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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세연지 평면도
보길도 세연지 평면도 ⓒ 윤장섭, 한국의 건축
재력과 권력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충분하면 사람들은 무슨 일을 벌일까? 아들이 맞고 들어오면 권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보복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국난을 맞았을 경우, 멋진 도피처를 찾아 은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윤선도는 보길도를 은신처로 삼고 멋들어지게 꾸몄고, 즐겼다.

보길도는 지금도 아름다운 섬이다. 17세기 윤선도가 들어올 때는 더욱 아름다운 섬이었을 것이다. 중앙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있고, 분지를 벗어나면 모두 바다와 닿아 있다. 산세가 마치 피어오르는 연꽃 같다고 해서 분지 안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붙였다. 부용동에서 바다로 연결되는 것은 들어오는 입구밖에 없다.

세연지 중 계담, 계곡물을 판석보로 막아 연지를 조성했다. 인공의 둥근섬과 다양한 자연석이 어우러지고 있다.
세연지 중 계담, 계곡물을 판석보로 막아 연지를 조성했다. 인공의 둥근섬과 다양한 자연석이 어우러지고 있다. ⓒ 신병철
윤선도는 이 입구에 놀이 공간을 꾸몄다. 계곡을 막아 계담(溪潭)을 조성하고 그 맞은편에 인공 연못인 회수담(回水潭)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정면3칸, 측면 3칸의 정자를 조성했다. 씻은 듯이 맑은 경치와 분위기였으니, 세연정(洗然亭)이라 이름붙였다. 당시의 정자는 허물어지고 터만 있었는데, 1993년에 복원했단다.

계담은 계곡물을 판석보로 막아 꾸몄다. 물이 많아 넘치면 폭포가 되었고, 평소에는 건너편으로 건너는 다리가 되었다. 계담 맞은 편에는 네모난 인공 연못을 파고 물을 그쪽으로 끌여 들였다. 물이 들어오는 쪽 수구를 낮고 넓게(5수구) 만들고, 나가는 쪽 수구를 30cm쯤 높고 좁게(3수구) 조성하니 자연스럽게 물은 네모 연못을 한 바퀴 돌아 나가게 되었고, 그래서 이름도 회수담이 되었다. 물은 흘러야 썩지 않은 법이니까.

회수담과 세연정, 계담 맞은편에 물을 끌어와 인공 연지 회수담을 조성했다. 들어온 물이 연지 한바퀴돌고 나간다.
회수담과 세연정, 계담 맞은편에 물을 끌어와 인공 연지 회수담을 조성했다. 들어온 물이 연지 한바퀴돌고 나간다. ⓒ 신병철
계담 안에는 원래부터 있었는지 옮겨 놓았는지 모르지만 온갖 종류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자연 그대로 앉아 있고, 인공으로 둥근 섬을 만들어 놓았다. 저 위 옥소암의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는 사투암(射投岩), 소가 마치 고개를 들고 일어서려는 모습의 혹약암(惑躍岩) 등이 좋게는 조화를 이루며, 나쁘게는 널브러져 있다. 회수담에는 네모 연못과 물에 거의 다 잠긴 바위 등이 소나무와 아무렇게나 적절히 어울리고 있다.

판석보를 건너 산으로 10분쯤 올라가면 널찍한 바위가 나타난다. 자연이 만든 무대였다.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면 그 모습이 연못에 어른거리기도 했고, 세연정에 앉아 그것을 즐겼다니, 대단한 호사이기도 했다. 이름 그대로 옥소암에서 대금이나 피리를 불면 세연정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그 소리를 즐기지 않았을까 싶다.

옥소암에서 내려다 본 세연정, 피리 한곡 불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옥소암에서 내려다 본 세연정, 피리 한곡 불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신병철
이런 장소에서 피리 한 곡 불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음악이 어울릴까? 선비의 음악일 것 같은 상령산 해탄가락이 어울릴까? 아니면 호남의 끝자락이니 서편제풍의 산조가 어울릴까? 뭐 걱정할 것도 없다. 둘 다 불어보면 될 일이다. 불어보니 결국 산조 진양조가 최고로 어울린다고 단정해 버린다. 이유가 뭐냐고? 그냥 내 맘이다.

옥소암은 또한 과녁을 세워놓은 활터이기도 했단다. 회수담 안의 사투암(射投岩) 위에서 옥소암(玉簫岩)의 과녁을 향해서 활을 쏘았다고도 한다. 그냥 자연이 만든 활터였을 것이다. 선비들의 몸과 마음을 담금질하는 활터까지 겸비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공간이었다.

세연정 내부의 높은 단, 아마도 가장 지체높은 사람이 앉아 음악과 춤을 감상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세연정 내부의 높은 단, 아마도 가장 지체높은 사람이 앉아 음악과 춤을 감상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 신병철
저런 곳에서 친구들과 맑은 술 한 잔 걸쳐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더욱이 삼현육각 애틋한 장단에 따라 이리저리 너울 너울 그러다가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아름다운 젊은 남녀의 춤 구경까지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세연정 높은 단에 올라 앉으니, 손을 앞으로 곱게 내밀어 부채를 잡고 종종걸음인 듯 사뿐사뿐 뒷걸음질치며 다음의 빙글 도는 동작을 준비하는 살풀이춤이 저절로 떠오른다. 아! 멋지고도 멋지도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져 버릴 것 같다.

세연정 판석보와 건너편 무대, 동대와 서대, 이 무대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세연정 판석보와 건너편 무대, 동대와 서대, 이 무대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 신병철
실제로 정자 서쪽 좌우에 동대와 서대, 그리고 판석보 건너편에 무대를 만들어 놓고 처녀총각들에게 채색 비단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그것을 즐겼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곡조를 붙여 연주하게 하고 춤까지 추게 하였으니, 이건 보통 호사가 아니다. 날씨가 괜찮은 날에는 거의 빠짐없이 세연정 잔치를 베풀었고, 어떤 경우는 늦은 밤까지 향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함께 즐겼던 친구들이 있었을까? 아니면 혼자만을 위한 잔치였을까?

