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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건만

속리. 속세를 떠난다는 것. 속세를 떠나든 속세를 벗어나든 세상을 멀리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언제든지, 마음 내키기만 하면 복잡한 세상사를 훌훌 털어버린 채 풍진세상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공간을 세간과 출세로 구분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오늘 속리를 결심한다. 어젯밤 잠결에 청산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숲안에 이미 수십 만 아니 수백 만의 중생이 와서 떼메가고도 남을 울울창창창한 그늘을 만들어 놓았으니 어서 와 쉬라는 얘기를 꿈결처럼 들었던 것이다. 해야 할 일이야 어디 한두 가지 뿐이겠는가마는 쌓이고 쌓인 마음 속 먼지 닦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오랫만의 탈속을 망설이겠는가.

옥천을 지나자 금세 말티재(해발 850m)에 닿는다. 차는 터덕거리면서 굽이굽이 재를 올라간다. 올려다 보면 숨가쁘고 내려다 보면 아찔한 곡선의 고개이다. 때로는 직선보다 곡선이 더 무서울 수도 있구나. 내 중얼거림을 말티재가 알아듣고 속세를 떠나는 일이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고 핀잔을 준다. 신라 때 사람 최치원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도불원인인원도(道不遠人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진리를 멀리하려 하고
산비이속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말티재여, 너는 일부러 세속을 멀리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너를 멀리했을 뿐이라고 말하지 마라. 네 몸이 이렇게 높고 험하니 사람들이 어찌 너를 여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정이품송 옆을 지나다 잠시 차에서 내려 지난 십년 간 이 소나무의 이력을 살펴본다. 옛 풍모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가지가 많이 상했다. 애써 정이품송을 위무한다, 정이품송이여, 그까짓 상처에 주눅들지 마라. 상처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백년도 살지 못하는 사인간들의 일이지, 천년을 사는 네가 어찌 샛바람 따위에 울고 웃겠느냐.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을 향해 걸어간다. 절로 가는 진입로가 꽤 길다. 계룡산 갑사만 오리숲이 아니라 속리산 법주사 들머리도 오리숲이다. 절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길수록 마음도 따라서 그윽해진다. 말발도리꽃 몇 송이가 길섶에까지 나와 길손을 반긴다. 범의귀과에 속하는 하얀 꽃이다. 속리말발도리라는 별칭도 있는 걸 보면 이곳이 고향인 나무인가?

저만치 스님 두 분이 걸어가고 있다. 도반이란 함께 길을 걷는 짝이다. 다들 초등학교 운동회 때 겪어봐서 아는 일이지만 2인3각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다리 하나를 줄인 빈 곳에 허약한 마음 하나를 놓아야 하는 경기다. 도반이란 그렇게 인생이란 경기를 2인3각으로 묶어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다. 삶이 힘들 때마다 날 가장 부럽게 했던 말이 도반이란 말이었다.

국보 제55호 팔상전. 우리나라 유일한 5층 목조탑이다.
국보 제55호 팔상전. 우리나라 유일한 5층 목조탑이다. ⓒ 안병기
수정교를 건너면 금강문에 이르고 천왕문을 거쳐서 팔상전에 이른다. 동선은 숨 가쁜 일직선이다. 직선은 활이다. 마음을 팽팽하게 잡아 당긴다. 한 순간도 곁눈 팔 틈을 주지 않는 직선이 나그네의 마음에 긴장을 갖게 한다. 천왕문을 넘어서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인 팔상전이 보이고 그 뒤로 거대한 가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주사는 A.D.553년 의신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후 진표 및 영심 스님 시절의 중창 등 8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팔상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을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춤추는 여인의 소매자락처럼 날아갈 듯 아름다운 추녀. 그 끝에 살짝 악센트를 주듯 매달린 풍경들. 석탑의 보주처럼 쭈욱 뻗어 올라간 사모지붕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전각에 팔상전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에서부터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장면까지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를 사방 각면에 두 폭씩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팔상도 앞 불단에는 각각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 앞에 3줄로 모셔져 있는 작고 하얀 오백나한상이 무척 귀엽다.

