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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세계 여성의 해를 맞아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30~40대 여성리더들에게 ‘여성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강연하고 있는 윤후정 명예총장. 이 논문은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향으로 여성운동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한국 여성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유엔 세계 여성의 해를 맞아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30~40대 여성리더들에게 ‘여성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강연하고 있는 윤후정 명예총장. 이 논문은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향으로 여성운동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한국 여성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 여성신문
1970년대 중반 크리스챤 아카데미 활동이 한국의 여성문제 해결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면 그 이론적 배경을 마련한 이가 바로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성학을 국내 최초로 이대 교양학부에 도입하는 단초를 만들어 대학원에 정식 석사과정을 개설함으로써 한국의 여성학이 세계의 여성학이 되도록 일찌감치 터를 닦아놓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젊은 교수 시절인 60년대부터 이미 그는 '가부장권'을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용감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당시 그는 "'가부장권(家父長權)'이란 '남성이 모든 소유권을 가진다'는 '부권(父權)', 남성이 모든 소유권을 갖고 다스리고 명령한다는 '부치(父治)', 그리고 남성쪽 혈통으로 가계를 계속 이어간다는 '부계(父系)', 이 세 가지를 뜻한다"며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존재는 무엇이냐"고 강한 의문을 표했다.

'지위향상·신장' 넘는 이론 마련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법대생 시절부터 가족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이후 가족법 개정운동에 참여하며 느꼈던 답답함이 그의 여성이론의 토대가 됐다. "여성차별 문제를 여성의 지위향상과 권익신장 입장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일반적인 시도가 영 시원치 않았다"는 것. "'신장'이란 의미 자체가 여기서 백보 더 가는 정도이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여성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줄 사상의 틀과 이론이 절실했다. 그가 가장 강한 의문을 가졌던 부분은 '선천적으로 남녀는 다르게 태어났고, 따라서 남자가 하는 일과 여자가 하는 일은 따로 있다'는 관념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여성관과 여성 이미지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이룬 성취에 대한 국내외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 중 '타임'지 등을 읽으면서 여성들이 가부장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여성문제를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그러다가 72년 6월 학위 취득 후 귀국해 헌법 기본권과 권력구조를 다루는 통치권에 대해 집중 연구하며 고민했다. 이 부분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여성으로선 내가 유일했을 것이다. 이때까지 권력구조와 기본권을 여성의 시각에서 깊게 보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특히 평등권을 연구하며 비로소 직접적으로 이를 여성문제와 결부시키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60년대 나름대로 의문을 가졌던 여성문제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성이론을 구사할 때 '여성 해방'이란 말을 쓰는 대신 이를 '여성의 인간화'란 표현으로 대체시켰다. 좀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선택한 용어이지만 전략적으로도 일반 남성들의 거부감을 많이 줄이는 효과를 봤다. 그의 여성이론은 74년 8월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의 초청강연을 통해 개화하기 시작했다.

9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설립자인 강원용 목사 부부(중앙), 정의숙 전 총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이화여고 시절부터 그와 인연을 맺어온 강 목사는 70년대 그의 여성운동 이론이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왼쪽 사진)
9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설립자인 강원용 목사 부부(중앙), 정의숙 전 총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이화여고 시절부터 그와 인연을 맺어온 강 목사는 70년대 그의 여성운동 이론이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왼쪽 사진) ⓒ 여성신문
학계·여성계 깨운 '여성운동이론'

74년 당시 경기도 수원 '내일을 위한 집'에서 열린 '여성운동지도자협의회' 모임에서는 워크숍과 함께 초청강연이 진행돼 30~40대 여성 리더들이 다수 참가했다. 그의 초청강연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당시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여성사회·산업사회·학생사회·종교사회 등 4개 분야로 구성돼 중간집단교육을 시켰었는데, 그가 강연을 한 여성사회 분야만 유일하게 그의 강연을 중심으로 세 차례 교육을 실시했다.

강연 주제는 '세계 여성의 해 선언과 한국 여성운동의 과제'. 그는 "전 세계적으로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가족제도가 건재한데다가 추상적·관념적 선언과 주장만으론 남녀차별 문제가 실질적으로 해결 안되는 상황"이라며 여성의 해 선언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서 스웨덴, 프랑스, 미국 등 각 선진국의 여성운동 현주소를 소개했다.

