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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 보다는 피곤한 것이 나을 것이오."

말을 하는 건번의 전신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졌다. 모옥 안의 공기가 파르르 떨리는 듯 했다. 아마 황촉불이 켜져 있었다면 그 기세로 꺼져버렸을 것이다. 이미 느끼고 있었던 터였지만 건번은 더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 남지도 않은 삶을 다른 사람 위해 살지는 않을 것이야."

이것은 진심이었다. 귀산 노인은 정말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삶을 남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영욕(榮辱)과 그저 아무런 관련 없이 살고 싶었다.

헌데 말과 함께 귀산 노인이 대답조차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순간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너무나 복잡한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터라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쐐애액---

귀산 노인의 입에서 거절하는 말이 나오는 순간 건번은 의자에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귀산 노인의 침상으로 쏘아가며 팔목에 감았던 팔찌를 날렸는데 그것은 날아가면서 세 개의 원으로 분리되었고, 정확하게 귀산 노인의 머리와 목, 그리고 옆구리에 박히는 듯 했다. 바로 건번의 독문무기인 비천환(飛天環)이었다.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지만 너무나 날카롭고 단단해 자칫 검마저 부러뜨린다는 것이 비천환이었다.

삐이익---

허나 건번이 팔찌를 날리는 순간,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귀산 노인이 이불을 머리 위로 올리는 순간 귀산 노인의 침상이 정확하게 가로의 중간을 축으로 하여 벽과 붙어있는 오른쪽으로 빙글 회전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침상 아래에는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날아간 팔찌 세 개는 돌아가고 있는 침상을 파고들었다.

"으음!"

귀산 노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나온 것 같았다. 아마 비천환이 돌아가고 있는 침상을 파고들어 관통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순간 비천환에 당한 것 같았다. 비천환은 마치 줄이 달려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며 건번에게 날아왔다. 허나 뜻밖에도 건번은 결국 비천환을 회수하지 못한 채 몸이 굳어버렸다.

너무나 놀랄만한 광경이 그 다음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팔찌를 날림과 동시에 귀산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던 건번이 돌아가는 침상 뒤쪽으로 오른손을 뻗어 귀산 노인의 목덜미를 잡으려고 하였고, 왼손으로는 회전되어 돌아오는 비천환을 잡으려 하는 순간 침상이 돌아가며 열린 어두운 공간 속에서 칙칙한 기류가 쏘아 나오며 무언가 건번의 아랫배를 관통한 것이다.

"……!"

그 순간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건번의 움직임은 정지되었고 두 눈을 크게 뜬 건번의 동공에는 자신의 복부에 박힌 물체가 투영되었다. 그것은 검이었는데 옻칠을 해 놓았는지 아주 검었다. 검자루까지 검었는데 그것을 잡고 있는 손은 너무나 희고 가늘어 그 검의 주인이 여인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손뿐이었다. 팔목부터는 다시 검과 같은 색깔의 검은색의 옷이 동여매어 있었고, 흑의를 입은 여인이 회전하고 있는 침상 반대 아래쪽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닥을 중심으로 침상과 반대편, 즉 바닥 아래에 붙어 귀산 노인과 반대로 누워있었던 것 같았다. 침상이 돌아가는 순간 검이 먼저 쏘아졌고, 여인이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있던 것이다.

스윽---!

날아갔던 비천환이 오히려 주인인 건번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건번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전신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못했다. 전신의 기혈이 온통 진탕되고 묵중한 충격이 그의 혼을 앗아가고 있었다.

타닥---!

회전한 침상은 어느새 한바퀴 돌아 원상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침상 위에는 귀산 노인이 누워있었는데 어느새 머리끝까지 덮었던 이불은 걷어져 있었다. 건번은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단지 검이 자신의 하복부를 관통했다고 해서 이럴 수는 없었다.

