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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는 비가 많이 왔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나들이를 계획한 이들을 우울하게 했습니다. 다행히도 오전에는 봇물 터트리기를 참고 기다려주어 법회 같은 행사는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나무에는 맛난 선물이었습니다. 작년에는 앙증맞게 돋아난 은행나무 아기 잎을 보았는데, 올해는 그걸 자세히 볼 틈도 없이 성큼성큼 잎 크기를 키워 가지를 가득 메웠습니다.

5월에는 그렇게 나무들이 푸름을 한껏 더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아카시아 나무만은 거센 비바람 때문에 꽃 무리가 주렁주렁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멋과 향을 마음껏 자랑할 시간을 빼앗겼습니다.

물의 속성을 아는 것으로 짧은 생애의 아쉬움을, 또는 때를 놓쳐 안타까운 만시지탄(晩時之歎)의 아쉬움을 달래볼 수는 없을까요. 지나간 일에 미련을 두려다 가도, 쉼 없이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가 저절로 삭혀지는 그런 정갈한 경험…. 또는 억수로 쏟아지는 폭포수의 세찬 기력을 도움받아 응어리진 마음을 도려내는 격한 경험…. 그리고 이내 물을 만나기 전의 세상을 달라진 시야로 다시 찾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재생적 경험 등.

저는 지금 캔에 든 한 잔의 홍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윽한 찻잔에 찻잎을 우려내 마시는 따뜻한 물이 아니라, 동료가 자판기에서 빼어준 차가운 물입니다. 그 홍차, 아니 그 물은 제 목을 지나가면서 늦봄의 더위가 유발한 갈증을 데리고 갔습니다.

물을 자주 마시는 저에게 그건 잠시만의 해갈에 불과하지만, 한 화가의 '물'을 만나고 나서는 상념을 지니고 다시 바라보게 했습니다. 여름을 앞둔 5월의 끝자락 날에 '물'을 실컷 만나고 왔습니다.

▲ 시원한 선물 같았던 전시회 팸플릿.
ⓒ 송필용
전날(29일) 외출을 하려다가 우편함에 무언가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저희 집에 배달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제목의 전시회 팸플릿 그림이, 제목의 뜻풀이가 제 눈을 끌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善(선)은 물과 같다."

시원한 청색 계곡의 오목한 자락 사이로 떨어지는 하얀 폭포수가 개울 수면에 부서져 으스러지는, 형체를 일순간 해체시키는 그림이었습니다. 그건 곧 여름이 다가왔다고 알리는 그림이었습니다.

왜 가장 위대한 선(善)은 물과 같을까요.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마신 홍차의 물이나, 제 몸속을 정화시키고 자기는 더러움을 이고 나갈 물이나 심지어 나뭇잎을 통해 증기 상태로 증발할 물도 지상과 그 위를 돌고 돌아 순환해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기 때문일까요. 또는 그저 순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두꺼비에게 헌 집 받고 새집 주듯이 인간세상의 더러움을 받아서 사라졌다가 깨끗한 물로 되돌아오는 착한 마음씨와 능력 때문일까요.

물은 천연 강줄기의 형세에 따라, 담기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수로에 따라 자신의 형체를 변형시켜가며 세상을 채워갑니다. 그런 넉넉함 때문일까요, 유순함 때문일까요.

게다가 기나긴 도보여행과 땡볕에 지친 나그네에게 반갑게 나타난 시냇물과 서늘한 폭포는 건강한 쾌락의 극치를 이루게 합니다.

심지어 악천후마저 이로움을 줍니다.

"악천후는 여행에 소금과도 같은 것이다. 비록 고요한 질서를 뒤흔들어 놓기는 하지만, 악천후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보증한다. … 나는 마음 턱놓고 걸었다. 하마터면 틀에 박힌 되풀이나 그저 평범한 걷기가 될 뻔했는데 폭우가 나를 구해주었다." (<걷기예찬> 중에서)

게다가 비는 심리적 위안도 줍니다.

