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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마리서당 식구들은 나무에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전등사에 모였습니다.
2001년 8월, 마리서당 식구들은 나무에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전등사에 모였습니다. ⓒ 이승숙
혹시 '눈의 여왕'을 아시는지요? 아니면 '빛나는 기쁨의 길'은요?

꿈 많던 여학생 시절에 읽었던 <빨강머리 앤>은 지금 생각해도 참 행복한 책입니다. 특히 '앤'이 주변에 있는 나무며 숲길에 이름을 붙여 주는 대목을 생각하면 입가에 가만히 미소가 그려집니다.

지난 금요일(6월 1일)에 전등사에 갔습니다. 문화유산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봄이 엄마 이애경씨가 마침 그 날 전등사에서 일을 한다길래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습니다.

6월의 첫 날이었던 그 날은 날이 아주 좋았습니다. 햇살 아래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나무들을 보면서 올라가다가 문득 몇 년 전에 우리가 했던 '나무 이름 달아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이름표들이 아직도 남아 있나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 지나서 그런지 남아 있는 이름표는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더 찾아보는데 '대조루'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느티나무에 우리가 붙여 주었던 이름표가 남아 있었습니다. 글씨는 다 지워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나무 둥치에 낚시줄로 묶어두었던 이름표는 그때 그대로 나무에 남아 있었습니다.

'마리서당' 식구들과 함께 했던 나무 이름 지어주기 놀이

전등사 스님으로 부터 은행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전등사 스님으로 부터 은행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 이승숙
2001년 여름 우리 '마리서당' 식구들은 나무에 이름을 지어주는 놀이를 했습니다. '마리서당'은 외지에서 강화로 이사 들어온 사람들끼리 1999년 봄에 만든 교육공동체입니다. 그때 우리는 토요일 오후에 만나서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유치원 다니는 꼬마서부터 초등학교 6학년 아이까지 나이를 따지지 않고 함께 모여 공부를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보다 부모들이 더 신나했던 모임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공부를 빌미로 모인 어른들은 막걸리잔을 앞에 놓고 시류와 풍류를 넘나들며 참 재미나게 살았습니다.

강화도 길상면에 있는 전등사는 역사가 1600여 년이나 되는 오래된 절입니다. 그래서 볼거리도 많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전등사에는 오래된 나무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 나무들에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습니다.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동문으로 해서 올라가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문으로 해서 올라갑니다. 두 길 다 포장이 되어 있어서 차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절에 가는 참맛을 느끼려면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상쾌한 숲 내음을 맡으면서 시원한 바람도 맛볼 수 있답니다.

길 양 옆으로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우쭉우쭉 솟아 있습니다. 다들 세월의 무게를 가슴에 품고 있는 나무들입니다. 우리는 그 나무들에 이름을 붙여 주었답니다.

나무도 저마다 이름이 있지요. 소나무라든가 느티나무, 또는 단풍나무, 산딸나무 같은 이름들이 있지만 우리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그 나무들은 특별한 나무가 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잖아요.

하늘과 땅 은행나무, 만나면 불러 주세요

대조루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에는 고맙게도 그 때의 이름표가 남아 있었습니다. 글자가 다 지워져서 이 나무의 이름이 뭐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조루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에는 고맙게도 그 때의 이름표가 남아 있었습니다. 글자가 다 지워져서 이 나무의 이름이 뭐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이승숙
전등사에는 둥치가 아름이 넘는 큰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습니다. 그 나무들은 아래 위로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마치 부부의 연을 맺은 나무인 양 그렇게 다정스레 서 있습니다. 그 중 위에 있는 나무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옛날에 나무에서 딸 수 있는 은행보다 더 많은 양을 나라에 바치라고 해서 스님들이 해마다 고초를 당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큰 스님이 이 나무에 다시는 은행이 달리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 이후로 그 나무에는 은행이 안 달린대요. 전등사의 스님이 아이들에게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은행나무를 보면서 아이들은 각자 느낌대로 이름을 짓기 시작했어요. 온갖 이름들이 다 나왔습니다. 하지만 가장 호응이 좋았던 이름은 '땅은행나무'와 '하늘은행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 은행나무에 그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이 다음에 전등사에 가시면 '하늘은행나무'와 '땅은행나무'를 한 번 찾아보세요. 그리고 가만히 불러주세요. 그러면 나무가 조용히 대답을 해올지도 모릅니다. 깊고 푸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올 겁니다.

