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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는 다는 건 성숙되어지는 것, 성숙된다는 건 떨어짐을 준비하는 것...
익는 다는 건 성숙되어지는 것, 성숙된다는 건 떨어짐을 준비하는 것... ⓒ 김현

퇴근길, 모처럼 산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늘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 어쩌다 차를 놔두고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출근하는 것도 좋지만 퇴근길에 흙을 밟으며 느릿느릿 걷는 건 더욱 좋습니다. 아침엔 바쁜 마음에 바쁜 걸음으로 걸어야 하기 때문에 주변을 바라보거나 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퇴근길엔 느긋하게 늑장도 피우고 해찰도 해가며 이것저것에 눈길을 주기도 합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산딸기가 눈에 보입니다. 산딸기가 익는 오월이면 어린 딸, 아들과 함께 와 따먹곤 했습니다.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산딸기를 따먹다 가시에 찔리기도 했지만 따먹는 재미에 아픈 줄도 몰랐었습니다.

빨갛게 익는 산딸기를 한 알 따서 입에 넣어봤습니다. 달콤한 맛이 입에 돕니다. 그 옆에 아직 덜 익은 것을 따 입에 넣어봤습니다. 시큼합니다. 먹다 말고 퉤퉤 뱉어내는 모습을 산책 나왔던 한 노부부가 보고 웃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혼자 산딸기를 따먹는 모습도 우스운데 퉤퉤거리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는가 싶어 딴전을 피웠습니다.

ⓒ 김현

산딸기를 보고 있으려니 아픈 기억이 생각납니다. 내가 군에서 막 제대하고 얼마 안 있어 막내 삼촌이 갑자기 떠났습니다. 죽기 하루 전까지 열심히 직장에서 일했던 삼촌은 술 한 잔 마시고 잠을 잤는데 그날 밤 자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삼촌의 나이가 사십대 초반, 지금의 내 나이 때쯤입니다.

삼촌에겐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때 큰 애인 딸이 여덟 살, 작은 애인 아들이 여섯 살이었습니다. 삼촌을 경기도의 한 천주교 공동묘역에 묻는 날, 그때가 오월 중순이었습니다. 삼촌을 땅에 묻은 다음 한줌의 눈물을 뿌려놓고 오는데 아이(동생)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두 꼬맹이 녀석은 친척 형들과 산딸기를 따먹고 있었습니다. 슬픈 것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두 녀석은 크고 굵은 산딸기를 두 손에 한 움큼 들고 내게 내밀었습니다.

"오빠, 이거 맛있어. 오빠도 먹어 봐."
"형아, 내 것도 먹어."

그때 난 두 녀석이 내민 산딸기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받아 입에 넣었습니다. 정말 달콤하고 맛이 있었습니다. 이게 산 자의 모습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지만 정말 맛이 있었습니다. 난 어린 두 동생에게 산딸기를 한 움큼 따주었습니다. 그리고 먹기도 했습니다. 두 동생의 입언저리엔 빨간 산딸기 물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쯧쯧 혀를 찼습니다. 이제 아비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 김현

산딸기를 바라보며 두 동생에 대한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쯤 되어 숙모는 시가 식구들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재가를 했습니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겨 두 동생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쯤 이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려니 생각이 들면서도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그 궁금함을 가지고 있는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일곱 형제 중 맏이였던 아버지에게 남은 형제라곤 고모 한 분뿐입니다. 남동생들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지막 남은 막내 동생마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아버진 말 없는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어 당신 조카들의 소식이 궁금한지 술 한잔 하시면 넌지시 내비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낸 적은 없으십니다.

다시 길을 따라 걷습니다. 이름 모르는 꽃이 피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게 있습니다. 산길 따라 피는 꽃들을 보면 오월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흰 꽃들입니다. 4월엔 진달래, 철쭉 같은 붉은 꽃이 산야를 덮는데 오월엔 찔레꽃, 산딸기 꽃 같은 것들이 많이 핍니다. 물론 제비꽃 닮은 앙증맞은 싸리 꽃이 수줍은 듯 숨듯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하지만 유독 작고 무리지은 흰 꽃이 많음을 봅니다.

ⓒ 김현

한 발 한 발 느리게, 아주 느리게 걸음을 떼면서 솔잎 하나를 따 입에 뭅니다. 산길을 걸을 때마다 하는 버릇입니다. 그렇게 솔잎 하나 입에 물고 걷는데 저만치서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찔레꽃을 바라보면 찔레꽃에 얽힌 슬픈 이야기도 떠올려봅니다.

그러고 보면 꽃이건 사람이건 다 그 나름대로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가 봅니다. 그런데 그 사연이라는 것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보면 추억이 되고 전설이 되기도 하는 가 봅니다. 허면 지금도 어디에선가 먼 훗날 추억이 되고 전설이 될 수 있는 수많은 사연들이 일어나고 있겠지요.

슬픈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찔레꽃
슬픈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찔레꽃 ⓒ 김현

#산딸기#삼촌#철 없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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