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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번째 독주회에서 관악영산회상을 해금만으로 국악 최초 연주한 변종혁.
ⓒ 김기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을 통해 발전한다고 정리했다. 어느 시대건 항상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받으며 새로운 세대들의 힘찬 도전은 당대를 뛰어넘어 다음 세대로의 전이를 견인했다. 그러나 그 견인동력은 거의 항상 기성의 반발 혹은 저항을 받았으며 그 갈등은 새로운 동력에 대한 좌절과 혹은 분발의 동기로 작용하면서 어쨌거나 현재를 일구었다.

천 년이 흘러도 변치 않을 것 같이 우뚝 선 준령도 세월의 길들여짐은 피하지 못하듯이 변화하지 않을 것만 같은 국악도 이제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새로운 세대들의 도전은 억세기만 하다. 처음에는 그런 국악의 새로움 흐름에 대해 꺼려하던 기성국악인들도 요즘 들어서는 더 이상 그 도전을 적극적으로 막아 세우는 일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결과 현대국악은 마치 전통을 잠시 접어두고 창작된 음악만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게 한다. 물론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와서야 어언 30년을 바라보는 창작국악에 대해 더 이상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없더라도, 묵묵히 옛 음악을 고수하는 더 많은 국악인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과거 그리고 현재를 지나 더 나은 미래국악을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근거가 되어준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을 동양적으로 표현하자만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쉽지만은 않은 것이 온고지신이다. 특히 국악 등 전통분야조차도 마찬가지다. 과거 국악에서는 온고만이 강조된 듯했고, 현대 국악에서는 지신만 활개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를 지배하는 지신의 흐름 속에서 온고의 갈증은 참을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지신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위한 온고의 응전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 패스트푸드가 아닌 어머니가 정성껏 끓여주는 된장찌개, 혹은 싱싱한 풋고추에 된장 찍어 먹는 소박하지만 우리 입맛에 그만인 그런 음식같은 음악을 전하고 싶다는 변종혁의 해금영산회상에는 질박한 연주자의 마음과 정악국악의 유장한이 버무려져 한 상 잘 차려진 밥상을 받은 것같은 37분을 객석에 전달했다
ⓒ 김기

지난 24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제515회 화요상설의 주인공인 해금연주자 변종혁의 무대는 그런 긍정적인 온고의 반란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프르그램을 살펴보면 관악영상회상 독주와 취타, 길군악, 길타령, 군악 등의 합주로 구성되어 있다. 연주곡목만 본다면 그저 평범한 전통적 정악연주로 보이고, 연주회장에서도 변종혁의 숨겨진 반란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 날 연주회는 먼저 변종혁과 제자들이 함께 연주하는 소품들로 구성되었다. 취타, 길군악 등 정악의 대표적인 음악들이었고, 그것을 해금만으로 연주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미 이 날 연주에 담긴 속뜻이 넌지시 비치기도 했는데, 해금이 들어가지만 딱히 해금소리가 도드라지지 않았던 음악들을 해금만으로 연주함으로 해서 해금이란 악기의 음악적 독자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관현악편성의 곡을 해금 하나로 바꾼 것 외에는 기존 정악연주풍 그대로에서 조금도 흐트러진 것은 없다. 그러나 제자들의 의상이 의외였다. 이날 연주회장에서 의상을 놓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이었다. 그만큼 국악계가 많이 변한 것이기에 저으기 격세지감도 느끼게도 하였지만, 음악회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기에 바람직한 현상임에 분명하다. 제자들은 정악연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어깨가 드러나는 서양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제자들과 어울어져 어떤 변화의 곡선이 숨겨진 1부 숨고르기를 마친 변종혁의 본격 독주가 시작되었다. 변종혁이 독주한 곡은 <표정만방지곡>이라 불리는 관악영산회상이다. 영산회상은 연주방식과 악기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작년 현악영산회상을 4도 낮춘 평조회상을 연주했던 변종혁이 올해에는 관악영산회상을 들고 나온 것이다.

