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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 오브 플렌티(Bay of Plenty)는 뉴질랜드 북섬의 동쪽 해안선이 커다란 대접처럼 남태평양의 푸른 파도를 받고 있는 만(灣)의 이름이며 또한 그 만에 접해 있는 해안 지역을 통칭해서 부르는 지명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코로만델 반도에 이어지는 베이 오브 플렌티는 동남쪽으로 마치 혹처럼 튀어나온 이스트랜드(Eastland)로 계속 이어진다.

▲ 베이 오브 플렌티와 이스트랜드는 뉴질랜드 북섬 동쪽 해안 지역의 지명이다.
ⓒ 정철용
1년 전에 코로만델 반도 일주 여행을 다녀왔던 우리는 다음 여행지로 바로 이 두 지역을 선택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여행자정보센터에서 여행 안내책자들을 한아름 집어와서 7박 8일간의 여정으로 일정을 짜고 숙소를 예약하고 짐을 꾸렸다. 봄볕이 좋은 9월의 마지막 날 아침, 우리는 베이 오브 플렌티의 중심도시인 타우랑아(Tauranga)를 향해 출발했다.

오클랜드에서 1번 고속 국도를 타고 가다가 2번 고속 국도로 갈아타서 쭉 달리면 약 2시간 30분 후에는 타우랑아에 닿는다. 이 정도 운전 시간과 거리이면 중간에 쉬지 않고 목적지까지 곧장 가서 그곳에서부터 여행의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일 터이다.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있는 경유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법이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오클랜드와 타우랑아 사이에는 특별한 경유지가 하나 있어서 우리는 그곳을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타우랑아를 약 40km 앞두고서 우리는 인구 3000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마을 카티카티(Katikati)의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는 여행자정보센터에 들어가서 안내 책자들을 받아들고 다시 나왔다.

미술관: 벽화들이 전시되어 있는 거리를 걷다

여행자정보센터 바로 옆의 카페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안내책자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우리의 탐험은 시작되었다. 내 손에는 '카티카티의 벽화들을 도보로 구경하는 안내책자(Katikati's Murals Walk Guide)'가 들려 있었다. 그렇다. 우리가 카티카티에 차를 세운 것은 바로 벽화들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벽화 'Overlaod'. 제목처럼 8인승 차에 무려 21명이 올라타 있다.
ⓒ 정철용
고작 벽화 가지고서 뭐 그렇게 대단한 구경거리인 양 그러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카티카티의 벽화들은 특별해서 충분히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카티카티의 벽화들은 성당이나 교회 등의 건물 내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거리에 늘어서 있는 평범한 상점의 벽과 골목길의 벽과 입간판 등에 그려진 야외 벽화들인 것이다.

우리는 안내책자의 지도에 표시된 번호를 따라서 야외 벽화 순례를 시작했다. 모두 30점에 달하는 야외 벽화들이 다양한 느낌과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왔다. 아크릴 물감으로 공들여 그린 일반적인 벽화들은 두세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았고, 채색된 세라믹 타일들을 모아 붙여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타일 벽화는 다가가서 손으로 살살 문질러 보기도 했다.

▲ 세라믹 타일들을 모아 붙여서 만든 타일 벽화 'Pukeko Kid & Friends'. 어린 아이들의 작품이다.
ⓒ 정철용
좁은 골목길을 장식하고 있는 <장난감 퍼레이드(Toy Parade)>라는 작품은 아이들이 실제로 가지고 놀았던 나무 장난감들을 벽에 부착한 후 예쁘게 채색을 해놓아서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한 부조(浮彫) 벽화였는데, 딸아이 동윤이가 가장 좋아한 벽화였다.

이러한 벽화들뿐만 아니라 조각품, 설치작품 및 공예품들도 8점이나 거리에 전시되어 있어서 카티카티의 메인 스트리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관이라고 부를 만 했다. 하지만 카티카티는 10년 전만 해도 대부분 여행객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소규모 농업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던 이 마을의 장래는 1990년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주민들은 마을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게 되었다. 그때, 이 마을과 그 주변에서 살던 예술가들의 주도로 카티카티 야외예술협회(Katikati Open Air Art Inc.)가 결성되었고, 카티카티의 메인 스트리트에 벽화를 그려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자는 그들의 아이디어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채택되었던 것이다.

▲ 실제 나무장난감들을 벽에 부착하고 채색한 부조 벽화 'Toy Parade'.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벽화이다.
ⓒ 정철용
그래서 1991년 세 개의 벽화를 시작으로 해서 매년 한두 개씩을 더해 나갔고,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30점이 넘는 벽화들을 자랑하는 '뉴질랜드의 벽화 마을(Mural Town of New Zealand)'로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명성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처럼 타우랑아로 향하는 도중에 벽화들을 구경하려고 이 마을에 멈추는 여행객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오로지 이 마을의 벽화들을 보기 위하여 먼 곳에서 오는 관광객들도 제법 될 터이다. 둘러보니, 마치 미술관 안에서 작품들을 감상하듯이 손에는 안내책자를 들고 카티카티의 메인 스트리트를 느긋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도 또 여럿이 있었다.