17c 선비 정시한(1625~10707)이 쓴 사찰 순례기인 <산중일기>는 팔상전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말을 달려 법주사 큰 절에 닿았다.절은 수정봉 밑에 있는데 땅이 고르고 평평하다. 말을 내려 제3문을 들어서니 구리로 만든 기둥(*철당간)이 있는데 높이가 7~8길쯤 된다. 여러 전각과 요사를 지나니 오층으로 된 각(*팔상전)이 있고, 그 안에 여덟 분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층에는 미륵불상이 모셔져 있다. 그 높이가 매우 커서 장관인데 일찍이 못 보았던 것이다. 또한 나머지 세 층마다 전부 불상이 모셔져 있다. - <산중일기> 198쪽, 1687.10.5치 일기

420년 전의 팔상전의 모습과 지금과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멘트불→ 청동대불→금동대불로 유전을 겪고 있는 대불. 그 옆 사모지붕을 한 작은 건물 안에  모셔진 것이 희견보살이다.
시멘트불→ 청동대불→금동대불로 유전을 겪고 있는 대불. 그 옆 사모지붕을 한 작은 건물 안에 모셔진 것이 희견보살이다. ⓒ 안병기
팔상전을 나와서 미륵도량인 법주사를 상징하는 거대한 금동대불 쪽으로 다가간다. 시멘트불로 시작해서 청동대불을 거쳐 금동대불이 되기까지 숨 가쁘게 불상 유전을 겪고 있는 특이한 부처다.

1964년에 시멘트로 조성한 것을 붕괴 직전에 이르자 1990년에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혔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간 거대한 불사다.

아는 사진작가에게서 자신의 남편이 이 개금불사를 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공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8억이나 손해를 봤는데 그후부터 돈이 잘 벌리더라면서 아마도 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모양이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이 금동대불은 터무니 없이 크다. 나는 올려다 보는 풍경보다 내려다 보는 풍경을 좋아한다. 올려다 보는 풍경은 내려다 보는 풍경과 달리 평화스런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거대한 구조물은 은연중에 사람을 억압한다. 비록 순간일망정 마음의 평화를 얻으러 왔다가 도리어 마음의 억압을 느낀다면 억울한 일이 아닐까.

통증없이 어찌 참회를 입에 담을 수 있으리오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상.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상. ⓒ 안병기
금동대불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희견보살상이라 부르는 입상이 서 있다. 머리 위에 두꺼운 판석을 이고 그 위에 다시 커다란 그릇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이 입상을 희견보살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수제자였던 가섭 존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희견보살은 통상적으로 단정한 모습에 왼손에는 깃발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반해 이 입상은 괴기스런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상의 명칭을 뭐라 부르든 난 이 입상을 희견보살이거니 여기고 그리 대한다. 이 보살상을 볼 때마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여지껏 보았던 어떤 불상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전율과 감동을 받는다.

희견보살이여. 당신이 육신에 가하는 극한의 고통이 보잘 것 없는 이 중생에게도 전해지이다. 어찌 통증없이 참회를 입에 담으리오. 언어를 넘어선 당신의 진정성이 불초 중생을 무한한 부끄러움으로 이끄나이다.

보물 제916호 원통보전.
보물 제916호 원통보전. ⓒ 안병기
사모지붕이 아름다운 원통보전을 향해 간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측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건물이다.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원통전이란 관세음보살을 모신 집을 뜻한다. 전각 안에는 앉은 키만 2.8m된다는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셔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적절한 비례를 한 불신에 원만한 얼굴이다. 소리란 본래 귀로 듣는 것이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바라본다. 관세음보살은 소리를 바라보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무슨 상념에 잠긴 것일까.

국보 제5호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 쌍사자 석등. ⓒ 안병기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인 쌍사자석등이 서 있다. 중대석을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이다. 사자여. 석등을 모시느라 고생이 많구나. 그렇지만 좀 더 굳건하고 확실하게 양련석을 받들었으면 좋겠구나. 어째 화사석 안의 불빛이 자꾸 흔들리는 듯 하구나.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사자의 눈이 점점 더 커지고 둥그래진다. 머리의 갈기가 쭈볏해지고 몸체의 근육이 불끈 솟구친다. 둥근 앙련석을 받들고 있는 두 마리 사자의 조각이 매우 힘차고 정교하다.

대웅보전 앞 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
대웅보전 앞 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 ⓒ 안병기
대웅보전 앞에도 높이 3.9m에 이르는 또 하나의 석등이 있다. 넓적한 돌 네 장을 맞춰서 네모지게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의 기대석을 놓았다. 화사석 8면 가운데 앞 뒤 양면 4면에 화창이 뚫려있고 나머지 4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 새김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악귀를 밟고 선 사천왕상이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다.

보물 제 915호 대웅보전.
보물 제 915호 대웅보전. ⓒ 안병기

대웅보전 기단에 앉아있는 2개의 사자상 가운데 하나.
대웅보전 기단에 앉아있는 2개의 사자상 가운데 하나. ⓒ 안병기
대웅보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인 2층 건물이다. 높이가 19m에 이르는 거대한 건물이다. 대웅보전 기단에는 2개의 사자상이 있다. 사자는 몸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팔 다리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사자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나른한 봄볕에 졸고 있는 중인가. 할을 외치면서 죽비로 사지의 어깨를 내리치면 사자가 금방이라도 깨어나서 우레같은 울음을 토해낼 것 같다.

