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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 동쪽 해상에 길게 발을 내밀고 있는 코로만델(Coromandel) 반도는 오클랜드를 지켜주는 천연의 방파제다.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높고 사나운 파도는 코로만델 반도에 부딪혀서 그 높이와 힘을 일단 낮추게 되고, 오클랜드의 동쪽 바닷가에 이르러서는 그저 발목을 찰랑찰랑 적시는 잔물결 정도로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 코로만델 반도 지도
ⓒ 정철용
오클랜드의 동쪽 바닷가가 대양(남태평양)과 접해 있으면서도 바다(태즈만해)에 접해 있는 서쪽 바닷가보다 훨씬 더 잔잔한 파도와 완만한 해안을 가지게 된 배후에는 이처럼 코로만델 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정작 코로만델 반도의 명성을 올려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지형학적 중요성보다는 오클랜드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양지라는 점에 있다.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주말과 휴가를 즐기기 위한 별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지역도 바로 코로만델 반도라고 한다.

이는, 오클랜드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이면 닿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편리함이 주로 작용한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개발의 손길이 덜 타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2박 3일간의 코로만델 반도 일주 여행을 준비하느라 읽었던 여행정보 안내서에서도, 코로만델 반도를 묘사하는데 다음과 같은 4개의 형용사를 앞세우고 있었다. 다듬지 않은(rustic), 편안한(relaxed), 장엄한(magnificent), 훼손되지 않은(unspoiled). 그러니 이 형용사들의 진위를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 이번 짧은 봄여행의 목적이 될 것이었다.

템즈, 잊혀진 금광의 도시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다

여행 첫머리에서 만난 템즈(Thames)는 코로만델 반도로 들어가는 관문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도시다. 인구가 고작 7500명 정도에 불과하니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코로만델 반도 지역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고 제법 번화한 곳이라 한 발 양보해서 '작은 도시'라 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은 도시가 한때는 오클랜드보다도 인구가 많았고(그래 봤자 1만8000명 정도이지만) 100개가 넘는 호텔이 들어찰 정도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1867년, 이곳을 흐르는 한 시냇가에서 금이 발견되고 나서 이른바 '골드러시'로 인한 인구 집중이 낳은 기현상이었다.

오래지 않아 금광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황금을 좇던 사람들의 꿈은 거품처럼 꺼졌고 그와 함께 마을도 조금씩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당시에 세워져서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사회기반시설과 코로만델 반도의 어느 곳이든 1시간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에 의지하여, 템즈는 코로만델 반도 여행의 거점 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행정보 안내서에는 템즈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금광 투어와 템즈 역사박물관을 추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광부들이 아니라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문을 열어두고 있는 100년도 더 된 금광굴은 우리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또 템즈의 지난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자잘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템즈 역사박물관은 이민 오던 첫 해에 이미 다녀갔던 곳이라 다시 볼 필요가 없었다.

결국 템즈를 그냥 지나치기로 한 나의 결정에 다들 이의가 없었다. 사실 잠깐이라도 멈추어서 기웃거려 보면 템즈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흥미로운 풍경을 하나쯤 보여주었을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템즈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불쾌한 기억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민 오던 첫 해, 어느 정도 운전에 자신이 생겨서 처음으로 오클랜드를 벗어나는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하고 다녀왔던 곳이 바로 템즈였다. 그때 우리는 템즈 거리를 기웃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우리 곁을 지나치면서 차 안에서 한 떼의 백인 청소년들이 큰 소리를 질러댔다.

"고우 홈, 차이니즈! (Go home, Chinese!)"

나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우리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향해 질러대는 고함 소리였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중국인으로 오인하긴 했어도, 이민 와서 처음 당하는 인종차별적인 모욕에 아내와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젊은 혈기를 어쩌지 못한 어린놈들의 치기로 받아넘기기에는, 우리는 아직도 풋내기 초보 이민자였다.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마음을 간신히 달래서 템즈 역사박물관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지금도 그렇게 피부색이 다르다면서 모욕을 주고 있으니, 골드러시 당시 금광을 캐러 이곳으로 몰려들었던 그 많은 중국인들에게는 오죽했을까!

잊혀진 금광의 꿈처럼 상처로 남은 기억도 쉽게 잊혀지면 좋으련만 그럴 정도로 내 마음이 너그럽지는 못해서, 나는 멀어져 가는 템즈의 거리를 백미러를 통해 한 번 흘낏 쳐다보았을 뿐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비 날개에 나쁜 기억을 실어 보내다

템즈를 빠져나온 후, 코로만델 반도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오르는 25번 국도를 5분 정도 달려서, 우리는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비와 난초의 정원(Butterfly & Orchid Garden). 겉으로 보기에는 숲 속에 지어 놓은 자그마한 온실처럼 보였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후끈 끼치는 온기와 물안개처럼 어린 습기 속을 수많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 정철용
ⓒ 정철용
ⓒ 정철용
검은 날개를 위·아래에 쌍으로 달고 있는 놈들도 있었고, 날개에 커다란 눈동자 하나씩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나비가 아니라 나방처럼 보이는 놈들도 있었고, 망또를 두른 듯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나비들이 아니어서, 우리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날개 빛깔과 형태와 무늬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입구 쪽에 붙여놓은 안내문을 읽어보니, 약 400마리의 나비들이 온실 안에 있다고 한다. 나비들의 수명이 약 2주 정도에 불과해서 매달 700마리의 나비들을 새로 풀어놓는다고 한다. 그럼, 그 많은 나비들을 어디에서 구할까? 이어지는 글에 그 대답이 적혀 있었다.

즉 자체 부화 시설에서 한 달에 300마리의 나비를 부화시키는 동시에 매달 아시아와 남미에서 나비의 번데기 400마리를 수입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나비들 중에는 우리처럼 한국에서 온 나비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비들의 세계에는 인종차별이 없어서 그들은 너나없이 한데 섞여서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나비를 가려낼 수가 없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온실 안에서 1시간이 넘게 나비들을 보고 또 보는 사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마음을 흐려 놓았던 템즈에서 겪었던 불쾌한 기억이 사라졌다.

내가 그렇게 나비 날개에 나쁜 기억을 실어 보내고 있는데, 나를 부른 딸아이가 나뭇잎 뒷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황토빛 날개를 지닌 나비 한 쌍이 서로 꽁무니를 대고 한창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카메라에 그 아름다운 장면을 담고 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방해하지 말자고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 정철용
ⓒ 정철용
사랑을 나누고 있는 황토빛 날개의 이 나비 한 쌍이 혹시 한국에서 온 놈들이 아닐까. 아니면 호랑이 무늬를 하고 있는 날개를 활짝 펴고 앉아 있는 저 나비 한 쌍이 한국에서 온 놈들일까. 부질없는 물음이라는 듯이 호랑이 무늬 나비 한 쌍은 날아올라서 다른 나비들과 함께 섞였다.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분명 저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온실을 돌아 나오면서, 나비들의 날개만 바라보느라 난초 꽃들에게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여, 핑크빛으로 활짝 피어난 난초꽃 한 송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차에 오르는 나의 머리 속에는 템즈의 나쁜 기억 대신 나비와 난초 정원에서 누린 기쁜 기억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 정철용

덧붙이는 글 | 코로만델 반도는 2004년 9월에 다녀왔던 곳인데 지금에야 여행기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5~6회에 걸쳐 코로만델 반도 여행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템즈#뉴질랜드#금광#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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