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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개를 기르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 김종휘
딸 같았는데…

60대의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20대 시절 집에는 작은 개가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온 거리의 똥개였다. 어머니가 붙인 이름은 복실이. 나중에 알았지만 천상병 시인이 생전에 데리고 살았다는 똥개 이름과 같았다. 나는 복실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사나흘씩 외박을 하던 그 무렵 대문을 들어설 때마다 마주쳐야 했던 복실이가 보기 싫었다.

못생겼고 지저분했으며 냄새가 심했던 복실이는 나만 보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못 본 체하고 쓱 지나가거나 발을 휘둘러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복실이는 1년 정도 집 마당에서 살았다. 가끔은 복실이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지만 대부분 못마땅하게 대했다. 그래도 복실이는 나를 보면 언제나 열렬하게 반겨주었다.

그날도 며칠 외박을 한 다음이었다. 집에 왔는데 대문이 열려있었다. 들어서는 순간 휑한 기분이 들었다. 복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마루에 걸터앉은 어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캐묻자 지난 며칠 찾아다녔어도 볼 수 없다고 했다. 복실이가 가출을 한 것이다. 개장수가 잡아간 것 같지는 않다고 어머니는 위안하듯 말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집에 왔듯 홀연히 돌아올지 모른다며 대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러길래 왜 묶어두지 않았냐고 핀잔을 주고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어머니의 가느다란 탄식이 들렸다. 복실이가 막내딸 같았다고, 두 누나와 형이 분가한 이후 바깥으로만 도는 막내아들과 사는 게 적적했다고, 복실이가 딸이었다고….

복실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개집을 그대로 놔두었다. 어느 날에는 개집 안에 개줄이 보였다. 새것이었다. 어머니가 사다 둔 것이었다. 나의 외박은 계속되었지만 복실이가 사라진 마당을 지나치는 그 짧은 시간은 갈수록 더 휑했다. 나는 개집을 치웠다. 나는 그 후에도 어머니에게 복실이 같은 막내딸 구실을 하지는 못했다.

첫 번째 암 수술을 받은 직후 어머니는 스스로 회복될 수 있노라 믿고 첫 번째 퇴원을 했다. 그날도 어머니는 간신히 몸을 추슬러 마루에 앉아 있었다. 나는 덩치가 큰 누렁이 한 마리의 목줄을 붙들고 마당에 서 있었다. 복실이에 비해 털과 빛깔과 생김새가 고왔다. 누렁이의 두 눈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선량하게 보듬는 매력이 있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한참을 누렁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누렁이는 큰 눈을 껌벅일 뿐 짖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어머니는 같은 말을 하며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조용히 누렁이를 끌고 대문을 나왔다. 그때 집은 신당동에 있었는데 왕십리 시장까지 누렁이를 데리고 걸어갔다.

▲ 그때 내가 도살장으로 데려간 누렁이는 이렇게 바닷가를 뛰놀던 개였는지 몰랐다.
ⓒ 김종휘
누렁이는 그날 처음 만났다. 어머니가 아시는 분을 통해 가져온 개였다. 어느 시골에서 데려온 것 같았다. 누렁이를 데리고 신당동 집에서 왕십리 개시장까지 걸어가는 길은 30분 남짓이었다. 나는 그때 그 동행을 잊을 수 없었다. 왕십리 시장에 진입해서 도살장 골목으로 꺾어 들자 마중 나온 사람이 보였다. 그때부터 누렁이는 덜덜덜 마구 떨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힘껏 뒷걸음질치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드는 누렁이를, 나는 그에게 넘겼다. 목까지 줄을 바짝 틀어쥐고 끌고 가자 누렁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그때 누렁이의 뒷다리에 팽팽하게 일어선 힘줄이 보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도살장 입구 너머로 시멘트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발톱 소리가 들렸다.

봄이었었나, 오후였었나, 평일이었나, 시장 골목길은 한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멍하게 있는데 그가 다시 나타났다. 건네주는 한 꾸러미의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묵직했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탔다. 세 정거장 지나면 집이고 길은 뻥 뚫렸는데도 몹시 길었다. 그때 좌석에 앉아서 느꼈던 그 무게감과 촉감, 무릎에 올려놓은 비닐봉지는 무척 따듯했다.