반면 한국은 가정·사회·정치·경제·언론·법률·문화 등 각 분야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여성 차별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이런 각도로 여성문제를 보고 들춰내기는 처음"이란 반응이 많았다. 굉장히 충격적이고 혁명적이라며 "마치 '신세계 언어'를 듣는 것 같았다", "비로소 나의 눈이 뜨이고 귀가 뚫렸다"는 호응까지 나왔다.

한국 최초 '여성 인간선언' 공표

이듬해인 75년 1월24일 열린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대화' 모임은 한국 사회에 여성운동의 이념을 대중적으로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학계·법조계·언론계·여성계·종교계 등 각계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그가 발제를 맡은 '한국 여성운동의 이념과 방향'이 첫 번째로 발표됐다. 선천적으로 남녀는 다르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다르게 길러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발제는 큰 관심을 모았다.

"발제를 하면서 보니 대다수 남성 참석자들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는데, 후에 기사 난 것들을 보니 '모성성을 상실하면 안된다'는 톤이 많았다. 아직도 여성을 본질적 시각에서 보지 못한 채 '여성권익 신장론'의 담을 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이효재 교수, 작고한 이규태 언론인(조선일보 전 논설고문) 등이 논평을 했는데, 모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한 맥락이었다. 단 정범모 서울사대 학장만이 "성심리론에서 여성과 남성은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개개인의 차이가 더 크다"면서 그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지지해줬다.

'대화' 모임에 참가했던 여성들은 그가 작성한 초안을 토대로 밤새워 논의에 논의를 거듭, 다음날인 25일 한국 최초의 '여성 인간선언'을 사회에 공표했다. '세계 여성의 해' 벽두에 터진 일대 사건이었고, 언론들은 크게 주목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여성이론의 정립과 활발한 여성의식화 교육 뒤에는 설립자인 강원용 목사의 전폭적 지지가 큰 도움이 됐다.

"강 목사님은 여성문제에 대해 어떤 다른 남성보다도 시각이 선진적이셨다. 나의 여성이론에 대해 상당히 진보적인 남성들도 '투 마취(Too much)'라며 수용하기를 불편해 했는데, 강 목사님은 이해도 상당히 빠르신 데다가 여성에 대한 나의 역사관, 철학관, 논리의 틀을 100% 수용해주셨다. 이후 여성 사회교육을 통해 여성이론과 여성의식을 전파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셨으니, 한국 여성들은 강 목사님께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거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수원 ‘내일을 위한 집’ 앞에서 강원용 목사, 영 어덜트 회원들과 함께.
크리스챤 아카데미 수원 ‘내일을 위한 집’ 앞에서 강원용 목사, 영 어덜트 회원들과 함께. ⓒ 여성신문
'차 한 잔 모임'으로 여성학 태동

1976년 크리스챤 아카데미에는 각 대학 교수들과 여성활동가들로 이루어진 '여성사회연구회'가 조직되었고, 한편으론 '영-어덜트(Young-Adult)' 모임이 있었다. 그는 여기서 여성사회연구회의 초대 회장 역할을 했다. 당시 여성사회연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정의숙(전 이대 총장), 조정호(이대 명예교수), 박영숙(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정세화(이대 명예교수), 박인덕(전 여성개발원장), 강기원(변호사), 김재희, 신인령(이대 전 총장), 차명희(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초대 사무처장), 진민자(청년여성문화원 이사장), 한명숙(전 총리), 이정자(녹색구매네트워크 공동대표), 김숙자, 이계경(국회의원), 장필화(이대 여성학과 교수), 김지명(컨벡스코리아 대표)씨 등이었다.

여성사회연구회의 첫 1년간은 여성문제를 여성 시각에서 학문적으로 검토하고, 반대로 각 학문을 여성 관점에서 검토 분석하는 것이 주요 작업이었다. 가령 여성과 생리학, 여성과 종교, 여성과 문화, 여성과 역사, 여성과 정치, 이런 식이었다. 다학문적, 다학제간 각도에서 연구했는데 지금의 트렌드인 컨버전스(융합)와도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때 가졌던 비공식 모임인 일명 '차 한 잔 모임'은 그를 비롯해 박영숙, 강기원 등의 집을 돌아가며 격월로 열리곤 했다. 후에 이 모임이 '여성사회연구회'로 발전해 여성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 바로 이것이 한국에 '여성학'이란 씨앗이 뿌려진 직접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어서 77년 9월 이대에 여성학이 교양과목으로 첫 개설됐다. 이를 바탕으로 82년, 당시 법정대학장이던 그는 교무회의에 참석해 대학원에 여성학 석사과정을 개설하는 것을 주도했고, 90년 대학원장 시절에는 마침내 여성학 박사학위 과정이 인가되기에 이르렀다. 세계 대학 차원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였다. 이 모든 과정이 급속히 전개된 밑바탕엔 70년대 중반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의 초기 1년간의 스터디를 통해 "여성학도 '학문'으로 성립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 주효했다.

