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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yes24
현재 중국은 2003년 3월에 총리직에 취임한 원자바오(溫家寶)에 의해 총괄되고 있다. 원자바오의 등장 이후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이 되었다. 물론 주룽지와 후진타오, 그리고 우방궈와 쩡칭홍의 협력도 만만치 않았다. 어찌됐든 원자바오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그리고 장쩌민에 이어 4세대 핵심 리더가 되었다.

마링과 리밍이 함께 쓴 <원자바오>(지해범 옮김·W, 미디어)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힌 책이다. 이른바 그의 출생지에서부터 총리직에 오르게 된 배경, 그리고 향후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제 등 그가 풀어가야 할 과제들을 총괄하여 다루고 있다.

"모두 알다시피 해외 독자들이 중국의 리더에 대해 알기를 갈망한다. 중국의 리더에 대해 많이 알수록 중국의 정책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는 당연히 리더의 정치활동에만 국한해서가 아니라 비교적 전면적이고 입체적 묘사를 필요로 한다."(머리말)

원자바오는 1942년 9월에 텐진시 '이싱항'이란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런데도 그의 이력서에는 그의 고향이 빠져있다. 이유가 뭘까? 어렸을 적 문화혁명 중 아버지가 지식인들을 비판했다고 해서 동네에서 쫓겨나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음속에서 그곳을 지운 것이다.

그는 1950년 텐진의 난카이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 저우언라이도 그 학교에 함께 다녔다. 저우언라이는 그곳에서 학비를 면제받았고, 원자바오는 반의 학습위원이 되어 열심히 지도했다. 그리고 1960년에는 베이징의 지질대학 지질광산학과에 입학하였고, 10년 넘게 지질의 측량과 광산에 몰두했다. 그것은 오직 국가의 공업건설을 위한 목표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광산개발 시절에 부패한 공무원들과는 달리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책임에는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이른바 국가가 혼란한 때를 틈타 줄타기를 시도한 공무원들이 많았지만 그는 어떠한 곳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 그로 인해 쑨따광 장관의 눈에 들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중앙위원회 판공청으로 옮긴 이후, 점차 총리직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98년에 불어 닥친 홍수의 위기가 그를 총리직으로 밀어 올리는데 큰 계기가 됐다. 그해 6월 중순경에 세기적인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때 장쩌민 주석은 국가재해대책의 총지휘관으로 원자바오를 지명했다. 하지만 7월 중순까지 계속된 폭우로 인해 장강 중하류와 화이허 유역에는 수백 년 동안 없었던 대규모 물난리가 일어났다. 7월부터 8월까지 홍수로 인한 물의 총량만 해도 2448억㎥로 1931년 홍수 기록을 넘어섰다.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8월 22일 집계한 통계로 보면 전국 2억2300만 명이 수해를 입었고, 가옥피해 497만 가구, 수해면적 3억1800만 무에, 피해면적만 1억9006만 무에 달했다. 직접적인 경제 손실만 해도 1666억 위안으로 추산했다.

"이런 세기적인 대재앙 앞에 선비의 풍모를 갖춘 무장 원자바오가 홍수방지의 총지휘를 맡아 수백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홍수와 맞서 대규모 토벌 작전을 벌이고 이를 막아내어 한 시대의 군을 이끈 인물의 풍모를 드러낸 것이다."(131쪽)

후에 후진타오를 비롯하여 여러 중앙위원회의 지지를 받아 총리직에 오른 그는 그야말로 더 큰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된다. 2006년 1월 그는 설날을 맞이해 가난한 농촌지역을 방문했는데, 그때 입은 허름한 점퍼가 11년 전인 1995년 산둥성 쇼우광을 방문했을 때 입은 옷과 똑같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한 네티즌이 발견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23만개의 사이트로 퍼져 온 국민이 알게 됐다. 그 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꿈엔들 그가 생각했겠는가?

그는 내년 3월이면 1차 5년간의 총리직을 마치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능력과 국민적인 열망을 볼 때 향후 5년간 더 맡게 될 것으로 중국 소식통들은 내다보고 있다. 그만큼 중국의 짐이 그의 두 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총리로서 그에게 부여된 과제는 무엇일까?

현재 중국은 동서와 도시와 농촌 간, 지역과 사회 계층 간의 빈부가 분화되었다. 소위 '마태효과(馬太效應)'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마태효과란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그 까닭에 후진타오와 14년간 서북지역 근처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그로서는 서북지역의 개발에 애착을 갖고 있다. 그만큼 그곳은 중국 경제의 최후 낙후지역인 까닭이다. 그곳을 개발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음을 내다보고 있다.

또한 후진타오에 이어 그는 홍콩 경제발전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광둥과 홍콩 경제의 합작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고, 마카오를 포함한 지역의 산업과 기초 건설을 연계하여 대외적으로 주강 삼각주를 널리 확대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식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산당 식 사유재산의 인정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올 초 3월에 전인대(全人大)를 통해 십여 년 째 끌어오던 물권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야말로 토지의 사유재산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기업인 자산가들을 공산당의 주체로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은 일이기도 하다.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上海)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면, 중국은 국민적 수준과 사회 분위기가 한 단계 성숙한 '새로운 국가'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높다. 그와 함께 국민들의 정치적 의식도 크게 성장,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정치개혁'에도 손을 댈 것으로 전망한다."(364쪽)

원자바오

마링.리밍 지음, 지해범 옮김, W미디어(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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