박물관: 벽화들에 새겨진 역사를 읽다

그런데 카티카티의 메인 스트리트를 걷는다는 것은 또한 시간 여행이기도 하다. 대부분 벽화들이 소재로 삼고 있는 것들이 예전에 이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모습과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 아일랜드인 정착 125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벽화 'Our People, Our Story'. 마을 발전에 공헌한 주요 인물 18명이 그려져 있다.
ⓒ 정철용
1875년 아일랜드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은 마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카티카티의 역사를 메인 스트리트의 벽화들은 생생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벽화들마다 간략한 설명을 덧붙여 놓은 안내책자를 읽으면서 벽화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은 마을의 역사를 제법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떤 벽화들은 옛날의 일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 놓고 있어서 마치 그 당시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예컨대, <눈에 들어간 진흙(Mud in Your Eye)>이라는 재미난 제목의 이 벽화를 보자.

차를 타고 산길을 달리던 세 남자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곤경에 처한 여자들의 차를 보고 자신들의 차를 멈춘다. 여자들의 차를 진흙 구덩이에서 빼내기 위하여 세 남자는 온갖 애를 쓰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들의 옷은 진흙 범벅이 되어버리고 눈에까지 진흙이 들어가고 만다. 이것이 이 벽화가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 실제 사건을 묘사한 벽화 'Mud in Your Eye'. 지역 신문에 실렸던 재미난 기사를 소재로 한 벽화이다.
ⓒ 정철용
그려져 있는 이 광경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나는데, 더욱 재미난 것은 이것이 그 당시 <베이 오브 플렌티 타임즈> 신문에 보도되었던 기사를 소재로 한 실화라는 것이다. 이처럼 카티카티의 벽화들은 100여년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보는 이를 몹시 즐겁게 한다.

그런데 벽화들이 재현해 내고 있는 옛날의 사건과 삶의 모습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이 벽화들이 간직하고 있는 숨은 에피소드들이다. 예컨대, 1914년에 촬영된 이 마을의 와이테코헤 학교(Waitekohe School) 학생들 및 교사들의 단체 기념사진을 보고 그린 이 작품을 보자.

▲ 옛날 학교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보고 그린 벽화 'Waitekohe School'. 이 벽화 완성 당시에 그림 속 학생 3명이 생존해 있었는데, 이 벽화를 보고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 정철용
1991년 이 벽화가 그려졌을 때, 완성된 벽화를 보고 너무나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벽화 속에 그려진 학생들 중에서 3명이 아직 생존해서 이 마을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벽화 속에서 자신들의 어릴 적 얼굴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처럼 카티카티에서는 역사를 살펴보기 위하여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이 마을의 역사는 메인 스트리트의 벽화들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카티카티의 벽화들을 구경하는 것은 역사를 읽는 것이며, 그 벽화들이 곳곳에 있는 메인 스트리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인 셈이다.

도서관: 하이쿠를 읽으며 시냇가를 거닐다

카티카티에는 벽화 말고 유명한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하이쿠 산책로(Haiku Pathway)이다. 카티카티를 가로질러 흐르는 우레타라 하천(Uretara Stream)의 시냇가를 따라서 2km 정도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구불구불 부드럽게 이어지는 이 산책로를 걸으면서 곳곳에 놓여 있는 작은 바윗돌에 새긴 일본의 전통적인 단형시 하이쿠를 감상하는 것도 몹시 즐거운 경험이었다.

▲ 작은 바윗돌에 새겨진 하이쿠는 모두 뉴질랜드 출신 시인들의 작품이다.
ⓒ 정철용
물론 산책로의 곳곳에 놓인 12개의 바윗돌에 새겨져 있는 하이쿠들은 모두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로 쓰여져 있는데, 뛰어난 하이쿠를 많이 쓴 뉴질랜드 시인들의 작품 중에서 고른 것들이라고 한다.

'강물에 비친 그림자가 새들보다 더 짙구나'

영어로 소리내어 읽은 것을 마음 속으로는 우리말로 옮기면서 나는 산책로 옆으로 흐르고 있는 시냇물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시냇물에 비친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빛나고 있는 싱그러운 연둣빛이 아니라 어둡고 짙은 회색이었다.

시구에 너무나도 잘 부합하는 풍경에 감탄하면서 걷고 있자니 이번에는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가 나왔다. 아름다운 문양을 파놓은 나무 기둥들로 난간을 장식하고 있는 그 다리를 건너가 보았더니, 다리 바로 앞에도 하이쿠가 새겨진 작은 바윗돌이 하나 놓여 있었다.

▲ 아름다운 다리와 아름다운 시구가 몹시도 잘 어울린다.
ⓒ 정철용
'저녁이면 다리는 위험한 오늘밤의 달이 된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달리 느끼겠지만 나는 이 시구 역시 아름다운 다리와 그 아래 흐르고 있는 시냇물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하이쿠 산책로 곳곳에 놓여 있는 하이쿠 바윗돌은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리도록 세심하게 선택된 것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이쿠 산책로는 이 마을에 사는 유명한 하이쿠 시인 캐쓰 메어(Cath Mair)의 제안으로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조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시의 선택과 배치에 있어서도 시인의 탁월한 감성이 여지없이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 시냇물을 따라 나 있는 하이쿠 산책길을 걸으면서 시를 읽었다.
ⓒ 정철용
나는 마치 볕 좋은 도서관 창문가 좌석에 앉아 시집을 읽듯이 하이쿠 산책로를 걸으면서 시를 읽었다. 하이쿠 산책로를 빠져나오니 오후 3시가 훌쩍 넘었다. 작은 마을 카티카티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에 이어 도서관까지 마음껏 즐겼으니 이제는 떠날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9월 30일부터 10월 7일까지 7박 8일간 다녀온 뉴질랜드 북섬의 베이 오프 플렌티와 이스트랜드 여행기의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벽화마을#카티카티#뉴질랜드#베이 오브 플렌트#하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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