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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5년간 프랑스를 이끌 지도자의 얼굴이 오늘(6일) 결선투표에서 가려진다. 이번 선거는 좌우파 대표정당의 후보가 치르는 이념선거이자, 남녀 후보가 펼치는 성대결이기도 하다. 또한 양당 후보 모두 전후 세대라는 점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프랑스 정치의 세대 혁신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중요한 이번 선거에 나선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 후보와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는 과연 누구인지 알아본다. <편집자주>
지난 2일 저녁 벌어진 루아얄과 사르코지의 TV토론 장면.
지난 2일 저녁 벌어진 루아얄과 사르코지의 TV토론 장면. ⓒ EPA=연합뉴스
5월 2일 열린 두 대선후보간의 토론에서 지금까지 항상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던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사르코지는 의외로 온순한 태도를 보였고 항상 어느 자리에서나 함박웃음을 머금어 일부인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던 루아얄은 평소에 보지 못했던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주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마치 성난 여선생님 앞에서 쩔쩔 매는 남학생을 연상케 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사르코지가 그동안 보여왔던 공격적인 행동을 부드럽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 하에 의도적으로 온순한 태도를 보인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항상 미소 머금은 부드러운 모습만을 보여준 루아얄은 또 루아얄대로 공격적인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를 느껴 장애자 교육에 대한 사르코지의 발언부분에서 일부러 성난 태도를 보인거라고도 했다.

결국 두 사람 다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줄 아는 탁월한 배우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른 해석도 있다. 평소에 공격적인 사르코지가 온순한 태도를 취한 것은 루아얄을 무엇보다 여자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사내대장부가 여자 앞에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겠는가? 이것은 결국 여자를 보호한다는 의미인데 주로 세력이 강한 쪽이 세력이 약한 쪽을 보호한다는 면에서 사르코지가 루아얄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의미에서 취한 행동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한 나라의 대선후보 경쟁을 단순히 여자와 남자만의 경쟁으로 볼 수 있을까?

[루아얄] 장군의 딸, 대통령 선거에 나서다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루아얄.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루아얄. ⓒ AP=연합뉴스
세골렌 루아얄은 장군 출신인 아버지가 지금의 세네갈에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을 무렵인 1953년 9월 22일 다카에서 태어났다. 8남매중 4녀인 세골렌의 원래 이름은 마리-세골렌이었는데 1970년대 말에 마리란 이름을 떼어내고 세골렌이란 이름만을 사용했다. 아마도 마리란 이름이 너무 종교적인 느낌을 주는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프랑스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 낭시 2대학에서 자연과학 학사를 얻은 루아얄은 이후 ENA(국립정치학교)에 편입하고 1980년 졸업과 동시에 행정재판소에서 일하게 된다.

1978년에 사회당에 가입한 루아얄의 정치경력이 국가차원에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베레고브와 총리 밑에서이다. 루아얄은 당시 환경부장관을 맡았고 1997년에서 2000년까지 조스팽 정부 밑에서 학교교육 장관 대표, 2000년에서 2002년까지는 가족, 유년기, 장애자 장관 대표를 역임했다.

2004년 루아얄은 전통적으로 우파인 푸와투-샤랑트 지역의회장에 총리 출신의 라파랭을 물리치고 선출되는데 현재 프랑스에서는 유일한 여자 지역의회장이다.

작년 11월 16일, 루아얄은 사회당의 쟁쟁한 거장인 도미니끄 스트로스-칸과 로랑 파비우스를 물리치고 사회당원의 60.6%의 표를 획득해 2007년 대선의 사회당 후보로 선출된다. 그리고 올해 4월 22일,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루아얄은 25.87%라는 표를 획득해 31.11%를 얻은 사르코지를 이어 2위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프랑스 역사에서 최초로 대선 2차 투표에 오르는 여성후보가 된다.

미테랑의 손을 잡고 "날 도와주겠습니까?"