"비는 풍경에 푸릇푸릇한 생기를 준다. 그리하여 사람은 마음이 고즈넉해져서 위안을 얻는다. 또는 비는 길바닥으로 내몰린 불운한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같은 책에서)

▲ '흐르는 물처럼-생명의 순환'.
ⓒ 송필용
강물은 강 한가운데의 유속이 가장자리의 유속보다 빠릅니다. 꽃잎을 떨어뜨려 보면 알 수 있죠. 그런데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경우에도 그럴까 궁금했습니다. 그림을 보고 화가에게 물어보니 그렇다 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량의 하중에 따라 중앙에 몰려 있는 물줄기는 거센 속력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대세(大勢)'라고 하겠지요. 수많은 폭포를 유심히 바라본 이력이 화폭에 담겼을 테니 기본적 과학 원리 정도야 대수겠습니까마는.

전시회를 여는 초대일에 들른지라 바쁜 화가를 붙잡고 많은 질문을 주고받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화가 송필용님은 그렇게 많은 폭포를 그렸습니다. 우리나라의 폭포는 대개가 작은 형태입니다. 정선의 백석폭포는 100미터가 넘는 폭포지만 인공폭포이고, 제주도의 천지연 폭포는 20여 미터의 높이에 불과하고 대신 폭이 넓죠.

외국 것에 비하면 아기자기하다고 할 수 있을 한국의 폭포들에서 오히려 물의 속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근거리에서 시야에 꽉 들어오는 폭포의 현란한 몸짓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문득 화가에게는 집요한 데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화가 김덕용님은 나뭇결에(제 기사 '나뭇결 속에 배인 추억' 참고), 화가 김창열님은 물방울에, 한젬마님은 '관계'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한 시절이기도 하고, 평생이기도 합니다. 그 구체화된 화두가 자기를 떠날 때까지요.

화가에게 궁금한 것은 이런 흘러가는 물을 보고 그릴 때 어떤 생각이 들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더욱이 멈출 줄 모르고 쉴 새 없이 흘러가고 내려가는 물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아마 그건 지금 회자에 오르고 있는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에게 빛을 어떻게 그려내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물만큼 빛과 잘 섞이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정중동(靜中動)의 대양의 물에서도, 마찰음의 개울에서도, 화산 폭발음 같은 폭포에서도 빛은 물과 어울려 형형색색을 나타냅니다. 화가의 그림에도 이 빛들이,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이 빛들이 모여 있지요.

▲ '흐르는 물처럼-땅끝에서'.
ⓒ 송필용
그런 빛은 바다를 그렸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작품 중에 땅끝마을에서 그린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바다는 한 가지 색이 아닙니다. 한 가지 색일 수가 없습니다. 나무판자처럼 결이 나 있는 바다 그림의 색은 수많은 시간 동안 화가의 눈에 중첩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다의 풍경은 밤의 풍경입니다. 달이 떠 있는 바다. 드뷔시의 '월광'을 들으며 이 그림(도록)을 다시 봅니다. 화가는 밤새 달 아래 펼쳐진 바다를 바라본 걸까요. 그리고 바다색을 찾아낸 걸까요.

시간에 따라 빛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경우가 달의 모양입니다. 누에나방의 눈썹 모양같이 예쁘다는 '아미월(蛾眉月)'에서 만월(滿月)까지, 아예 사라지는 합삭(合朔)에까지 빛은 달에게 매일매일 마술을 부립니다.

그런데 화가의 그림에는 그 달들이 다 한자리에 모여 바다 위에 떠있습니다. 그리고 바닷속에 가라앉아 자잘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그때의 달빛은 시간이 모인 빛일까요. 중복된 곳을 하나만 지닌 합집합 같습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물빛의 속성을 교집합으로 대표성 있게 그린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달은 물 위에 '빛방울'을 잔뜩 던집니다. 물고기들이 먹이가 던져진 곳에 잔뜩 모여들듯이, 빛방울들이 부유하면서 출몰하면서 달의 자국을 남깁니다. 달의 그런 은은한 자태 때문에 바다는 해보다는 달과 더 잘 어울립니다.

이 달들은 전부 같은 존재의 다른 모습입니다. 달이 둥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지만 지금 떠 있는 초승달을 둥글다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어쩌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일 것입니다.

폭포의 물이든, 달이 떠 있는 바다의 물이든 중요한 것은 화가의 눈에 물이 어떻게 보였나는 것일 겁니다. 화가의 눈 속으로, 빛에 '놀아난' 물이 고정된 이미지로 들어와 화폭을 장식하게 합니다. 그러다 그 물은, 물빛은 화가의 사유까지 침범해버린 선한 '범법자'가 되어 '상선약수'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한 가지를 주되게 바라보다 보면 그 속에 만물의 이치까지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 '흐르는 물처럼-생명의 순환'.
ⓒ 송필용
이제 물고기들이 노니는 개울이나 강물을 볼까요. 물고기들이 그 '선한' 물속을 자유로이 유영합니다.

