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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1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앞에서 '장준하 선생 기각결정'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 추모연대

6월이다. 봄의 끝자락에서 가슴벅찬 미래로 5월을 넘어 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그렇게 6월이 시작되었다.

80년대 어느 조그마한 민박집에서 "시민여러분, 시민여러분 계엄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라는 여성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던 사람들에게, 지금 세상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강산이 두번 바뀌고 남쪽에서도 기억하고 기념할 일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보도에 의하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 10.1%가 87년 6월항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잊혀지는 6월항쟁, 초라한 민주주의

6월 항쟁과 관련된 인물을 묻는 객관식 질문에도 박종철과 이한열을 꼽은 고려대 학생은 3.8%에 불과했다. 또 23.8%가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 열사를, 10.9%는 전태일 열사를 선택했을 정도로 6월항쟁은 잊혀지고 있다.

세월이 변해서 '00 20주년 기념', '00투쟁 20주년 기념', 그리고 5·18 항쟁에 이어 '6·10민주항쟁기념일까지 제정되었지만, 이시우 사진작가의 사진이 미군기지를 찍었다 하여 '국가보안법'으로 단죄되고 그는 감옥에서 47일간(6월 6일 단식중단)이나 곡기를 끊고 국가보안법에 저항해야 하는 현실이 이나라 민주주의의 초라한 모습이다.

5월의 마지막날 오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피해보상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찾았다. 벽면에는 점거농성 10일차를 알리는 표지판과 요구를 담은 구호가 처음온 사람을 맞이한다. 위원장실 앞을 지키고 있고, 한켠에선 투쟁물품을 준비하고, 한켠에선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농성을 이끌고 있는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 김명운 집행위원장을 복도에서 만났다.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가 아니라, 민주화운동 기각위원회다. 어떻게 장준하 선생을 민주화 운동에서 기각시킬 수 있는가. 보상심의위원회는 선생의 민주화 운동은 인정했지만 선생의 죽음이 민주화 운동과 관련 있는지는 판단하지 않은것이라 발뺌 하지만, 장준하 선생이 민주화 운동을 하신 것은 삼척동자도 다안다. 심의에서 핵심은 선생의 억울한 죽음인데 위원회는 관련없음으로 판단했다. 이는 선생을 두번 죽인것이다"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가 아니라 기각위원회다"

▲ 농성장 벽면에 농성일자와 구호가 게시되 있다.
ⓒ 최석희

- 오늘이 10일째인데 힘들지는 않나
"농성이 오래갈 것 같다. 오래 버티기 위해서 집에는 들어간다. 새벽 1시에 가고, 아침 7시에 출근한다. 그러나 다른 분들은 교대로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 이제 6월이다. 올해 6·10 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는데 한쪽에서는 이렇게 농성하고 있다. 소감을 말씀해 달라.
"87년 서울대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 사람들은 87년에서 6월만 이야기 한다. 6·10 이전에 2·7 남영역 부근 가두시위, 3·3 삼성프라자 가두투쟁이 있었다. 그 주역들은 학생이 아니고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민주헌법쟁취범국본이 한 일을 명확히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참여했다고 민주화 투사인양 하는 분들은 노태우의 6·29(속이구)선언이 나자 바로 투쟁을 중단해 버렸다.

당시 요구되던 민주헌법쟁취라는 시대적 과제를 직선제 개헌으로 대치해 버렸다. 범국본은 당시 야당정치권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재야 상층 인사들 이 모인 조직이다. 그리고 그들은 6·10을 시작으로 세 번정도의 집회만 주최했다. 그 대회가 가능하도록 80년대 초부터 가두에서 경찰과 맞서온 것은 민족민주세력인 노동자와 학생이었다.

6·29 선언으로 방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때 7~9월 노동자들은 계속 투쟁으로 나아갔다. 소위 상층 민주개혁 세력이 87년 민중대투쟁을 6월 항쟁과 노동자 투쟁을 떼놓음으로써 6월항쟁의 성과를 가로채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장준하 선생을 기각시켰다고 생각하나.

"여러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농성을 하기 전에는 한나라당쪽에서 추천한 위원들이 반대해서 기각결정이 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대통령이 임명한 3명의 위원이 동의했다. 그리고 기각 결정이 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여직껏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있지 않다. 정치권이 이합집산을 앞두고 있는데 이른바 민주개혁세력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염두해서 박정희가 장준하 선생을 살해했다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라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비슷한 분석인데 현재의 민주개혁세력이 권력을 재창출 하기 위해서, 판을 짤때 민족주의 진영까지도 제외시키고 친미보수대연합 구도로 가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 앞으로 농성은 어떻게 될것 같나.
"이번 기각 결정이 하경철 위원장과 위원들이 장준하 선생과 다른 분들의 기록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판단불능' 결정을 근거로 일시적이고 우발적으로 판단했다면, 농성이 아주 장기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다면 장준하 선생이라는 걸림돌이 제거되지 않는 한 농성은 상당히 오랜기간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걱정이 된다."

'불인정 철회와 사과, 회의록 공개'등을 요구하는 추모연대의 위원회 농성이 16일째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하경철)은 지난 지난 4월 11일 '장준하 선생의 사망과 관련해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으로 보기 힘들다는 결정을 유가족에게 통보했다.

위원회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4년 2월 '진실규명불능'을 근거로 제시했으나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판단은 '정황적 증거는 명백하게 타살로 규정되나 관계 정보당국이 결정적 증거를 은폐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내용이 전제 되있어 위원회의 이번 결정이 사회적 논란이 되고있는 것이다.

장준하 선생과 함께 민주화운동 관련 의문사 중 불인정 된 주요사건으로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운동에 투신 행방불명되었다가 10년만에 기무사의 공작과정에서 열차사고로 숨진 것으로 밝혀진 박태순열사, 법원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된 소위 인혁당사건을 의문사위원회가 직권조사하는 계기가 된, 고문에 의해 사망한 장석구 선생, 87년 군부재자투표 과정에 야당을 찍었다는 이유로 부대 내에서 집단구타에 의해 사망한 정연관 열사, 83년 군 녹화사업과정에 운명한 최온순 열사, 71년 대통령선거과정에서 경찰과 공화당원에 의해 열차사고로 위장되어 떠난 김창수 선생, 83년 크리스찬아카데미 활동 중 행방불명 된 정은복 선생 등 7명이다.

#장준하#서울#추모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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