미모의 여성후보인 루아얄은 미모 못지않게 야망도 대단한 여자인데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88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2차 임기를 시작하기 위해 엘리제궁에 모인 사회당 의원들에게 돌아가며 악수를 하고 있는데 한쪽에 얌전히 서있던 무명의 젊은 보좌관 루아얄이 미테랑의 손을 잡으며 자기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혹한 미테랑이 무슨 말이냐며 다시 묻자 조만간 있을 국회의원 선거때 자기를 도와줄 수 없겠냐고 당돌하게 재차 묻는 것이다. 처음에는 약간 성가시게 생각했던 미테랑도 결국은 젊은 여자의 원을 들어주게 되어 두-세브르 지역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는 행운을 안는다. 이미 그 때부터 루아얄은 대선을 넘겨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루아얄은 ENA의 동료인 프랑수아 올랑드와 1970년대 말부터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동반자 관계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부부처럼 사는 관계를 말한다. 루아얄은 올랑드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마지막 딸을 낳았을 때가 1992년, 39세로 환경부장관을 역임하고 있을 때였다. 이로써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여자장관이 해산을 하는 케이스가 발생된 것이다. 이 드문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루아얄이 아니었다. 루아얄은 동반자 올랑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갓 태어난 딸을 언론에 보임으로써 모성을 강조하는 장관의 이미지를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일 자신의 아성인 푸아티에에서 열린 1차투표 마지막 유세에 에디트 크레송(맨 왼쪽) 등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루아얄 후보.
지난 20일 자신의 아성인 푸아티에에서 열린 1차투표 마지막 유세에 에디트 크레송(맨 왼쪽) 등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루아얄 후보. ⓒ 박영신
바지를 입지않는 페미니스트

어렸을 때 장성 출신의 엄격한 아버지가 형제들을 수시로 때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루아얄은 일찍부터 아버지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5남3녀의 자식을 둔 루아얄의 아버지는 남에게 수시로 "내게는 5명의 자식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딸을 무시하는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딸에겐 고등교육도 시킬 필요가 없다고 해 루아얄은 1978년 아버지가 자기 대학교육비를 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고소한다. 결국 루아얄은 몇 년 후에 이 소송에서 이기게 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지칭하는 루아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바지를 입는 일이 없다. 항상 스커트나 원피스를 단정하게 차려입는 루아얄은 당연히 여성의 입장에 민감하다. 학교교육 장관 대표 시절, 루아얄은 중고등학교 양호실에서 여학생들에게 '이튿날 먹는 약'을 무료로 주게 함으로써 여학생들이 미처 자신을 보호하지 않은 상태로 성관계를 맺은 다음날 이 약을 먹게 함으로써 원치않는 임신을 피하도록 하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교육을 자신의 정치의 핵심으로 두고 있는 루아얄은 학교교육 장관 대표 시절, 어린이 권리 보호와 학교에서의 폭력 방지, 성적 추행 억압과 미성년자 보호에 남다른 신경을 썼고 1998년에는 각종 사립학교에서 만연한 신입생 골리는 환영식을 법적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루아얄은 자신의 정치길을 열어준 미테랑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그녀는 미테랑을 한번도 비판한 적이 없고 미테랑이 비시정부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르네 부스케와의 오래된 친구관계로 여러 군데에서 비판을 받고 있을 때에도 미테랑을 두둔했고 오히려 미테랑을 비판했던 다른 사회당 의원들을 비판하고 나설 정도였다.

1989년 루아얄은 TV의 폭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는데 특히 TV에서 방송되는 일본 만화영화에 적대감을 표시했다. 그녀에 의하면 "형편없고 조잡하며 보기 흉측한" 일본 만화영화로 인해 프랑스 어린이들의 정서가 침해된다는 것이다. 18년이 지난 후에도 루아얄의 의견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2006년 12월 22일 루아얄은 일본의 사회당 지도자인 미주호 여사에게 "일본의 여성문제는 '망가'(일본만화)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는데, 즉 망가에서 고문받는 일본여성이 많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일부 일본 정치인들은 만약에 루아얄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일본과 프랑스간의 관계가 냉각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사르코지] 스쿠터 도둑 잡으려고 DNA 채취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사르코지 후보가 1차투표 전인 지난 20일 한 농장을 방문해 자신감을 과시하고 있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사르코지 후보가 1차투표 전인 지난 20일 한 농장을 방문해 자신감을 과시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한편 니콜라 사르코지는 헝가리 귀족출신의 아버지와 변호사인 프랑스인 어머니 밑에서 1955년 1월 2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루아얄보다 2살 연하인 셈이다. 중학교 1학년을 낙제하기도 한 사르코지는 파리 10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78년에는 사법으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학생 시절에 용돈을 벌기 위해 꽃집에서 꽃 배달 등의 아르바이트 일을 하기도 하는데 오랫동안 기자가 될까 고민하다가 결국 1981년 자기 어머니처럼 변호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사르코지는 다른 2명의 변호사와 함께 변호사 공동사무실을 운영하게 되는데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변호사 활동을 할 수 없는 관계로 변호사 일은 중단하였지만 변호사 사무실의 지분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어 매년 이익금을 배당받고 있는데 2002년에는 그 금액이 24만 1천 유로에 달하고 있다.