윤선도(1587-1671)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200여명의 노복들을 배에 가득 태워 국난을 구하기 위해 서울로 출발했단다. 그 중간에 삼전도에서 국왕이 청태종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여 제주도로 숨기로 했단다. 그러나 제주도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 곳 보길도에 들어와 눌러 앉아 버렸다고 한다.

남인인 윤선도가 서인 집권 시기에 노복들을 동원하여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사실 무리다. 난리가 터지고 뒤이어 굴욕적으로 항복하자, 그 모든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평소에 점찍어 두었던 보길도로 도피하지 않았을까? 보길도는 해남에서 지금의 배로도 1시간이나 남쪽에 있는 은밀하면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섬이었으니 말이다.

보길도 지도, 연꽃 모양의 산으로 둘러싸인 포근한 섬에 윤선도는 맘껏 자신의 세상을 조성했다.
보길도 지도, 연꽃 모양의 산으로 둘러싸인 포근한 섬에 윤선도는 맘껏 자신의 세상을 조성했다. ⓒ 보길도 여행지도
보길도는 백도쪽을 빼면 동글한 섬이다. 윤선도는 섬 전체를 자신의 은신처로 꾸몄다. 수백명의 노비들을 동원하여 집을 짓고 정원을 꾸몄다. 은신처의 입구는 놀이 공간인 세연정 주변이었다. 안으로 들어와서는 동쪽과 서쪽을 지형에 따라 강학공간과 독서공간 및 생활 공간을 꾸몄다. 이런 유적들은 모두 헐렸고, 논밭이 되었다. 최근에 다시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곡수당과 낙서재, 부용동 서쪽 지역에 강학공간을 조성했다. 지금 복원 중이다.
곡수당과 낙서재, 부용동 서쪽 지역에 강학공간을 조성했다. 지금 복원 중이다. ⓒ 신병철
서쪽에는 강학공간으로 삼았다. 곡수당과 낙서재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짓고 후학과 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곡수당에도 상연지 하연지를 비롯한 연못과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노는 물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수조와 직선 곡선의 다리들과 물길이 어울려지는 이 공간의 분위기는 복원 중인데도 대단하다.

신선이 살고 있는 동네가 이런 모습일까? 17세기 조선 선비의 건축적 조경적 미적 수준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런 공간을 끝없는 돌담이 둘러싸고 있다. 왕도 아닌 선비에게 무슨 힘이 있었길래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 시샘조차 마구잡이 꿈틀대고 있어 불편하다.

격자봉에서 내려다본 부용동 전경, 연꽃 꽃심지에 마을이 있다.
격자봉에서 내려다본 부용동 전경, 연꽃 꽃심지에 마을이 있다. ⓒ 신병철
서쪽으로 격자봉(430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산이 둘러쳐져 있다. 동쪽도 그보다 조금 낮은 산이 부용마을을 감싸고 있다. 동쪽의 지형은 넓지 않아서인지 좁은 공간에 조그만 공간을 확보했다. 신선이나 살 수 있는 동네로 꾸몄다. 그래서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이름붙였다.

돌방이 있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좁은 바위 위에 정자 하나만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 한창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원래의 모습은 아직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래의 모습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복원이 제대로 되기를 기대해 본다.

동네사람들은 부용동 마을의 생김새가 어머니의 자궁 같단다. 그래서 엄마 품에 안긴 듯 포근하고 안락하고 안심이 된단다. 윤선도는 풍수지리학에도 대단한 조예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연정 있는 곳이 자궁 입구이고, 낙서재와 동천석실이 각각 자궁의 좌우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원리나 풍수지리설에 대한 조예가 없어도 척보면 좌우 산자락에 그렇게 집을 지었을 것 같다.

동천석실의 자그마한 연지, 좁은 공간에 신선이 사는 공간을 꾸몄다.
동천석실의 자그마한 연지, 좁은 공간에 신선이 사는 공간을 꾸몄다. ⓒ 신병철
보길도에 윤선도가 조성한 은신처는 17세기 조선의 정원과 강학시설을 대표한다. 재력과 권력이 충분히 바탕이 된 지배층의 정원문화를 가장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섬 전체를 대상으로 건물과 정원을 조성했다. 뛰어난 문화는 이렇게 재력과 권력이 집중되는 가운데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걸까?

재력이 남아 돌고 권력의 비호를 충분히 받는 요즘의 소위 지배층은 어떤 집과 정원에서 살고 있을까? 섬 하나를 몽땅 구입해서 자신의 세상을 꾸미고 있는 사람은 혹시 없을까? 그런 것도 후세에 유적이 될 수 있을까? 갑자기 많은 것이 궁금해졌다. 설마 윤선도의 아들이 누군가에게 맞고 들어오면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서 보복하지는 않았겠지. 당시 해남지방에서 윤선도 집안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를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었을 거다.

조성 경위야 어떻든 간에 세연정에서 삼현육각 반주와 개구리 울음 소리에 맞춰 춤추는 살풀이 춤은 한 번 보고 싶어진다. 특히 녹음이 본격적으로 짙어지기 시작하는 6월 초순에.

덧붙이는 글 | 5월 마지막주 연휴기간 동안 보길도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환상적인 그 감정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보길도#윤선도#세연정#부용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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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고 있습니다. 낚시도 하고 목공도 하고 오름도 올라가고 귤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아참 닭도 수십마리 키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개도 두마리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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