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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난나
[홍지영 기자] 중3·고3 자녀를 둔 학부모 김성희(46·경기 일산)씨는 현재 학교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도서관 교사 도우미로 독서 지도는 물론 대출·반납 등 도서관 운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교적 봉사활동에 '열성적'인 김씨지만 가끔은 섭섭한 생각이 든다. 하는 사람만 계속하는 경우가 많을 뿐더러 집에 있다고 해서 노는 사람도 아닌데 가끔씩은 이것저것 '막' 시키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다는 것.

김씨는 "봉사를 하찮게 여기는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며 "교육재정 등 여건을 갖춰 놓고 시급제 형식의 인센티브제도를 마련하면 지금보다 참여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처럼 전업주부 엄마들이 겪는 어려움 못지않게 직장에 다니는 엄마들의 어려움도 크다. 어쩌다 월차라도 내서 학교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날이면 다른 엄마들의 눈치를 보기 일쑤다.

초3 자녀를 둔 박은교(41·서울 홍제동)씨는 직장 11년차다. 박씨는 평소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털어내느라 1년에 한번 열리는 알뜰바자에 나가 열심히 물품을 판다. 박씨는 "학교에 일손이 부족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엄마들에게 '잡무'가 떠넘겨지는 일이 많다"며 "자발성을 전제한다고 해도 알게 모르게 엄마들 사이에 불편한 말들이 오고 간다"고 볼멘소리다.

'자원봉사' 명목 아래 자행되는 학부모 '동원'

일반적으로 학부모들의 참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저학년일수록 학부모들의 참여 또한 높다. 우선 초등학교의 경우 급식, 청소, 도서, 교통, 상담, 환경미화, 바자 등의 활동이 대표적이고, 중·고등학교는 교복·체육복 공동구매운동, 앨범 공개입찰, 시험 감독 등에 학부모들의 참여가 활발하다.

이밖에 '명예교사', '보람교사'라는 이름으로 교사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어머니회, 학부모회, 학교운영위원회 등 조직적인 기구도 활발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문제는 '자원봉사'라는 명목 아래 종종 학부모들을 '동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에 있다. 2년 전에는 경기도 의정부의 한 고등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 감독으로 참여해달라는 내용의 가정통신문을 보냈다가 학부모단체에 의해 민원이 제기된 적도 있다.

각종 학교 행사에 엄마들이 들러리로 나서 차를 나르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사례도 학부모단체에 종종 보고 되기도 한다. 행여 내 자식에게 해로 돌아올까봐 불편과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동원에 기꺼이 참여하는 학부모들도 상당수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머니 급식당번 폐지' 운동이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순번으로 돌아오는 급식당번제가 부담스러운 엄마들, 교사와 함께 시험 감독으로 교실에 들어갔지만 앉을 의자도 준비돼 있지 않아 꼬박 40분간을 교실에 서있어야 했던 엄마들의 얘기는 오히려 학부모인 '엄마'들에겐 낯설지 않다.

이경자 인간교육학부모연대 사무국장은 "'급식'이나 '청소'처럼 충분히 학교 안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는 영역만큼이라도 교장들이 소신을 갖고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학부모 봉사활동에도 '부익부 빈익빈'?

소위 '잘 나가는' 활동에만 쏠려 학부모 봉사활동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문제다. 학부모 백경아(34·서울 방배동)씨는 "학부모총회에 가보면 교통안전지도를 담당하는 '녹색어머니회'를 제일 꺼려해 교사와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한다. 반면 임원 엄마들끼리는 경쟁도 치열하고, 혹시나 회장 선거에라도 나갈까봐 고학년으로 갈수록 운영위원만 고집하는 엄마들도 있다"고 말했다.

박범이 참교육학부모회 서울지회장은 "학부모들의 참여를 '동원'으로 볼 건지 '봉사'로 볼 건지는 관점의 문제"라며 "학교일을 '즐거움'으로 삼는 학부모들도 많다"고 말했다. 다만 "일부 학교에서처럼 학부모 중심으로 '기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측면에서 문제고, 학교가 나서서 학부모들에게 골고루 '학교 참여'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는 변하는데 학교가 '봉사'만 강요해서는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김도기 한국교원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교 운영과 관련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실질적 '참여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복 공동구매 등 이해관계가 걸린 중요 사안에 대한 의사 결정에 학부모들의 참여를 유도한다면 기꺼이 휴가를 내서라도 학교에 올 것이라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또 "일례로 급식 배식만 할 게 아니라 급식 환경을 살피거나 식자재 검수를 하는 등의 활동은 긍정적"이라며 "교내에서 부모들의 도움이 필요한 영역이 있는 만큼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끌어내야 할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우수 사례] 아빠도 적극 참여...'부부 서포터'

서울 성동구의 행현초등학교. 매주 수요일마다 영어로 동화책을 읽어주는 '스토리텔링 수업'이 한창이다. 레벨이나 학년에 상관없이 모인 아이들은 어머니 명예교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운다.