처음으로 직접 개를 기른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혼자 살던 무렵이었다. 순백의 털빛이 고운 잡종으로 생후 2개월쯤 된 강아지였다. 망치라고 불렀다. 거실에 놓고 기른 망치는 이른 아침마다 작은 앞발 두 개로 방문과 문턱을 복복 긁었다. 그 소리를 한참 동안 듣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방문을 열면 망치는 냉큼 내 품에 안겼다.

품에 안는 일은 하루 두 번이면 끝이었다. 아침에 한 번 밤늦게 귀가할 때 한 번. 망치는 종일 집에 혼자 있었다. 그렇게 8개월을 지냈다. 망치와 같이 살았다고 할 수 없었다. 하루는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국회의원 선거 유세를 보러 갔었다. 그때가 망치를 데리고 외출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망치는 밖에 나오자 엄청 흥분했다.

안기 힘들만큼 난리를 쳐서 내려놓자 망치는 곧장 뛰기 시작했다. 나도 뛰었다. 몇 바퀴를 뱅뱅 돌았는지 모르겠다. 작고 연약한 망치가 발발거리며 쉬지 않고 뛰고 또 뛴다는 것이 놀라웠다. 유세로 시끄럽던 운동장이 잠잠해진 뒤에도 나는 망치를 쫓아 뛰고 있었다.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망치가 멈춰 섰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품에 안고 돌아오는데 망치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색색 숨을 내쉬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집에 와서 잠자는 망치를 내려놓자 정신이 산만했다.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곯아떨어진 망치를 바라볼 때마다 싱숭생숭했다. 자정이 가까웠을 무렵 나는 전화를 했다. 서울 외곽에 사는 선배였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초인종이 울렸다.

선배는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와서 잠자는 망치를 보았다. 좋아했다. 일사천리였다. 망치를 태운 차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에도 나는 그냥 집 앞에 서 있었다. 망치는 선배가 사는 집 마당에서 뛰어놀 것이고 언제나 가족과 같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집엔 애견 한 마리가 있다니 망치는 심심할 노릇도 없을 터였다.

그로부터 두 해쯤 지나 선배 가족과 등산을 갔었다. 마침 선배가 망치를 데리고 왔다. 한 손에 들어올렸던 가볍고 하얀 망치가 아니었다. 덩치는 서너 배 정도 컸고 털은 무성한 회색빛이었다. 나를 본 망치는 꼬리를 흔들기는커녕 다가오지도 않았다. 심드렁하게 바라만 보았다. 나는 개를 키우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자는 대로 할 거지?

아내는 울고 있었다. 밤늦게 귀가해서 방문을 열자 고개를 돌린 아내 두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내는 언제든 출가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 혼자 불안하게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소리 없이 울던 아내는 점점 소리 내서 울었다. 죽었어…, 뭐가? 방심했더니…, 뭐가? 그 개….

아내는 유기견 커뮤니티의 회원이었다. 어느 날 개 한 마리를 입양하자고 제안했었다. 나는 반대했다. 아내는 수시로 사이트에 올라온 개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구조자와 임시보호자의 손을 떠난 개는 수용시설에 가 있었다. 그곳에선 기한을 정해두고 있다가 입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를 시킨다고 했다. 내 반대는 여전했다.

아내의 날수 계산에 따르면 그날은 개가 안락사된 지 딱 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날마다 게시판에 들려 입양을 권하는 글을 올리던 아내는 며칠간 그 생각을 놓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한편으론 안심했고 한편으론 여전히 불안했다. 그런 개들이 많을 텐데 딱 그날 안락사 시킨다는 보장은 없잖아? 내일 가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 아내는 안락사를 기다리던 이 개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고미.
ⓒ 김종휘
아내는 울음을 뚝 그쳤다. 정말?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거지? 아내는 거듭 확인했다. 그런 다음 나를 꼭 껴안아 줬다. 다음날 아내는 임시보호자와 동행해서 그곳에 갔고, 안락사가 미뤄지느라 용케 살아남아 있던 개를 데려왔다. 콧물을 고드름처럼 덕지덕지 달고 집에 온 개는 부들부들 떨면서 두 눈을 껌벅였다. 냄새가 지독했다.

