철용
그래도 뭘 좀 알아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몇 분 동안 서서 안내전단들을 읽어 보았더니, 이곳에 들어차 있는 많은 건물들 중에서 관람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은 10개 밖에 안 되었다. 나머지 30여 개 건물들은 세미나, 소규모 회의, 연회, 결혼식 등의 행사에 대여해주거나 이 지역내 자잘한 사회봉사단체들이 입주해서 사무실로 쓰고 있어서 바깥에서 건물 외관만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더욱 실망스러웠던 것은 우리 말고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일정을 짜면서 참고했던 안내책자에 따르면, 매주 토요일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농부들의 장터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했다. 따라서 토요일에 이곳에 오면 흥청거리는 장터 분위기로 인해서 옛 마을의 정취를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농부들로 붐비는 장터는커녕 관광객 한 명도 얼쩡거리고 있지 않으니, 이곳이 정말 ‘역사 마을’이 맞는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벌써 들어왔으니 어쩌겠는가, 둘러보고 갈 수밖에. 우리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건물 안내 지도와 안내문을 번갈아 보면서 탐험에 나섰다.

▲ 마켓 스트리트는 벚꽃이 활짝 피어나고 촘촘한 포석들이 깔려 있어서 예쁘고 깔끔했다.
ⓒ 정철용
매표소 바로 앞에 자리한 나무 박물관(wood museum)은 그 이름과는 달리 나무로 만든 공예품과 기념품을 파는 작은 상점이었다. 우리는 출입문에 바로 이어지는 마켓 스트리트로 발길을 돌렸다. 연분홍색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 나무들이 서 있고 촘촘한 포석이 깔려 있어서 깔끔한 느낌을 주는 마켓 스트리트에서는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건물 두 동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1번 건물동은 유럽에서 이주해온 백인들이 타우랑아의 도심 거리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치던 19세기 중반의 옛 건물들을 그 외관만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 한가운데에 1863년에 설립된 타우랑아 스토어가 있었는데 2층에 나란히 있는 창문들에 커튼이 처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2층은 가정집으로 쓰였고 아래층만 점포로 쓰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러나 1번 건물동 전체는 이곳의 운영 사무실을 비롯해서 여러 단체들의 사무실로 나뉘어져 사용되고 있어서 건물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 1번 건물동의 한가운데쯤에 있는 타우랑아 스토어는 점포와 가정집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 정철용
한편 2번 건물동은 1881년에 건립되었다가 약 1세기가 지난 1984년에 철거된 타우랑아의 스타 호텔(Star Hotel)을 재현해서 새로 지은 건축물인데 그 대부분을 고급 레스토랑인 투스카니 앳 더 빌리지(Tuscany at the Village)가 차지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고 가격도 만만치 않을 터이니 이 역시 우리가 쉽게 들어설 곳이 아니었다.

이외에도 19세기 중·후반에 타우랑아 근처에 있었던 대장간, 소방서, 기차역, 이발소, 초등학교 등의 옛 목조건물들이 이곳으로 통째로 옮겨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사회봉사단체들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어서 외관만 봐서는 그 옛날의 자취를 전혀 찾아볼 길이 없었다.

▲ 포크너 하우스는 선박 제조 목수이자 상인이었던 포크너의 옛집을 옮겨놓은 것으로, 내부에 사진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 정철용
내부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해 놓은 포크너 하우스(Faulkner House)는 좀 나았다. 선박을 만드는 목수이자 선박 거래 상인이기도 했던 존 리스 포크너(John Lees Faulkner)가 1844년에 타우랑아의 비치 로드에 지은 집을 이곳으로 옮긴 것인데, 안으로 들어가보니 당시 배를 건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자료들이 벽에 붙어 있고 스피커를 통하여 녹음된 설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건물은 지붕이 있는 출입문과 뾰족 종탑이 아름다운 작은 교회였다. 선교사에 의해서 성공회 신자로 개종한 한 마오리족장이 자신의 부족민들을 위해서 세운 교회를 모델로 해서 1976년에 이곳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니, 영국식 교회 장식과 마오리의 전통 문양이 뒤섞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뾰족 종탑과 지붕이 있는 출입문이 아름다운 교회는 결혼식 사진의 배경으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 정철용
하지만 이곳 전체를 놓고 보아서는, 옛 건물들을 많이 옮겨 놓기는 했어도 제대로 복원하여 관리를 해서 그 옛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건물은 드물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온 나는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특히 여행 첫날, ‘벽화’라는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훌륭하게 보존하고 전승하고 있는 작은 마을 카티카티를 둘러보고 온 나로서는, 모든 하드웨어를 이미 갖추고 있음에도 그걸 채워놓지 못하고 있는 컴파스 커뮤니티 빌리지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 하드웨어를 갖추어 놓고도 그걸 채우는 소프트웨어가 거의 없어서 컴파스 커뮤니티 빌리지는 매우 실망스러운 '역사 마을'이었다.
ⓒ 정철용
그곳에서 1시간 정도를 어슬렁거리다가 떠나기 전에 나는 다시 매표소에 들어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농부들의 장터가 오늘은 왜 열리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았다.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은 타우랑아 초등학교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타우랑아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벌써 11시가 넘어서 그런지 장터는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아도 별로 먹을 만한 것이 보이지 않고 기념품으로 살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 여인이 시집을 팔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보였더니, 베레모를 쓴 중년의 여인은 다음달에 출판되는 자신의 시집 중에서 고른 14편의 시들을 컴퓨터로 인쇄해서 손수 제본한 것이라고 했다.

표지에는 뉴질랜드의 새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투이(Tui) 두 마리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자신이 손수 그린 것이라고 했다. 속표지에 시인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그 작은 시집을 나는 10달러를 주고 샀다. 매우 특별한 여행 기념품이 되리라고 생각해서 산 그 시집을 이 글을 쓰느라 이제서야 꺼내 읽었다.

▲ 농부들의 장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작은 시집이 특별한 여행 기념품이 될 것 같아서 한 권 샀다.
ⓒ 정철용
그다지 마음에 다가오는 시들은 없었지만, ‘나무(wood)’라는 제목의 시에 나오는, 아래에 옮긴 구절들에서는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밖에서 겉모습만 구경하고 그 안의 속사정은 조금도 들여다보지 못한 컴파스 커뮤니티 빌리지의 오래된 목조건물들이 많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There’s healing
in the closeness of wood

old buildings
pull me into their doorways
like sweethearts

나무의 촘촘함에는
치료의 힘이 있다네

오래된 건물들은
사랑하는 이처럼
문간으로 나를 끌어당기네

덧붙이는 글 | 2005년 9월 30일부터 10월 7일까지 7박 8일간 다녀왔던 베이오브 플렌티 및 이스트랜드 여행기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뉴질랜드#타우랑아#유적지#마오리#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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