대웅전에 가보니 역시 이층으로 되었는데 삼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전부 해인사보다 큰데, 다만 원광이 없다. - <산중일기> 198쪽

바깥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서보면 위 아래 층이 한층으로 트여 있다. 안에 앉아 있어도 전혀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대웅보전이란 이름과는 달리 안에 모신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본래 대웅대적광전이라 불렀는데 흥선대원군 시절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미륵장륙존상을 헐어갈 무렵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수정교 아래 계곡 풍경.
수정교 아래 계곡 풍경. ⓒ 안병기
금강문 왼쪽에 자리한 보물 제216호 마애여래의상을 보기 위해 천왕문을 빠져나온다. 도중에 철당간 지주를 살펴보고나서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석연지를 들여다 본다. 석연지는 높이 2m, 둘레가 665c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다. 이게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물 제216호 마애여래의상 앞으로 다가간다. 의상이란 보통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이 마애불은 의자 대신 연화대좌 위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양식상의 특징으로 미루어 미륵불이 아닌가 싶다.

전체 높이는 5m로서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꾹 다문 입술에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사실성이 부족하긴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반드시 반가사유상이 아니라도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생각한다는 건 삶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도 2가지 음각이 있다. 짐을 싣고 있는 말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그 하나이다. 이 음각은 법주사의 창건주인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조각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음각은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였던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법주사로 오는 도중에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마애여래의상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금오선사 부도가 있다. 금오 태전(1896∼1968) 스님은 근래 법주사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스님의 법을 이은 상좌로는 월산, 범행, 탄성, 혜정, 월주 스님 등이 있다. 한국불교 현대사의 큰획을 그으신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다.

경내 구경을 끝내고 나서 금강문을 나온다. 오랫만에 발걸음을 했는데 이대로 돌아가자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잠시 수정교에 멈춰서서 계곡을 바라본다. 수천 개의 작은 돌탑들이 계곡에 가득하다. 오늘 내가 법주사에서 본 것은 한결같이 거대한 것들 일색이었다. 그것들에 비하면 저 돌탑들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소박한가. 불법이 상주한다면 법주사 경내보다는 차라리 이 계곡에 상주하리라.

'속리' 는 '망속(忘俗)'이다

오리숲을 걸어나오다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서 짧은 편지를 쓴다. 이 편지가 상대에게 닿으려면 적어도 몇 억 광년은 족히 걸리리라.

언제나 삶에 열심인 k.
오랫만에 속리산 법주사에 다녀 갑니다. 실로 10년만의 발걸음입니다.

10년 전, 저는 법주사를 들른 다음 곧바로 속리산 문장대에 올랐었지요. 그리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매점에서 포장 용기에 담긴 라면 한 그릇을 사서 뚝딱 비웠습니다. 이렇게 높은 산 위에서 라면을 맛보는 것도 속세를 떠난 맛이 아니겠느냐고 우쭐대면서.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가 마치 땅의 높고 낮음에라도 있는 듯이 착각한 것이지요. 그때를 생각하니 실실 웃음이 납니다.

법주사를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불법이 머무르는 절이라는 뜻일 겁니다. 불법이야 이 세상 처처에 머무르지 않는 곳이 있을까마는 구태여 이 절을 불법이 머무는 절이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무엇일는지요? 이 가람이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가진 속리산 자락에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이곳의 수려한 풍경은 절로 속세를 잊게 합니다. 저는 '속리'라는 걸 문자에 얽매인 나머지 몸을 떠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속세 아닌 곳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는 속세고 여기서부터는 속세가 아닌 출세간이다 라고 경계를 지우는 것은 쓸데없는 분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속리'의 뜻을 '망속(忘俗)'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세속의 일일랑 잠시라도 잊으라. 어쩌면 이런 저의 해석이 속리의 뜻을 너무 하찮게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만 세속을 잊음과 세속을 등짐이 불이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곳에 오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속세를 잊게 됩니다. 속리산의 수려한 경치와 함께 미륵과 더불어 대원을 세워 이곳에 불국토를 만들고자 했던 옛 스님들이 품은 이상의 자취를 따라 가다보면 저절로 이속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더군요.

그대도 언제 시간을 내서 법주사에 한 번 다녀가세요. 일에 파묻혀 사는 그대가 많은 일을 버려둔 채로 와야 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단호하게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영영 속리의 길을 걸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곧 부처님이 이 땅에 나투신 초파일이 앞으로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가까운 시일에 이곳에 와서 마음 속 티끌을 씻고 가시기를.

덧붙이는 글 | 5월 9일에 다녀왔습니다.


#속리산 법주사#희견보살#원통보전#쌍사자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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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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