그 개에게 나는 고미라는 이름을 붙였다. 약간 야생미가 감도는 생김새에 털이 뻣뻣한 잡종 고미는 첫눈에 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약한 냄새는 목욕으로 없앴지만 7kg이 조금 넘는 어중간한 몸집의 고미에게 정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고미(gom)는 티벳트 말로 명상, 직역하면 '친해지기'라는 뜻이었다.

결혼 두 해 전까지 아내는 솔이라는 개와 같이 살고 있었다. 처가 식구들은 솔이를 끔찍이 아끼며 지냈다고 했다. 생후 3개월 때 이웃에게 분양받은 솔이는 처가에서 3년을 살았다. 솔이의 급작스런 안락사가 있던 그날, 울먹이는 전화를 받은 나는 한강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2월이었고 바람은 찼으며 사방은 갈대였다.

솔이는 2살 때 홍역에 걸려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가족은 동물병원을 순례했고 침술로 장애견을 고쳤다는 대전 어딘가를 다녀오기도 했었다. 앞 다리로 몸을 끌고 다녀야 했고 용변도 가릴 수 없게 된 솔이를 가족 모두 안쓰러워했다. 그날 하루 솔이가 나아지면 뛸 듯이 기뻐하고 그날 하루 솔이가 힘겨워하면 같이 애달퍼 하는 가족이었다.

사건은 장인이 솔이를 들고 집을 나간 다음에 생겼다. 장인은 그 길로 병원에 가서 가족 동의 없이 솔이를 안락사시켰다. 소식을 접한 아내는 경악했다. 장모도 처남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간신히 찾은 아내는 한강변의 갈대 언덕에 앉아 찬바람을 맞으며 울고 있었다. 아빠가 원망스럽다고, 엄마가 불쌍하다고, 솔이가 보고 싶다고, 울고 있었다.

2월 그날이 오면 아내는 솔이 사진을 작은 상에 올려놓고 향을 피운 다음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아내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내의 방에 작은 상이 있고 솔이 사진이 세워져 있으면 바로 그날이었다. 아내는 2월 그날을 전후해서 유기견 사이트를 집중 방문했고, 안락사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 개를 발견한 다음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미뤄진 안락사와 아내의 애정 덕에 목숨을 구한 고미가 우리 집에 온 것은 3월이었다. 망치와 8개월을 지낸 이후 10년 가까이 개와 인연을 만들지 않았던 나에게 고미는 첫 번째 반려 동물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개를 기를 마음이 없었고 처음부터 고미를 반긴 것도 아니었지만, 아내가 불러들인 고미와 한 세월 같이 살게 되리라 작심은 하고 있었다.

"개가 젤로 힘들겠구만"

개가 젤로 힘들겠구만.

고미와 아내 셋이서 하루 30km 남짓 걸었던 첫 열흘간 그런 말을 들었다. 바닷가 마을의 할아버지나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길이라도 물으면 꼭 그런 소리를 들었다. 당시에는 하루 7시간 안팎으로 내리 걷는 것이 고미에게 얼마나 무리였는지 몰랐다. 고미에게 나는 무조건 걷자고 끌고 다닌 무식하고 용감하며 성실한 주인이었다.

고미는 처음 며칠만 괜찮았다. 나는 내심 개와 동행하는 바닷길 도보 여행을 근사하게 생각했었다. 속초에서 출발할 때 고미는 활기차 보였다. 바닷가를 걷는 고미가 멋있게 보이기도 했다. 그런 고미는 내가 사진 찍을 때만 잠깐 쉬었다. 쉴 때도 5분을 넘지 않았다. 그렇듯 내처 걷는 나를 따라서 고미는 힘겨운 날들을 견뎌야 했다.

둘째 날부터 간간이 비가 뿌렸다. 굵은 비도 종종 쏟아졌다. 아내는 고미를 걱정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내의 염려가 심해지자 나는 슈퍼에서 비닐봉지를 가져다가 자르고 붙여서 고미의 우비와 장화를 만들었다. 비닐 장화는 걸은 지 10분도 못 가서 훌러덩 벗겨졌다. 우비는 고미를 더 떨게 만들 뿐이었다. 비닐 장화와 우비는 엉터리였다.

