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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왔단 말이야? 이제 그 아이가 앉아서도 천리를 보는 신복(神卜)이 다되었군."

"다 어르신께서 가르쳐 주신 것 아닙니까? 어르신께서도 오늘밤 닥칠 화 정도는 아셨겠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상만천 역시 자신을 죽일 것인지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다. 적당한 선에서 여지를 주고 물러난 것이 다행이었고, 결국 한 고비를 넘기자 건번에게 당할 뻔 했던 것이다. 이 정도 부상을 당한 것은 액땜치고는 아주 다행스런 정도였다.

"화(禍)를 복(福)으로 만들 경지는 아직 안 되는 모양이야… 아니지… 어쩌면 복이 될지도 모르지…."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무화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듯 바라보자 귀산 노인은 다시 주름 가득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천이 더 있으니까 조금 더 과장되게 동여매줘… 이제부터는 정말 거동하기도 힘든 것처럼 보이는 게 나을 것 같거든… 다리 쪽까지 동여매 주는 것도 괜찮을 듯 싶구먼…."

무화는 여전히 귀산 노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천을 찢어 여기저기 동여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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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혈룡의 영상이 떠오르고 불을 뿜는 듯 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다섯 마리가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그 모습은 위험하다는 생각보다는 차라리 아름답다고 해야 했다.

단혁은 말로만 들었던 혈룡의 영상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것이 과거 구룡의 무공 중 가장 패도적인 혈룡장이 십성에 달했을 때 보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말해주신 혈간 어른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섯 마리라면 절대 정면으로 승부하지 말라는 경고도 떠올렸다.

"……!"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하나의 벽을 형성하듯 자신이 펼친 검막을 찢고 들어온 다섯 마리의 혈룡의 영상이 갑자기 동공에 확대된 순간 그는 가슴에 느껴지는 맹렬한 충격과 함께 피분수를 뿜으며 이장 뒤로 나동그라졌다. 미세한 경련이나 꿈틀거림도 없었다. 입에서는 아직까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지만 이미 숨을 쉬지 않았다.

심장이 파열된 사람이 숨을 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즉사한 단혁의 심장 부위에는 옷이 갈기갈기 찢겨나가 가루로 변한 듯 했고, 불에 지진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흔적은 혈룡의 형상을 세밀하게 그려놓거나 주사로 도장을 찍어놓은 듯 아주 명확하게 보였다.

"……!"

허나 당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을 쓴 사람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예상 외였다. 이것은 며칠 전 혈간을 시해할 때 운용했던 혈룡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런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곤 스스로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다섯 마리의 혈룡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하도 믿기지 않아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무리하지 않았는지 진기를 운행시켜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어제 부상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음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중의는 정말 전설 속의 화타(華陀)나 편작(編鵲)을 능가하는 신의라는 세간의 평가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부상당한 몸이었고, 더구나 가슴과 뒷목에서 느껴지던 역혈 현상도 사라지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단 하루 만에 무공수위를 한두 단계의 상승시켜 완벽한 몸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능효봉에게도 다시 한 번 감사하고픈 마음이 절로 우러났다. 거래였다고… 그래서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을 주고 거래했을까?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능효봉 쪽으로 돌려졌는데 그쪽 역시 눈에 익숙한 흰빛이 쏘아나가는 순간 마지막 남은 철기문의 장로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네… 네 놈… 심인(心印)…."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경악이 극에 달한 듯한 표정과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의 몸은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는 죽어가면서 철기문이 이들에 대해 오판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비영조의 존재는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악귀같이 매우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무림인들에게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들은 아니었다.

잠입과 요인암살 등에 있어서는 뛰어난 자들이라고 들었지만 실상 무공은 일류고수를 능가할 인물들이 거의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상 동창에 정식으로 소속된 인물들이 나서지 못하는 지저분한 일을 처리해온 곳이 비영조였고, 그랬기 때문에 비영조가 나서 혈간 어른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헌데 아니었다. 저들이 합공을 한다면 혈간 어른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곳에 저런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더욱 경악스런 일이었다. 저런 자들이 왜 쓰레기들만 모여 있다는 비영조에 몸담고 있었을까?

허나 그의 의문은 그의 미간에 손가락 마디만한 미세한 혈흔이 배어나오면서 풀어지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

설중행은 두 장로가 쓰러지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저것이었다. 너무나 환상적인 저 무공은 자신도 익히고 있지만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아마 십년을 더 수련해도 못 따라갈 것 같았다. 능효봉은 너무나 완벽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

"휴우…."

능효봉이 숨을 크게 불어내며 고개를 돌려 설중행을 보았다. 그는 약간 지쳐보였다. 하지만 설중행이 다가가며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그는 손을 내저어 설중행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청각을 최대한 높여 주위에 또 다른 자들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듯 보였다.

"……!"

그 순간 능효봉의 얼굴에 미세하게나마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주위에는 인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헌데 멀리서나마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인물들의 기척을 감지해냈기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들이 있는 곳을 향해 몇 명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철기문의 인물들일까?

그의 시선이 두 장로와 설중행이 해치운 단혁의 시신을 번갈아 훑고 있었다. 저 시신들에 나타난 흔적을 없애거나 아예 시신을 처리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으니 시간이 없었다.

"왜 그러시오?"

능효봉의 얼굴색이 수시로 변하자 설중행이 다가들며 물었다.

"어쩔 수 없나? 이미 알 놈들은 다 알고 있지만… 귀찮게 되었군."

능효봉은 대답을 하는 대신 중얼거리며 이럴 때 녹림도(綠林徒)들이 잘 사용한다는 화골산(化骨散)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무림에서는 금기가 되는 것이었지만 이럴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알아보기는 하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너도 대충 없애."

그는 두 명의 장로 미간에 찍힌 심인검의 흔적을 장(掌)을 대고 눌러 흩어놓았다. 둔기로 맞은 상처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본다면 알아볼 인물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설중행 역시 단혁 쪽으로 다가가 상처부위를 지그시 누르며 비틀었는데 피가 배어나와 선명한 혈룡의 잔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핏물을 닦아낸다면 아마 아직 남아있을 터였다.

'어차피 이틀이다. 알려져도 상관없지.'

능효봉은 고개를 흔들면서 나직하게 설중행을 불렀다.

"어서 가자. 곧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 말이야."

그는 말과 함께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설중행 역시 이미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는지 능효봉이 신형을 날린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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