딱딱한 책걸상 대신 화사한 빛깔의 푹신한 소파 덕분에 아이들은 일반 가정집 거실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수업 중간중간에는 어머니들이 준비해온 간식도 서로 나눠먹는다.

8명으로 구성된 학부모 영어 명예교사들이 진행하는 이 수업의 정식 명칭은 바로 '파닉스 클래스'. 해외 거주경험이 있는 엄마들부터 파트타임으로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엄마들까지 다양하다.

이들 어머니 명예교사는 지난해부터 학교에 나와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화·목요일엔 영어수업 진도를 잘 따라오지 못하는 3학년 이상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한다.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인데도 아이들의 호응이 높아 오히려 수업을 준비하는 어머니들이 더 신이 난다고 한다.

명예교사로 활동 중인 전은숙씨는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자신의 재능을 나누고 싶어 순수하게 모인 엄마들"이라며 "무엇보다 3학년인 딸 다연이가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길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행현초교의 '파닉스 클래스'처럼 엄마들의 자발적인 '치맛바람'이 신선한 분위기를 몰고 온 것과 마찬가지로 아빠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아버지회'를 3년째 운영 중인 서울 구로구의 개봉초등학교가 대표적인 케이스.

100여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아버지회'는 교내 체육대회 등 굵직한 행사 때마다 서포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여름에는 폐교 캠프를 열어 '아빠하고 하룻밤 자기' 행사를 갖고, 가을에는 '가족산행대회'를 열어 자녀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또 법원을 견학해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보고 판사와 직접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양한 직장을 가진 아버지들이 서로 연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회장을 맡고 있는 학부모 황의철씨는 "어머니들 못지않게 아버지들도 자녀의 학교생활에 관심이 많다"며 "'아이가 볼모로 잡혀 있다'는 생각을 갖고 활동하게 되면 학부모 참여가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자'는 목적 아래 학부모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황씨는 또 "'벼랑끝'이라는 생각으로 아버지회 활동을 하고 있다"며 "우리가 잘해야 그 다음에도 아버지 활동이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더 활기를 띨 게 아니냐"고 힘주어 말했다.

어머니들 중심으로 이뤄졌던 참관수업에 아버지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이대부속초등학교는 공식적인 '아버지 참관일' 행사를 가졌는데, 400명 이상의 아버지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행사에 참여한 아버지들도 한결같이 "자녀교육에 관한 한 부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해외 사례] 학부모+교사 협력체 정기 간담회

학부모들의 학교운영 참여가 외국에선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우선 미국의 경우 학부모와 교사들의 협력체인 사친회(Parent Teacher Association, PTA)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사친회는 학교마다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기금 모금, 도서관 관리, 보조교사 등 다양한 봉사를 수행한다.

특히 학교기금 등 중요 안건들에 대해 정기적으로 모여 논의하게 되는데, 주로 퇴근시간에 모이기 때문에 직장에 다니는 학부모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 아빠들도 휴가를 내고 참석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모가 참석한 아이들에게는 숙제 1회의 면제 쿠폰이 주어지기도 한다. 미국의 학교는 지역사회가 설립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학교에 대한 '주인의식'이 매우 강하다.

뉴질랜드의 사친회는 중고 교복 판매, 학교 매점 운영, 도서 주문판매, 디스코 파티와 같은 행사를 열어 그 수익금을 매년 학교에 기부하고 있다. 그 금액이 수천만원에 달해 사친회는 학교 운영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독일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들이 정기적으로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해 학부모들에게 학교의 교육방침과 운영방식 등을 소개한다. 이 자리에서 부모들은 학교 급식 등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관련한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학교측은 학부모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청취한다.

한편, 우리나라와 유사한 학제와 교육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일본은 어떨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학부모들의 참여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학교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보다는 '사회에 참여한다'는 생각으로 자발적인 봉사활동을 한다.

각 반의 주간학습계획서 제작을 돕거나 타 학교에서 전학 온 학생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특징이다. 또 조손가정이나 한부모가정 아이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학부모회'라는 용어 대신 '보호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 주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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