▲ 아내는 나보다 고미를 더 자주 안고 걸었다.
ⓒ 김종휘
비를 맞으며 어느 항구에 이르렀을 때 아내는 폭발했다. 우리는 발발발 떠는 고미를 안고 버스에 올라 강릉의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혀를 찼다.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고 발바닥엔 습진이 심하다며 주사를 놓고 발에 약을 발라주었다. 그날은 일찍 여관에 들어갔다. 고미는 줄곧 누워있었지만 자지 않았다. 고미는 우리가 자야 눈을 감았다.

다음날은 다행히 개어 있었다. 아내의 걱정은 여전했고 나는 괜찮을 거라고 주문 외듯 우겼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걸은 고미는 닷새째부터 잠깐 멈추기라도 하면 바로 뻗었다. 잠시 쉬면 길바닥에 퍼져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흔들어 깨우면 눈만 껌벅일 뿐이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고미를 들어 품에 안고 조용히 앞서 걸었다.

2차 바바 여행 이후 고미를 애견 카페에 맞기고 아내와 둘이 걸었다. 배낭에서 고미 사료를 빼낸 것만으로도 나는 홀가분했으나 아내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아내는 입양한 지 얼마 안 된 고미를 낯선 곳에 맡겨두기를 몹시 꺼렸었다. 새 주인도 자신을 버린 건 아닐까 불안해할 거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는 말밖에 할 줄 몰랐다.

하나 바닷가 어디를 가도 개는 빠짐없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고미를 걱정했다. 잘 지낼까? 괜찮을 거야. 아내는 괜찮지 않았다. 바닷가의 개들은 거의 다 쇠줄에 묶여 있거나 개장에 갇혀 있었다. 주인은 일하러 나가 돌볼 이 없어진 개들이었다. 종일 같은 장소에 축 늘어져 있는 개를 볼 때마다 아내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발리 섬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아내와 나는 쇠줄에 묶여있거나 갇혀 있는 개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거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개들은 주인이 다 있다고 했다. 발리의 개들은 아침 일찍 거리로 나와 곳곳을 돌아다니며 배를 채우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온다고 현지 가이드는 설명했다. 개들의 천국 같아서 발리가 좋아졌다고 아내는 활짝 웃었다.

샤머니즘과 결합된 힌두이즘의 발리는 신들의 천국이라는 말처럼 크고 작은 무수한 사당을 모시고 있었다. 그곳엔 늘 차낭(canang)이 있었다. 차낭은 코코넛 잎으로 만든 작은 상자로 그 안에는 신께 바치는 꽃과 음식과 향이 있었다. 개들은 언제든 차낭의 음식을 먹었고 사람은 발길질하지 않았다. 신들의 천국은 개들의 천국이기도 했다.

이 땅의 바다 삼면을 거닐면서 만난 개들은 사정이 달랐다. 정작 주인이 있는 개는 묶이거나 갇혀서 옴짝달싹 못한 채 혼자 쓰러져 지냈다. 먹고 자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개. 반면 사람에게 버려진 개들은 먹이를 찾아 해변과 마을을 뒤지고 다녔다. 배부른 개는 외로웠고 자유로운 개는 굶주려 있었다. 아내는 개만 보면 다가가 어루만졌다.

여름 끝나면 개 천지요

동해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텅 빈 바닷가를 거닐다가 인근 슈퍼에 들렀을 때였다. 중년의 남자 주인은 작은 장애견을 키우고 있었다. 아내가 반색하며 개를 안자 대화가 오갔다. 놀러 올 때 그렇게들 개를 데리고 오더니, 갈 때는 왜 버리고 가나 몰라. 주인 말로는 여름 바캉스철이 끝나면 버려진 개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닌다고 했다.

키우는 장애견도 휴양객이 버리고 간 유기견이었다. 어느 날엔가 슈퍼 앞에 죽치고 있길래 하루 이틀 지켜보니 걷지 못하는 개였단다. 아내는 주인에게 말했다. 모든 개는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덕 쌓으시는 거라고. 그러자 주인은 씩씩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저그 사는 할머니는 그런 개 9마리 기르는데, 그 할머니 성불했겠네.