동문으로 올라가다 보면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습니다. 양헌수 장군은 신미양요 때 양이와 싸운 장군입니다. 승전비를 굽어보고 있는 소나무에 우리는 '승리의 증언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답니다. 오늘도 그 소나무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서서 '승리의 증언'을 해주고 있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나무들에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해를 향한 발돋움'과 '하늘로 뻗은 길'이란 이름을 붙여준 나무도 있답니다. 정말 그 소나무들은 울울창창한 나무들 속에서도 기품이 있어 보였어요.

특별한 나무가 있어서 너무도 특별한 전등사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전등사의 나무들, 풍경만이 뎅겅거렸습니다.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전등사의 나무들, 풍경만이 뎅겅거렸습니다. ⓒ 이승숙
길 가에 있어서 사람들의 손때를 많이 타서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는 나무도 있었어요. 우리는 그 나무에 '내 처지 되어 보세요'란 이름을 지어 주었답니다. 정말 그 나무는 쉬고 싶을 거예요. 그러니 이 다음에 전등사에 가시거들랑 나무를 만지거나 올라타지 마시고 그냥 조용히 쉬게 해 주세요.

그 밖에도 '손님맞이 나무'에다 '꽃구름', 또 '돌진하는 염소' 등 꼭 그 나무에 맞는 그런 이름을 우리는 붙여 주었답니다.

처음에는 나무 이름을 짓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그 나무에 꼭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 나갔답니다. 어느 정도 하다보니 아이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경쟁이 아주 치열했답니다.

유치부 어린이들은 자기들이 지은 이름이 안 뽑히자 그만 삐쳐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정표가 몰려서 몰표를 얻어 당첨된 이름도 있답니다.

그 아이들은 전등사에 갈 때마다 자기가 이름 붙인 나무를 꼭 찾겠지요? 그 나무는 이제 그 아이에게 특별한 나무가 되었을 겁니다.

불러 주기를 기다리는 나무들, 가만히 한 번 불러 주세요

전등사 안마당의 저 느티나무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줍니다. 지금 다시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붙여주면 좋을까요?
전등사 안마당의 저 느티나무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줍니다. 지금 다시 이름을 짓는다면 뭐라고 붙여주면 좋을까요? ⓒ 이승숙
그 날 우리는 쉰 다섯 그루의 나무에다 이름을 지어 주었답니다. 그 나무에 가장 맞는 이름을 지어주느라 창작의 고통도 느꼈답니다. 하지만 딱 맞는 이름을 찾았을 때 느끼는 기쁨은 아주 컸어요.

우리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내가 지은 게 아니라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내가 내 이름의 주인인 듯싶은데 또 어찌 생각하면 아닌 것도 같습니다. 그리 보면 이름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나를 불러주는 사람들인 것도 같네요.

나무들도 마찬가지예요. 나무들은 다 제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린 거지요. 우리는 그냥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이름을 불러준 거예요.

그 날 이후로 전등사는 우리에게 특별한 절이 되었어요. 한 번 휙 둘러보고 오는 절이 아니라 특별하고도 가까운 우리들의 절이 된 거지요.

평일 낮의 전등사는 고요했습니다. 대빗자루로 쓸었는지 마당에는 빗자루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끔씩 풍경이 뎅그렁거렸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울었습니다. 누가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뭇잎이 달싹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전등사#나무#이름#대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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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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