배가 물 위에 뜨는 원리는 자기 부피만큼의 물을 밀어내는 원리 때문입니다. 물고기들이 물속을 노닐 수 있는 것도 이런 밀어내는 원리에다, 유연한 몸놀림 덕분입니다. 그 몸놀림으로 물빛을 휘저어 놓습니다. 이런 몸놀림을 물은 허락합니다.

물론 지상이 물속보다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땅에서 발을 떼고 지상 위로 오를 수는 없습니다. 상하좌우의 몸놀림을 물이 허락하는 덕분에 사람들은 물속에서 잠시 새가 됩니다.

갯버들이 가지를 뻗고 있는, 천천히 흐르는 강물은 물이 자신의 '본색'을, 물속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갯버들이나 매화꽃잎이 떨어져도 잠시 그 꽃잎을 매만지느라 흐름을 늦춥니다. 그리고 가지 위 꽃의 색깔을, 숲의 색깔을 담아 자기 색으로 삼습니다. 월광의 번지는 '빛더미'도 담습니다. 나무도 물속에 거꾸로 심어 놓고 바깥의 본 나무를 유혹합니다.

▲ 소설 <혼불> 속 청암부인이, 2년 농사 망친 거라 생각하고, 공을 들여 만든 저수지. 이름하여 '청호지'.
ⓒ 박태신
이제 나르시즘의 수선화를 만들어내는 연못을 볼까요. 수선화의 한자음이 재미있습니다. '수선화(水仙花)!' 물속에 자기를 던져 신선이 된 꽃! 느린 호흡의 연못이, 호수가 만들어내는 신비입니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은 저자 자신이 자신의 선조들 역사를 탐색해서 소설로 꾸민 글입니다. 소설의 무대 역시 저자의 선조들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남원시 서매면 노봉마을 그곳입니다. 그곳에 '혼불 문학관'이 있고, 그 옆에 '청호지'라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청호지'는 '혼불 문학관'과 조화를 이루며 산 아래 언덕에 안온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변을 잘 정리해놓아 고요하게 산책할 수 있는 곳입니다.(제 기사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가는 곳' 참고)

저수지 건너편 숲. 녹색의 새순들이 짙은 색의 상록수 사이로 비집고 나와 주변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숲의 높이만큼 물 위 그림자도 길어집니다. 물 위의 그림자는 숲의 색을 그대로 빨아들이고 번짐 효과로 묘를 부린 것 같습니다.

나룻배가 있고 낚시질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곳의 평화와 고요는 깨졌을 것입니다. 이 사진을 보고 땅 위의 그림자는 흑색, 물 위의 그림자는 천연색임을 새삼스레 확인합니다.

▲ '물안개 속의 홍매'.
ⓒ 송필용
물은 또 있습니다. 바로 부유하는 물안개가 그것입니다. 물안개는 방황하는 물입니다. 한곳으로 흘러가지도, 하늘 높이 솟아오르지도 못합니다. 지표면의 숲 거미줄에 걸려 하직도 상승도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넋입니다. 꽃물은 이 물안개가 남겨놓는 흔적입니다. 그 꽃물로 그림을 그리면 물안개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화(鎭魂畵)'가 될 것입니다.

화가는 화폭을 담을 대상으로 물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은 들어가지 않는 물, 그저 관조하는 물, 잡을 수 없고 잡아도 형체를 뭉개고 마는 물, 그런 물은 '성선설(性善說)'을 증명하는 멋진 존재입니다.

'상선약수'는 노자의 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물을 보고 도를 깨닫는 경지는 아니더라도 그 흉내만큼은 자유로이 낼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물이 풍요로운 나라입니다.

오늘 나를 거쳐갈 물들, 스쳐갈 물을 통해서 잠시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는 차분한 마음가짐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음이 착해지면 더욱 좋고요. 그런데 아직 늦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떠나질 않네요. 개인적으로 풍요로웠던 5월이어서….

괜히 전시회 시작을 수(水)요일에 한 것이 아니군요.

덧붙이는 글 | 송필용 개인전, 6월 20일까지. 이화익 갤러리(02 730-7818). 정독도서관 입구 근처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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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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