동해 끝자락의 어느 항구였다. 그날따라 늦게 숙소를 정하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나왔다. 골목을 지나 노래방 앞을 지날 때 개 한 마리가 쫓아왔다. 몹시 더러웠다. 식당 앞까지 따라온 개는 어느새 사라졌다. 숙소로 가려고 그 노래방 앞을 지나칠 때였다. 어디선가 그 개가 다시 나타나 쫓아왔다. 아내는 개를 보더니 편의점에 갔다 온다며 뛰어갔다.

▲ 어느 항구 골목에서 만난 이 개를 아내와 나는 열심히 씻겼다.
ⓒ 김종휘
아내는 캔 사료 한 개를 들고 돌아왔다. 뚜껑을 따서 내려놓자 개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배고팠지? 천천히 먹어. 개는 금세 다 먹고는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개의 머리와 몸통을 부드럽게 만져주며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개를 안았다. 뭐해? 목욕시키자. 좋아! 우리는 개를 데리고 여관에 들어갔다.

개는 얌전했다. 뭉친 털은 가위로 잘라내고 구석구석 박박 씻기는 데도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아내는 헤어 드라이기를 빌려와 개를 말렸다. 은빛 털이 보송보송한 예쁜 개였다. 나이가 많이 든 개야, 새끼도 여럿 낳았을 거야, 이제 개운하지? 아내는 개를 껴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개를 다시 노래방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러자 개는 잠시 우리를 올려보더니 경쾌하게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오물의 신 같았다. 센의 돌봄으로 깨끗이 목욕한 오물의 신이 강의 신 본래 모습을 되찾고 승천했던 것처럼 그 개도 신(神)일지 몰랐다. 아내와 나는 캔 사료를 두 개 더 사서 노래방 앞에 놓았다. 그날 밤 아내와 나는 신이 났다.

4차 바바 여행부터 아내는 집에 남았다. 고미를 계속 애견 카페에 맡기는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내친김에 아내는 나를 설득해 유기견 한 마리를 더 데려왔다. 고미 혼자면 외로우니 친구나 동생처럼 지낼 개가 필요하다는 것. 해서 입양한 개가 보기(bog)였다. 나중에는 복땡이라고 불렀는데 이름 뜻은 복(福)이었다.

고미와 아내와 나에게 복이 되어달라고 붙인 이름이었다. 실제로 보기가 집에 오고 난 뒤부터 아내와 고미는 눈에 띄게 안정감을 찾았다. 보기는 집에 온 첫날부터 고미는 감히 올라가지도 못했던 소파에 뛰어올라가 떡 하니 낮잠을 잤다. 제 집처럼 알아서 욕실을 찾아가 용변을 봤고 시종 활기차게 놀았다. 덕분에 나도 일이 많아졌다.

▲ 비오면 이런 엉터리 우비를 입혀서 고미를 데리고 걸었다.
ⓒ 김종휘
고미는 실내에 있으면 죽어라고 용변을 보지 않았다. 무조건 밖에 나가 흙이나 풀이 있는 곳에 가야 쌌다. 반면 보기는 밖에 나가선 절대 용변을 보는 일이 없었다. 실내로 들어와야 하고 그것도 패드가 깔린 욕실에 가야 일을 봤다. 바바 여행을 끝낸 뒤부터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고미 보기와 산책하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하나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못했다. 바바 여행을 모두 마치고 고미 보기와 뒤늦게 본격적인 동거를 시작하자 꽤나 고달팠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한 나에게 두 녀석은 끊임없이 들이댔다. 같이 놀자고, 서로 살을 비비자고, 손과 발을 핥아대고, 빨랫감을 물고 늘어지고, 무엇보다 아내와 껴안고 있으면 집요하게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는 녀석들에게 화를 잘 냈다. 집을 비웠다 돌아오면 거실엔 우리의 신발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집안 모서리 부분의 벽지는 다 뜯겨 나갔다. 앉은뱅이 나무 탁자는 곳곳이 패였다. 가끔 전선도 물어뜯었다. 리모컨에는 이빨 자국이 무수히 찍혔고 잊을만하면 한 개씩 CD를 박살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는 조금씩 고미 보기에게 익숙해졌다.

