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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등 해수욕장 입구
구계등 해수욕장 입구 ⓒ 이현숙
구계등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갯돌. 이름도 갯돌층이 아홉개의 계단을 이룬다하여 붙여졌다니, 갯돌이 얼마나 유명한지 알 만하다. 나 역시 갯돌을 보고 싶었고, 소설가 윤대녕의 <천지간>을 읽고 환상을 키웠던 터라 무척이나 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건 갯돌이 아니었다. 갯돌은 사진으로 많이 보아와서 그런지 크게 감동을 주지 않았다. 감탄사는 해수욕장 뒷편을 차지한 울창한 숲을 거닐면서 터져나왔다.

구계등 해수욕장의 대표 갯돌
구계등 해수욕장의 대표 갯돌 ⓒ 이현숙
구계등 해수욕장에 놀러온 사람들...
구계등 해수욕장에 놀러온 사람들... ⓒ 이현숙
구계등 해수욕장의 신비로운 숲
구계등 해수욕장의 신비로운 숲 ⓒ 이현숙
탐방로가 잘 되어 있는 숲에는 수령 100년 이상의 소나무, 참나무, 꽝꽝, 팽나무 등 40여종의 상록 활엽수가 자라고 있었다. 다양한 식물과 새, 곤충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자연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직접 체험하고 산교육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얼핏 바라보기만 했는데, 신사복 차림의 남자분들이 줄줄이 숲탐방로로 들어가는 걸 보고 호기심에 차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이건 울울창창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에 나무들도 아주 건강하게 뻗어 있는 게 아닌가.

탐방 구간은 정도리 탐방안내소에서 갯돌방 할머니당을 거쳐 다시 주차장이 있는 안내소까지이다. 1.2km의 왕복거리가 50여분에서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니 얼마나 큰 숲인가.

그 안에 들어가면 밖이 보이지 않고 그 안에서 한나절을 보내도 좋을 만큼 넓고 신선하다. 탐방로에서 벗어나 해수욕장 끝으로 가 바위 위로 올라가 본다. 아직은 이른 철이라 해수욕장은 한산하고, 한 떼의 놀이객들만 해변에 모여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마치 들판에서 일을 하다 새참을 먹고 있는 것 같이 정겨운 풍경이다.

다시 숲으로 들어가 뒤쪽 주차장을 거쳐 뒷길을 걷는다. 평화로운 시골풍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유채꽃 한 무리가 피어있는 밭도 있고, 모종을 위해 막 갈아엎은 흙이 붉은 밭도 있다. 구계등, 구계등 하면서 갯돌과 바다만 그리던 내 머릿속에 신비롭고 평화로운 숲과 전원이 추가되는 순간이다. 이래서 체험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으면서.

이제 갈 곳은 당과 일본의 중개무역으로 중요한 지점,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 청해진에 가려면 완도읍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나는 계속 시계를 들여다본다. 내게는 속셈이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니 완도를 다 못 보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안에 꼭 청산도에 들어가야 한다는 조바심이다.

조금 번화한 시가지가 나오고 완도항이 나온다. 바닷가를 끼고 계속 달리자 청해진 수석공원이 나왔는데 우린 그냥 내쳐 달린다. 저만치 청해진 유적이 보이므로. 그러나 청해진 유적지는 바로 눈 앞에 있는데 가는 길이 없다. 이상해서 다시 차를 돌려 되돌아온다. 이리저리 찾아보다, 모르겠다 수석공원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본다. 그런데 거기에 청해진 가는 길이 있다. 바다는 건너지 못하고 바다 건너에 있는 유적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완도항과 완도항 바로 앞에 있는 주도 상록수림
완도항과 완도항 바로 앞에 있는 주도 상록수림 ⓒ 이현숙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 ⓒ 이현숙
손이 닿지 않아 그런지 역사 속 그림 같은 풍경이다. 놀러온 사람들인지 몇몇이 바다에 들어가 뭔가를 잡고 있다. 무엇을 잡는지 연신 탄성 소리가 들려온다. 바다라기보다 갯벌에 가까운 거친 모래밭인데, 난 구경이 더 재밌다. 바다 것이든 육지 것이든 잡고 캐고 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는 게 최고다.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 이현숙
방죽포항...바로 앞에 보이는 섬은 조약도
방죽포항...바로 앞에 보이는 섬은 조약도 ⓒ 이현숙
청해진을 보고 나오다 신지도로 접어든다. 섬이지만 다리가 놓여져 있는 육지 같은 섬. 이름도 고운 명사십리해수욕장을 보러 간다.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동고리해수욕장을 보고 신지도 끝 고개를 넘는다. 이번엔 방죽포항이다.

그런데 고개를 넘자 우리 앞에 나타난 건 검은 차일을 친 하우스다. 비탈길에서부터 산 밑을 꽉 채우고 있는 검은 하우스 집. 도대체 그 정체는 뭘까? 이 바닷가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건 아닐텐데, 풀지 못한 궁금증이 속에서 와글와글.

