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진에서 강릉 방향으로 달리던 차는 ‘대관령고개’보다 험하다고 소문난 ‘진고개’를 넘기 위해 6번 국도에 들어섰다.
월정사 쪽에서 강릉방향으로 넘어갈 때는 내리막이 험했고, 그 반대로 넘어갈 때는 오르막이 험한 고개, 가파르면서도 굴곡이 아주 심한 탓에 고개 정상에서는 반드시 쉬고 넘어야하는 고개,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정상에 서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고개가 바로 ‘진고개’이다.
오늘 우리는, 그 고개를 넘어 꼬불꼬불 이어진 국도를 타고, 쭉쭉 뚫린 고속도로와 함께 나란히 달릴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빠름만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지금 내 생활에 대해 제3자 입장을 취해보기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회사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고, 사원들을 변화시키려 한다. 그 변화의 정도도 개혁이나 혁신이 아닌 혁명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당장 변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를 맞기도 했다. 경영진에서는 요즘 부쩍 위기의식을 느끼고 사원들에게 정신무장을 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일에 매달려 지내온 몇 달은,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정신없는 질주’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나고자 몸부림치는 요즘의 내 삶이 고속도로라면, 멀리 떨어져서 그런 나를 바라보게 해주는 이런 여행은 조금은 여유로운 국도일 것이다.
그렇게 여유를 찾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한 박물관을 만났다. 6번 국도에 들어선지 15분 정도가 지나서 만난 그곳은 바로, ‘광물수석 자연사 박물관’이다.
처음에는 그저 조그마한 개인 박물관이기에, 간단히 시간때우기 용으로 입장권을 끊었다. 하지만 실제 안에 들어가서 보니,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기묘한 볼거리가 많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돌들이 들려주는 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광물수석 자연사박물관(관장 임성동) 자리는 원래 이곳이 아니었다. 강릉시 오죽헌 근처에서 전시장을 처음 시작했었는데, 장소가 협소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가 개관 1개월쯤이라고 했다. 작년인가? 오죽헌에 갔을 때 가볼까 말까 하던 그 박물관임을 깨닫고,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바닥에 드려진 안내표지를 따라 조용조용 관람을 시작했다. 한 가지, 한 가지 자세히 보려니 워낙 그 수가 많은 터라 걸음은 늦어질 수밖에 없는데, 아이는 성큼성큼 휘둘러보고 저만치 앞서간다. 아내는 다시 아이를 불러 옆에 붙들어 두고 찬찬히 보라고 타이른다. 나는 그 뒤를 쫓으며 가만가만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어느 수석 앞에 섰는데, 그 앞에는 분무기가 준비되어 있었고 감상 방법이 적혀있었다. 동해문양 해석(海石)이라고 적힌 수석을 제대로 관찰하려면, 분무기로 물을 뿌려보라는 것이다. 나는 적힌 대로 분무기를 들고 돌 위에 직접 뿌려보았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무늬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내는 흑장미 화석 앞에서 순간 놀란 모습을 보였다. 어릴 때 중동으로 일하러 갔다 오신 작은아버지가 가져왔던 돌이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뭔지도 모르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가 어느샌가 없어져 버렸다고 하는데, 그게 이런 흑장미 화석이었다니 놀랄 수밖에. 잘 모셔두었다면 돈 깨나 받을 수 있었을까?
위층 전시물을 다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가니 유리 장식장 안에 가득 들어있는 수많은 수석들이 우리를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돌들을 모으려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쳤을까? 순간 이곳 관장의 외골수 같은 삶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다 둘러보니 시간은 1시간도 더 지나버렸다. 그런데 이곳에는 관람자들에게 쉬었다 가라고 배려해 놓은 실내 테이블과 야외 정자까지 떡 버티고 있어, 사람을 쉽게 보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을 때도, 먼저 왔던 사람들이 시원한 정자에 앉아 아래로 흘러가는 냇물을 벗 삼아 유쾌한 웃음소리를 소금강 끝자락에 흘리고 있었다.
그들을 남겨두고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돌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고 마음에 새기도 또 새기며 진고개를 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