고미를 통해 명상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보기를 통해 오라고 빈 복도 금방 느끼기 힘들었다. 평화는 서서히 왔다. 고미와 보기가 내 의중을 알아채는 것보다 내가 녀석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 훨씬 더디다는 점을 인정한 다음이었다. 내가 고미와 보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녀석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더 일관되고 극진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뒤였다.

▲ 아내는 모든 개들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 김종휘
아내 없이 간 4차와 5차 바바 여행 중에도 수없이 개를 만났다. 고미도 없고 아내도 없었지만 나는 해변에서 마주치는 개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묶여 있는 개를 보면 잠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고 거리의 개를 보면 과자를 꺼내주었다. 바닷가에서 만난 어느 개도 나를 피하지 않았다. 바다 앞에서 모든 개는 외로워 보였다.

그래도 고미와 함께 걸었을 때가 좋았구나 하고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고미를 데리고 걸은 게 아니라 고미가 우리를 데리고 걸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고미는 나와 아내의 제각각 보행을 미묘하게 조율하며 걸었다. 둘 중 하나가 멀어지면 고미는 딱 멈춰 섰고 덩달아 우리는 서로를 기다렸다가 같이 출발했다.

혼자 걷는 동안 개만 보면 모든 개가 불성을 갖고 있다는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개로 태어난 것을 전생의 부덕 탓으로 돌리는 사고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이자 어리석은 논리라고도 말했다. 휴머니즘 외부에서 개를 보는 것. 사람과 개가 서로를 도와주는 것, 그러면서도 각기 저답게 서로를 만나는 것. 어려운 생각이었다.

선뜻 공감하지 않자 아내는 자신이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나면 어쩔 거냐고 했다. 때문에 너는 다음 생에 또 사람으로 태어나도 개를 잘 대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숨이 붙어 있는 모든 생명이 다 외로운 것이라서 서로 정성껏 보살피며 위안을 나누는 것이 잘 사는 거라고 아내는 나를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내가 자주 틀릴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술 마신 날이면 집에 와서 고미와 보기 배에 코를 박고 마구 비비는 음주 습관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고미 보기가 내게 와 전날 애정 공세에 화답하듯 몸을 비벼대면 나는 심드렁하게 돌아가 있었다. 귀찮아서 팔로 밀어내기만 했다. 그렇듯 나는 개와 더불어 살기엔 여전히 어설픈, 딱 그 수준의 인간이었다.

▲ 아내도 고미도 나도 바다 앞에서 단잠을 잤다. 같은 꿈을 꾸었을까.
ⓒ 김종휘
고미와 동행한 동해안의 어느 전망 좋은 장소였다. 나무로 만든 바닥에 우리 셋은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하늘은 화창했고 바람은 미풍이었으며 파도 소리는 음악처럼 들려왔다. 아내와 나는 한 손을 잡고 누웠고 고미는 그 사이에 몸을 붙이고 누웠다. 10분을 잤을까 20분을 잤을까. 그 잠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만큼 달콤했다.

아내가 잠깐 손을 꼼지락대면 그 움직임이 내 손을 타고 심장 속으로 들어와 부드러운 공명을 일으켰다. 고미가 약간 몸을 뒤척이기라도 하면 그 촉감이 내 몸 구석구석에 번져 편안하게 나를 감쌌다. 분명히 잠을 자고 있는데도 아내는 아내대로 고미는 고미대로 그렇게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 존재감이 너무 달았다.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기억이 없다. 우리 셋은 주섬주섬 나란히 일어났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새파란 바다를 다 같이 바라보았다. 정말 좋다-. 아내는 기지개를 켜며 아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좋다-. 나도 정말 좋았다. 그 짧은 낮잠 동안 난 꿈을 꾸었다. 꿈에서도 우리 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넌 무슨 꿈을 꾸었니? 고미는 말이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연재글은 6월 말 도서출판 샨티에서 <아내와 걸었다, 바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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