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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씨드럴 코브로 이어지는 언덕의 주차장을 출발해서 내려오는 길에 바닷가 마을 하헤이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길게 뻗어 있는 하얀 모래밭의 앞쪽으로는 푸른 바다에 작은 섬과 갯바위들이 징검다리처럼 떠 있고, 뒤쪽으로는 우거진 녹색 나무와 수풀 사이로 빨강색 파랑색 지붕들이 띄엄띄엄 수를 놓고 있었다.

잠깐 차를 세우고 내려다본 하헤이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우리는 떠나기 전에 잠시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하헤이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는 핫 워터 비치(Hot Water Beach)인데, 차로 10분 정도면 닿을 가까운 곳이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 언덕 위에서 바라본 바닷가 마을 하헤이의 전경
ⓒ 정철용
우리는 언덕을 다 내려와서 차를 타고서 이리저리 하헤이의 골목 골목을 기웃거렸다. 정원을 잘 가꾸어 놓은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는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여느 바닷가 마을과 다름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그냥 떠나려고 했는데 길가에 세워 놓은 사진 갤러리 표지판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냥 가자는 딸아이와 아내를 설득해서 잠깐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이런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의 작품은 과연 어떤 것일까 또한 일반 가정집 내에 마련되어 있는 갤러리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경사진 정원의 계단을 올라가 집으로 들어서자 마치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이든 백인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겼다. 갤러리 구경을 하러 왔다고 하니까 그는 우리를 집 안쪽의 창고 비슷하게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가 닫혀 있던 철제문을 올리자 두세 평 남짓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스위치를 올려서 전등을 켰다. 우리가 갤러리에 온 오늘의 첫 손님이란다. 뭐라고?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조금 실망스런 마음으로 둘러본 갤러리의 벽에는 다양한 크기의 사진 20여 점이 걸려 있었다. 사진들은 안개 낀 바다의 풍경을 담은 사진 두세 점을 빼놓고는 그다지 뛰어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명제표에 제목과 함께 붙어 있는 가격표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다.

당신이 찍은 사진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아니라고, 자기 아들이 찍은 사진들인데, 지금은 그가 집에 없다고 대답했다. 판매도 하니 천천히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으면 한 점 사 가라면서 그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갤러리 안을 다 둘러보는데 채 5분도 안 걸렸지만 우리는 선뜻 나가기가 민망했다. 우리는 그가 오전 내내 기다려서 맞이한 첫 손님이 아닌가!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또 보았다. 한쪽 구석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벽에 전시되어 있지 않은 다른 사진들을 담고 있는 카탈로그도 뒤적거리면서 10분 정도를 더 머물렀다.

밖으로 나오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 다가섰다. 구경 잘했다고 말하면서 내가 손을 흔드니 그는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것 봐, 그냥 가자고 했잖아. 도망치듯 차로 내빼는 나의 옆구리를 아내는 쿡쿡 찔렀다.

민망한 갤러리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핫 워터 비치로 곧장 향했다. 핫 워터 비치는 코로만델 반도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바닷가 모래밭에 온천처럼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온천욕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즐겨 찾기 때문이란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돈 한 푼 내지 않고 자기 손으로 만든 즉석 온천을 즐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아무 때나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지는 않는다. 바닷물이 가장 멀리 빠져나가 있는 간조를 전후해서 두 시간 동안만 이용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도 전날 묵었던 숙소에서 간조 시간을 미리 알아두었던 것인데, 그날은 오후 1시 33분이 간조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후 12시 30분 이전에만 그곳에 도착하면 오후 2시 30분까지는 마음껏 온천을 즐길 수 있을 터였다. 더군다다 평일이니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을 터였다. 이렇게 지레 짐작했기에 나는 하헤이에서 사진 갤러리를 구경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2시 30분 조금 못 미쳐 도착한 핫 워터 비치의 주차장은 벌써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나는 집에서부터 싣고 온 삽 한 자루를 트렁크에서 꺼내 들었고 아내는 돗자리를 챙겼다. 우리는 점심은 일단 미루고 바닷가로 먼저 향했다.

▲ 바닷가의 모래밭을 파서 옆에 둑을 쌓아 만든 즉석 온천
ⓒ 정철용
아뿔싸, 바닷가에는 벌써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이미 모래밭을 파서 옆에 둑을 쌓아놓고 그 안에 들어누워서 온천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삽을 들고 그 주변 모래밭을 파 보았다. 그러나 뜨거운 물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뜨거운 물이 모래밭 어디에서나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우리처럼 늦게 와서 모래밭을 삽질하느라 낑낑대는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물이 솟아나오는 모래밭은 일찍 온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누울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삽자루를 부여안고 그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번갈아가며 모래밭의 이곳 저곳을 파 보던 나와 딸아이도 공연히 삽질하는 것을 포기했다. 우리는 둑을 넘쳐서 흐르는 뜨거운 물에 고작 발목만 담글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물은 뜨거웠다. 최고 온도가 섭씨 64도에 이른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 모래밭에 뽀글거리는 저 구멍으로 따뜻한 물이 솟아나온다
ⓒ 정철용
이렇게 뜨거운 물이 모래밭에서 솟아나오는 것은, 약 80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캐씨드럴 코브가 만들어진 것처럼 핫 워터 비치 인근 바다 밑에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거대한 지하저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일부가 지표로 올라오는데 그것이 바닷물이 빠져나간 핫 워터 비치의 모래밭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솟아오르는 물은 화학적으로는 산성도 알칼리성도 아닌 중성이며, 소금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지만 바닷물은 아니라고 한다. 미량이나며 칼슘, 마크네슘, 브롬, 실리카 등의 미네랄 성분도 함유하고 있다고 하니 피부에도 좋을 듯 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놀아야겠다며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부터 아예 수영복으로 갈아 입었던 딸아이는 실망한 눈치가 역력했다. 거봐, 아까 사진 갤러리 구경하고 오느라 늦고 말았잖아.

말은 안 했어도 딸아이 동윤이의 눈빛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아내는, 참 신기한 바닷가도 다 있네, 라면서 모래밭에 즉석으로 마련한 소금 온천에 들어누워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자신이 만든 즉석 온천에 누운 사람들
ⓒ 정철용
비록 내 몸을 누이지는 못했어도 더없이 편안해 보이는 그들의 자세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여행정보 안내책자에서 코로만델을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네 형용사 중 하나인 '편안한(relaxed)'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바닷가 모래밭에 샘솟는 따뜻한 소금 온천물이 더욱 쾌적하게 느껴지리라. 여름밤, 달빛과 별빛 아래서 즐기는 바닷가의 즉석 온천은 또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환한 대낮이 아니라 나중에 그런 날을 택해서 다시 한 번 오자고 딸아이를 달랬다.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는 삽과 돗자리를 트렁크에 챙겨 넣고, 주차장 옆의 가게에서 파이를 사서 점심을 때웠다. 벌써 1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그제서야 도착하는 차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삽을 꺼내 들고 부리나케 바닷가로 향했다. 그들을 여유롭게 바라보면서, 우리보다 더한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으며, 나는 마지막 남은 파이 조각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9월 다녀온 코로만델 반도 여행기의 여섯번째 이야기입니다


#하헤이#바닷가 온천#코로만델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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