1982년 9월 사르코지는 약국집 딸인 마리-도미니끄 퀼리올리와 결혼, 두 아들을 둔다. 1984년 뇌이유 시장이었던 사르코지는 당시 TV의 유명한 쇼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자크 마르탱과 세실리아 시가네르-알베니즈의 결혼식을 주례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세실리아와 1996년에 재혼을 한다. 이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하나가 태어난다.

전처의 아들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올해로 20세인 이 아들이 지난 1월에 뇌이유 집 앞에 세워놓았던 스쿠터를 도둑맞은 일이 있다. 당시 내무장관이고 이미 대선활동을 시작했던 사르코지는 대형범죄시에만 사용하는 DNA(유전자) 채취방법을 이용하여 범인을 잡는데 성공함으로써 정계에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 그리고 시련

사르코지는 1974년에 UDR(공화국을 위한 민주연합)에 가입하여 1986년 시라크 총리 밑에서 내무부 장관을 담당하게 될 샤를르 파스쿠아를 만나게 되고 샤방-델마의 대선을 위해 싸운다. 1976년에는 파스쿠아가 새로이 창설한 RPR(공화국을 위한 단결)에 가입하고 1980년에는 시라크 후보를 위한 젊은이들의 후원장이 된다.

1983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뇌이유의 시장이 되어 앞길 탄탄한 정가의 길을 걷게되는 사르코지는 34세에 국회의원이 되고 38세가 되는 1993년에 발라뒤르 정부의 대변인과 예산장관이 됨으로써 국민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당시 발라뒤르는 자기가 총애하는 사르코지를 '프티(작은) 니콜라'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이는 삽화가인 상페의 주인공인 '프티 니콜라'에서 따온 말이고 실제로 키가 작은 사르코지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다.

1995년 시라크와 발라뒤르의 대선에서 사르코지는 그동안 지지해왔던 시라크를 떠나 발라뒤르를 지지하게 되는데 시라크가 승리함으로써 알렝 쥐페 정부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 당연히 자기를 배반한 사르코지를 시라크가 신나게 복수한 것이다. 이 때부터 시라크와 사르코지의 불화가 시작된다.

2002년에 사르코지는 시라크 대통령의 재선운동을 지원함으로써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게 된다. 시라크는 재선에 성공된 후 사르코지를 내무부장관에 임명하는데 이때부터 사르코지의 강력한 치안정치가 펼쳐지게 된다.

2004년 3월에서 11월까지 9개월간 경제, 재정, 산업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한 사르코지는 2005년 5월 29일 유럽헌법투표가 거부되면서 라파랭 정부가 사임하게 되자 다시 내무부장관직을 맏게 된다. 동시에 사르코지는 UMP 회장이 되는데 시라크는 이 두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1차 투표에서 1위가 확정된 사르코지가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화답하고 있다.
1차 투표에서 1위가 확정된 사르코지가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화답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강력한 치안정치... 이민자들은 '쓰레기'?

2005년 6월 20일,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파리 교외의 라 쿠르뇌브 방리외를 방문한 사르코지는 "불량자들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난 필요한 인원을 동원할 것이고 4000단지(대형 주거단지 이름)를 청소할 것이다"라는 심한 말을 사용했다. 10일 후에 다시 이 지역을 방문한 그는 고압청소기로 청소한다는 말을 재차 사용함으로써 정가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해 10월 26일 이번에는 아르젱퇴이유 방리외를 방문한 사르코지가 이곳에 사는 젊은이들을 "쓰레기"라는 말로 표현해 파문은 끊어지지 않았다.

경찰에 쫓기던 청소년 2명이 고압전선에 올라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그동안 참았던 젊은이들의 분노가 폭발해 결국 2005년의 방리외 폭동사건이 벌어진다. 사르코지는 '관용 제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 폭동에 가담한 신분증 없는 사람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할 것이라고 위협한다.