방죽포항을 보고 나오다가 길가에 선 아저씨에게 묻는다. "광어라요" 아아, 그게 전부 광어 양식장. 우린 이중창으로 소리내어 화답한다. 그런데 이젠 급하게 됐다. 빨리 빨리. 나는 마음 속으로만 외친다. 6시 배가 막배다. 그걸 놓치면 청산도에서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물건너 가는 셈. 하지만 내놓고 서둘렀다간 안전에 문제가 생길 테니, 꾹 참고 속으로만 마음을 졸인다.

15분 전 완도항 도착. 자동차에는 운전하는 사람만 타고 앉아 기다리고(차에 앉아 있으면 사람이 와서 매표를 해 줌), 그 외 사람은 매표소에 가서 직접 표를 사 개찰구를 통해 나와야 한단다. 배 못 탈까봐 몹시 서두른 탓에 마음이 급한데 개찰구는 요지부동 닫혀 있다.

주위를 보니 여기 저기 서서 기다리는 분위기. 나도 덩달아 뒤에 서면서 느긋해지는데, 전화벨이 왕왕 울린다. "뭐하는 거야? 빨리 오지 않고." 난 일부러 뜸을 들이면서, "응 아직 개찰을 안 하는데, 알았어" 한다. 아마 차가 배로 들어 갈 차례인데 내가 나오지 않자 속이 탔던 모양이다.

드디어 그렇게나 기대하고 고대하던 청산도로 무사히 배를 타고 출발. 10년 전, 테마 여행으로 왔던 청산도. 보리밭과 평화로운 그 풍경들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까? 설레며 기다리는 내 마음. 사랑을 기다리는 사춘기 소녀 같은 딱 그 심정이다.

배로 40분 만에 드디어 청산도 도착. 6시 40분인데 아직도 해가 높다랗다. 선착장에서 지도를 보니 일몰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다. 지리해수욕장이라고. 영화촬영지 반대편이다. 오늘은 왜 이리 급한지, 그곳을 향해 또 달린다.

고요한 바닷가. 해를 바라보며 둔덕에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시야는 약간 흐리지만 일몰을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해가 서서히 내려오고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해안선에는 쓰다가 버린 어구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다. 전에는 차를 가져오지 않아 겨우 보리밭과 <서편제> 촬영지만 보고 갔는데 비로소 섬 일주를 할 기대에 부푼다.

지리해수욕장 일몰
지리해수욕장 일몰 ⓒ 이현숙
청산도 지리해수욕장 일몰
청산도 지리해수욕장 일몰 ⓒ 이현숙
일몰을 보고 잘자리를 찾아야 한다. 선착장쪽이냐 다른 곳을 찾느냐 하다가, 민박집을 고집하는 내 뜻에 따라 차는 또 달린다. 이번에는 영화 촬영지 쪽. 나는 불편하더라도 섬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에서 자고 싶다. 그런데 고개를 넘어도 기대했던 보리밭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탈진 곳, 평평한 곳을 모조리 차지하고 바람에 술렁대던 보리밭이 다 어디로 간 걸까?

날은 어두워 가고 민박집 찾기도 쉽지 않다. 마침 길 옆을 지나가는 아저씨가 있어 민박집 있는 곳을 물었더니, 논에 가는데 가다보면 있으니 좀 태워 달란다. 아저씨께 보리밭을 물었더니, 지금은 섬에 노인들만 남아 있어 일손이 달리기 때문에 보리를 잘 심지 않는단다. 뭐 어쩔 수 없지만, 난 꼭 멋진 보리밭을 보고 싶었는데 일단 실망.

아저씨는 논이 있다는 곳에서 내려 드렸다. 그냥 타고 가면서 민박집을 알려주겠다는데 술냄새가 어찌나 역겹던지 우리가 알아서 구할 테니 논에 가시기 편한 곳에 내리시라고 했다.

아저씨가 내리고 고개를 하나 넘자 작은 어촌 마을이 나왔고,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좋은 민박을 구했다. 본채 옆에 지어진 황토로 된 집인데 방안에 개수대까지 있는 제법 편리한 방이다. 동네 이름은 권덕리.

오늘의 결산. 배삯은 차와 두 사람 합해서 3만250원(차와 한 사람은 2만3000원. 그 외 한 사람은 7250원. 나갈 때는 뱃삯이 다르단다) 점심, 1만원. 청해포구 입장료와 주차비 7000원. 햇반과 간식, 3300원. 구계등 주차료, 1200원. 오늘 지출은 모두 8만1750원이다.

이제 소박한 저녁밥을 먹을 시간. 드디어 내가 바라던 어촌에서의 하룻밤이다. 방에 있어도 '철썩, 철썩' 파도 치는 소리가 꿈결 같이 들려온다.
#완도#장보고#신지도#청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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