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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만델 타운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날은 전날보다도 더 잔뜩 구름이 끼어서 우리의 마음까지 흐려지는 듯 싶었다. 하지만 오전에 드라이빙 크릭 레일웨이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장쾌한 풍경이 우리의 마음에까지 몰려드는 먹구름을 한방에 날려보내주었다.

우리는 유쾌한 기분으로 25번 도로를 타고 동쪽 해안으로 향했다. 이윽고 동서를 가르는 그리 험하지 않은 고개를 넘어서자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동쪽의 기상은 서쪽보다 훨씬 안 좋아서 비를 뿌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비는 심하지는 않고 간간이 뿌려대는 정도여서, 코로만델 반도의 아름다운 해변을 순례하는 우리의 여행을 그렇게 크게 방해하지는 않을 성 싶었다.

원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무인지경의 바닷가, 오피토 비치

처음에 들른 바닷가는 마타랑이 비치(Matarangi Beach)였는데, 그저 아늑하다는 느낌이 드는 평범한 바닷가여서 별 감흥이 없었다. 차를 돌려 나와서 다시 25번 국도를 타고 10여분 달리니 한때 금광으로 은성했다는 조그마한 마을 쿠아오투누(Kuaotunu)가 나왔다. 이 마을에서 우리는 25번 국도를 버리고 동쪽 해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평온한 잠을 자듯 단조롭게 달리던 차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차 뒤꽁무니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차체가 덜컹거리는 통에 엉덩이가 제법 아플 정도였다. 그런데도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를 달릴 때보다 더 신이 나는 것은 왜일까? 전날 저녁에 콜빌 잡화점 근처에서 만났던 비포장도로를 달려보지 못한 아쉬움을 여기서 달래는 것일까?

비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비포장도로의 왼편으로는 바다가 활짝 펼친 부채처럼 탁 트여 있어서 아내는 환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운전을 하는 나는, 때때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지기도 하는 험한 도로 사정 때문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진땀을 쥐어야 했다.

나는 바다 구경은 하나도 못하고 도로의 전방만 주시하면서 30여 분을 달린 끝에 아내와 딸아이를 오피토 해변(Opito Beach)에 내려놓았다. 거기에 닿는 동안 뒤따르는 차뿐만 아니라 마주 오는 차도 한 대도 없었으니, 아무도 사는 이 없는 정말 외진 곳이려니 나는 생각했다.

▲ 고적한 오피토 비치의 풍경
ⓒ 정철용
그런데 뜻밖에도 이쪽 산중턱에 낡은 집 한 채, 그리고 저쪽 바닷가 절벽쯤에도 근사한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낡은 집은 이 근처에서 소와 양을 방목하는 농장주의 집으로 보였고, 근사한 집은 돈 많은 부호의 별장쯤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외진 곳에 생활의 터와 휴식의 터를 마련한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도시의 이웃들처럼 서로 사이가 좋을까?

궁금한 마음에 멀리 그 두 집을 오래도록 응시하지만 사람의 움직임은 잡히지 않았다. 가까운 곳으로 잡아 당긴 내 시선에 대충 시멘트 블록으로 바람막이를 한 화장실과 나무로 만든 피크닉용 야외테이블이 걸려들었다.

'그렇지, 집이 있으니 길이 놓인 거겠고, 길이 놓였으니 놀러오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바닷가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고적감이 밀려들었다.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지 아내와 딸아이도 말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두 채의 집과 화장실과 야외테이블을 살짝 가린다면, 무인도의 해변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정도로 적막하고 호젓했다.

▲ 너무나 호젓해서 무인도의 해변으로까지 여겨지는 오피토 비치
ⓒ 정철용
고적한 바닷가를 기웃거리다가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리는 차 안으로 피신을 했다. 딸아이는 그만 가자고 했으나 위험한 길을 운전해서 가기에는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나는 모텔에서 준비해온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과 비상식량으로 챙겨 온 컵라면 세 개를 꺼냈다. 귀로는 빗방울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눈으로는 차창에 서린 뿌연 김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후후 입김을 불어가면서 컵라면을 먹었다.

컵라면을 다 먹고 비가 그쳐서 무인지경의 호젓한 바닷가를 떠나면서도, 나는 컵라면의 빈통을 화장실 옆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다. 때 묻지 않은 원시의 바닷가 오피토 비치에는 누군가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예의일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숨결이 서린 그림처럼 예쁜 바닷가, 쿡스 비치

우리는 비포장도로를 돌아 나와 다시 25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오래지 않아, 코로만델 반도에서 아름다운 해변들이 가장 많기로 소문난 머큐리 베이(Mercury Bay)가 눈앞에 펼쳐졌다.

머큐리 베이라는 이름은, 뉴질랜드 역사의 서장을 여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인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1769년 11월, 이곳 바다에 엔데버(Endeavour)호의 닻을 내리고 수성(水星, mercury)이 태양면을 통과하는 진기한 천체 현상을 관측했다는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하는 마오리족의 역사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서기 950년 경, 타히티섬의 전설적인 탐험가 쿠페(Kupe)가 이곳에 상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쿠페는 자신이 상륙한 곳을, '쿠페가 지나간 땅'이라는 뜻인 '테-피티앙아-아-쿠페(Te-Whitianga-A-Kupe)'라고 이름 붙였는데, 머큐리 베이의 중심지 피티앙아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 그림같이 예쁜 초생달 모양의 쿡 비치
ⓒ 정철용
우리는 그 지명이 뜻하는 대로 제법 번화한 피티앙아 거리를 그냥 '지나갔다'. 대신 그 맞은편에 있는 보다 한적한 해변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비구름이 우리를 쫓아다니는지 내내 비가 내려서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잠깐 비가 그친 사이를 이용해서 우리는 쿡스 비치(Cooks Beach)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인 셰익스피어 클리프(Shakespeare's Cliff)를 다녀올 수 있었다.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니 그림처럼 예쁜 초생달 모양의 아늑한 해변이 푸른 바다를 품고 있었다. 제임스 쿡 선장이 그 바다 어디쯤에 닻을 내리고 상륙했었기에 '쿡스 비치'라는 이름을 얻었을 터인데, 그보다 800여년 앞서 이 바닷가의 모래밭을 밟았을 쿠페의 행적에 나는 더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어서, 절벽 위에 만들어놓은 기념물에는 수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했던 제임스 쿡 선장의 행적만 기록되어 있었다.

▲ 제임스 쿡 선장이 태양면을 통과하는 수성을 이곳에서 관측했음을 기록해 놓은 기념물
ⓒ 정철용
오후 4시 30분 경, 근처 바닷가 마을인 하헤이(Hahei)의 숙소에 일단 체크 인을 하고 날이 개기를 기다렸으나 날이 다 저물고 나서야 비가 그쳤다. 일찍 하루를 마감하기가 아쉬워 저녁을 먹고 나서 홀로 바닷가로 나섰는데, 반갑게 나를 맞아주기라도 하듯 검은 구름장을 빗기고 둥실 보름달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보름달은 천년 전의 쿠페든, 이백 사십년 전의 제임스 쿡이든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였을 것이며 또한 앞으로도 오래 그러할 것이었다. 내가 오늘 본 아름다운 해변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거의 없을 터인데, 이백년 후 천년 후에도 과연 그럴 것인가? 스스로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구름이 다시 슬슬 보름달을 가리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9월에 다녀온 뉴질랜드의 코로만델 반도 여행기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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