84년 여성학회 창립 초대회장에

그가 84년 10월6일 이대 여성학과 대학원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국여성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돼 2년간 여성학회의 터를 닦은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여성학회는 여성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이론적으로 규명하고, 한국의 여성문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밝혀 분석해내기 위해 발족됐다. 실질적으론 각 대학 여성학자들과의 교류 창구가 생긴 것이 큰 성과였다(당시 전국적으로 20여개 대학에 여성학 강의가 개설되는 양적 확대가 있었다). 특히 대학 별로 돌아가면서 학회장을 맡게 한 것이 여성학을 전국적으로 퍼뜨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 남녀 공통의 문제로 모두가 힘을 합해 해결해 나가야 하며, 학회의 발족이 이론적 뒷받침이 될 것"이라고 공언한 그는 학술지 '한국여성학'을 함께 창간해 여성학 확산에 박차를 가했다. 1년에 1회 내지 2회 발간되는 '한국여성학'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A급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알차게 엮어져 나오면서 여성학 연구의 방향 제시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의 변화와 이론을 제고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의 여성운동 이론은
'남녀는 다르다'는 통념·논리를 뒤집다

▲ 세계 여성의 해 벽두인 75년 1월 24일, 크리스챤 아카데미 ‘대화’ 모임에서 첫 발표된 그의 발제와 다음날 공표된 ‘여성 인간선언’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여성운동의 이념을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계기가 됐다. 사진은 당시 대서특필한 기사들.
1975년 김활란 박사 5주기 기념논문집에 발표한 '한국 여성문제의 방향' 논문은 윤후정 명예총장의 여성운동 이론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논문 서두에서 여성문제의 해결은 본질문제의 해결 없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여성의 본질문제의 취급에 관심을 두고 시작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 전제가 되는 것은 청동기부터 3000년 가까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를 지배했던 남녀간의 선천적 차이에 대한 통념이다.

즉,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다르게 태어나 기질이 다르며, 따라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사상적 논리다. 이 논리는 19세기 현미경의 발명을 비롯해 본격적으로 과학이 출현하면서 지금까지의 주장이 사유론이며 생물학적 자연론이 아님을 입증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성문제의 해결을 위한 여성운동의 시작은 서양에서는 프랑스혁명에 힘입어 1790년대부터, 한국에선 개화의 물결과 함께 189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여성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원인은 이제까지의 문제 취급이 주로 여성 지위의 향상, 여권신장이기 때문.

이를 "머슴을 머슴의 자리에 그냥 두고 머슴의 지위를 아무리 높이 올려도 여전히 머슴인 것과 같은 이치"라고 비유하며 "머슴의 지위에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 지위를 근본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취급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제까지의 여성의 열등성, 피동성, 역할의 구별성 등은 후천적으로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고칠 수 있고, 가부장권을 기본으로 한 가족·사회 구조의 변화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여성문제의 본질론과 구조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가 뜻하는 여성문제 해결의 궁극적 목적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인간 완성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이때 새 문화·새 사회는 힘의 문화, 가부장권제 사회를 지양하고 인간의 공존과 협동을 통해 평화사회와 인간 완성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해결 과제로 의식구조의 개혁, 성윤리의 이중적 잣대에 대한 동일규범 적용, 개인·사회인으로서 발전을 꾀하기 위한 생업으로서의 직업 갖기 등을 꼽는다.

여성의 사회 참여와 진출을 위해선 ▲교육분야에선 성차별적 내용의 시정, 여성의 기술·전문직 참여 독려, 새로운 여성상의 정립 등의 내용을 보완하고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사회복지제도를 마련하며 ▲여성이 가정과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있도록 가족도 함께 가사를 분담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끝으로 출가외인 등의 통념이 깔려 있는 혼인제도의 개혁, 비혈연 가족 등 다양한 가족형태 포용 등을 비롯해 모든 가족구성원이 인격적으로 대등관계를 맺는 새로운 가족제도를 모색할 것을 요구했다.

덧붙이는 글 | 이은경 / 여성신문 기자·20주년 기념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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