안간 힘을 써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뿐이었다. 그것도 이미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 모든 물체가 희미하게 두세 개로 번지고 있었다. 검신은 자신의 복부를 파고들어 겨우 세치 정도만을 남겨둔 상태였는데 그 검신을 타고 흐르는 자신의 피가 이 순간 왜 검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점차 흐려져 가는 그의 뇌리로 자신의 복부에 박힌 검명(劍名)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묵빛의 검신을 가지고 악귀의 입김처럼 칙칙한 검기를 뿜어내는 검. 베거나 찔린 상처에 의한 것보다는 묵직한 기운과 함께 맹렬한 진동으로 느껴지는 기이한 충격으로 기혈을 뒤집어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검은 오직 하나였다. 그는 힘겹게 이 세상에서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묵(墨)… 룡(龍)… 검(劍)!"

그리고 그 검이 자신의 복부를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그는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무너졌다. 침상이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속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란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주위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는 자만감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허나 이렇듯 단 한 번의 실수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억울하지 않았다.

다만 숨을 거두는 그의 뇌리에 마치 둔기로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것과 같은 충격은 바로 자신의 복부를 찌른 검이 묵룡검이라는 사실이었다. 검법은 익혀도 묵룡검이 없다면 제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다는 묵룡검(墨龍劍)을 운중보 내 누군가가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허나 그는 자신을 찌른 묵룡검의 주인을 확인하지 못하고 죽었다. 다만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은 죽은 건번의 예상대로 여인이었고, 몸에 달라붙는 흑의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는 검신에서 방울져 흘러내리는 피를 쓰러진 건번의 옷에 쓰윽 문질러 닦고는 검 집에 집어넣었다.

"아가씨께서는 어르신을 무척 걱정하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여인은 바로 운무소축에서 우슬이 언니라고 부르던 무화(武花)였다. 그녀의 말투는 여자와는 달리 매우 딱딱해 사내의 말투와 같았다. 귀산 노인이 한 손으로는 옆구리를, 또 한 손으로는 어깨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감싼 손에서 핏물이 조금씩 배어나오고 있었다. 비천환에 당한 것 같았다. 그래도 몸을 일으킬 정도라면 그리 치명적인 상처는 아닌 듯싶었다.

"비천환을 사용하는 놈이라면 팔번 중 건번이겠군. 클럭!"

말과 함께 귀산 노인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입을 막는 쭈글쭈글한 오른손에는 이미 핏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무화는 귀산 노인에게 바싹 다가들며 손을 저어 제지하는 귀산 노인의 상처를 살폈다.

"괜찮아… 스친 것뿐이야…."

하지만 귀산 노인의 말과는 달리 어깨의 상처는 뼈가 드러나 보였다. 뼈까지 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른 노인의 몸이라 스쳐도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잠시 모옥 안을 두리번거리자 귀산 노인이 침상 아래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빼앗듯 받아든 무화는 귀산 노인을 다시 눕혔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조그만 녹피(鹿皮) 주머니를 꺼내 열어 가루를 귀산 노인의 상처에 뿌리고는 천을 찢어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리 큰 상처가 아니래도… 남들이 보면 죽을 정도로 중상을 입은 것 같아 보일게야."

귀산 노인의 말대로 그녀는 어깨와 허리를 몇 겹으로 대고는 피가 흐르지 않도록 계속 동여매고 있었다. 정말 심한 부상을 입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염증이 생기거나 다시 상처가 도지면 내내 고생을 하시게 됩니다."

"어찌 알았어?"

아마 어떻게 여기에 와있느냐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무화는 차근차근 매듭을 지었다. 그런 세심함을 보면 무화 역시 여자는 여자인 모양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오늘밤 어르신께 화가 닥칠 것이라고 걱정하시더군요. 미시 경에 왔는데 아무도 없더군요."

그렇다면 그녀는 건번이 모옥에 들어온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몸을 숨긴 채 그녀 역시 건번보다 더 참을성 있게 귀산 노인을 기다렸을 것이다. 건번이 약해서가 아니라 더 강하고 인내심이 깊은 사람을 만났기에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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