이 폭동으로 인해 일부 좌파들은 사르코지의 사임을 요구하고 언론에서도 그의 행동을 비판했다. 그러나 입소스의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68%의 프랑스인들이 그의 대응에 만족한다는 대답을 했다. 결국 폭동에 참여한 사람 중 체포된 2734명 중에서 597명이 감옥에 들어가고 말리 국적의 젊은이 하나가 추방되는 결과를 빚었다. 이 폭동은 학교와 도서실, 회사건물이 파괴되고 자동차가 불질러지는 등 막심한 재물피해에도 불구하고 1명의 사망과 1명의 중환자만이 발생하게 된다.

최초고용법 사태, 위기이자 기회

2006년 1월,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는 젊은이들의 실업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CPE라는 최초고용법안을 제시한다. 이 최초고용법안에 같이 참가한 사르코지는 국민들의 심한 저항을 느끼자 드 빌팽과의 거리를 유지하게 되고 정부와 학생, 근로자 조합이 심하게 대립하는 동안에도 단지 내무부장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3월 31일 시라크가 개입하여 CPE 개선안을 모색해 보겠다며 사르코지에게 새로운 법을 만들 것을 요청한다.

결국 4월 10일 시라크는 학위가 없는 젊은이들에게만 CPE를 적용한다는 개선안을 발표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시라크와 드 빌팽의 인기도가 마구 하락하게 되고 드 빌팽은 2007년 대선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유일하게 이 위기에서도 인기도가 하락되지 않은 인물은 사르코지로 그는 사태가 삐긋하게 나아갈 때부터 이런 결말을 예기하고 도의적으로 그걸 피하기 위해서 드 빌팽과는 상이한 입장을 취했는데 이미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하다.

사르코지는 아내인 세실리아를 자신의 장관직의 중요 조언자로 임명하고 UMP의 대선 선거장으로 임명하는 등 아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국민들에게 세실리아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5년 8월 26일 <파리 마치> 잡지에 세실리아가 당시 연인으로 알려진 리샤르 아티아와 같이 찍은 사진이 커버를 장식함으로써였다. 이로써 사르코지-세실리아 부부의 불화가 노출되는데 갑자기 불편한 관계에 놓인 사르코지는 잡지 소유자인 아르로 라가르데르에게 압력을 넣어 잡지의 편집장을 해고시키게 한다.

또한 2005년 10월 세실리아의 일생을 다룬 전기가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사르코지에 의해 출간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되기도 한다. 결국 이 책은 소설형식으로 바뀌어 출판사를 바꾸어 출판되기도 했다.

프랑스가 지금까지 취해왔던 자유이민 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선택이민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르코지는 불어를 모르고 직업이 없는 자는 프랑스 이민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불법이민자의 신분증 단속을 강화하고 학교에 취학해 있는 불법이민자의 자녀들을 단속하는 등 반이민정책을 쓰고 있다. 또한 연속 범행을 저지르는 16세 이상의 미성년자에게도 성인과 동일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등 강력한 정책을 쓰고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사회적 긴장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방리외 젊은이들이 자기들을 쓰레기로 간주한 사르코지 대통령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르코지는 현재 고용주가 새로운 고용자를 써보고 첫 2년 안에 아무런 이유 없이도 해고할 수 있는 고용계약을 고려중인데 이것은 CPE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또한 파업권리의 제약과 대중교통업체가 파업을 할 경우 최저서비스 제공, 1주일 이상 파업이 연장될 경우에는 파업자들의 대다수 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등의 제안을 내고 있다.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될 경우 그가 추진하겠다고 제안한 이런 모든 사항들이 시민들의 아무런 저항 없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프랑스 국민, 누굴 선택할 것인가

루아얄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편의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들을 위한 법을 제안했다. 시라크가 대통령이 된 이후 엘리제궁의 비용지출이 8배로 늘어났다며 장관과 대통령직에 있는 자들의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루아얄은 "장관의 가족들이 시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숙박을 해결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했다.

사르코지처럼 정면대결을 원하지 않는 루아얄은 많은 노동자들의 화를 자아낼 제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고 CGT(일반노동자연합)나 FSU(교사노조) 같은 조합원들은 공식적으로 그녀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루아얄의 당선을 원하고 있는 상태이며 이들이 굳이 사회운동에 가담할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루아얄이 대통령이 될 경우 사회적 평화가 도래할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루아얄이 제시한 경제 프로그램이 좌파쪽에 가깝기보다는 자유경제주의를 지향하는 우파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루아얄은 토니 블레어의 일부 정책에 찬성한다는 발언으로 일부 사회당원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자유경제주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유럽헌법을 부결시킨 국민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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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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