▲ 독주 전에 제자들과 함께 취타, 길군악 등 정악소품들을 먼저 연주했다. 정악과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 지금까지로서는 파격이지만 이도 조만간 익숙한 풍경이 될 듯하다. 변종혁은 이 합주에 인간문화재 고흥곤 선생의 도움을 받아 한 제작자의 악기로 편성해 소리의 균등을 추구할 정도로 섬세한 준비를 거쳤다
ⓒ 김기

여기서 잠깐 해금이 현악기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해금은 분명 현악기적 성질을 가졋음에도 국악예선 관악기로 분류한다. 관악영산회상은 삼현육각 편성인 피리2, 대금1, 해금1, 장구1, 좌고1 등으로 구성된다. 합주란 형식이 워낙 그렇기도 하지만 영산회상 연주는 특히나 주선율을 이끄는 피리와 나머지 악기들의 연음형식의 연주가 특징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을 독주로 연주할 때 놓쳐서는 안될 주요한 음악적 맛이라는 점이 된다.

연주 전 대기실로 찾아온 한 제자가 들뜬 음성으로 말도 했지만, 관악영산회상을 아무리 주의깊게 듣는다 해도 사실 해금가락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연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금이 전통적 연주 속에서는 그다지 음악적 존재감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연주장면을 보지 않는다면 해금이 편성된 사실조차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 날 변종혁이 흔한 장구반주조차 물리고 고느적한 무대 위에서 혼자 37분 동안 연주한 관악영산회상 다른 말로 ‘표정만방지곡’은 작년 평조회상에 이어 해금독주로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국악 정악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영산회상은 도드리가 많기 때문에 자칫 느슨한 마음을 갖다가는 더하거나 빼먹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합주에서는 다른 악기들과 호흡을 맞추기 때문에 다소 안심할 수 있지만, 박을 잡아주는 장구조차 없는 혈혈단신의 영산회상은 단 1초도 방심할 수 없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장담할 수 없는 절정의 숙련이 필요하다.

▲ 장구조차 없이 혼자 37분 동안 관악영산회상을 연주한 변종혁
ⓒ 김기

연주를 마치고 변종혁도 소감을 밝힌 첫 마디가 그랬다. “손끝은 전쟁을 치르듯 긴장하면서도 영산회상을 마음으로 들려주기 위해서 정신은 깊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이번 연주에서는 음악을 통한 희희 노노 애애 락락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희희 노노…가 뭐냐고 묻자. “기쁘면 기쁘게, 슬프면 슬프게, 사람이 직면하는 감정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하고 답하였다.

동양철학박사과정을 마친 변종혁이 음악과 함께 철학적 깊이를 더한 주제의식이 아닐까 싶어졌던 대목이다. 관악합주를 해금독주로 연주하는 것도 듣는 것도 처음이었던 연주에 대해 좀 더 의미를 묻자. “도시생활을 하면서 자주 패스트푸드를 먹게 됩니다. 입맛에 맞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 입에 맞지 않더라도 한 끼 정도 그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가가면 따끈한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오늘 음악은 패스트푸드가 아닌 밭에서 갓 따온 풋고추에 된장 듬뿍 찍어서 먹는 소박한 식단을 마련하는 마음입니다”라고 말한다.

변화된 국악환경 속에서 이제 더 이상은 영산회상이나 산조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덮어두고는 또한 국악을 얘기할 수도 없다. 그 본질적인 당위과 발전을 위한 변화의 은유를 담아 고요하게 온고지신의 역동을 담은 뜻깊은 연주였다. 변종혁 개인으로서는 13번째 독주회였던 이 날 연주는 또 다시 국악사에 한 줄을 더하게 한 정악의 작은 반란이었다.

연주 전 리허설이 끝나고 변종혁과 제자들은 서로 정중하게 인사들 주고 받았다. 그 말없는 인사 속에 변화하는 국악의 신구세대가 공유하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사제 간에 오가는 픙경이었다. 변종혁은 퓨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연주자이다. 워낙 정악에 연련과 이해가 깊은 변종혁은 그렇다고 구세대 또한 아니지만 그의 연주회를 오래 지켜보면서 느끼는 고향 같은 아늑함은 세월의 물살이 아무리 거세도 변하지 않을 신뢰감을 준다. 오랜만에 찾아가는 고향동네 멀리서부터 먼저 손 흔들어 반겨주는 당산나무의 그 깊은 뿌리처럼.

▲ 연주 전 리허설을 마치고 변종혀과 제자들은 마주서서 정중한 인사를 나눴다. 평범한 모습같지만 그속에는 변종혁이 국악의 변화를 대하는 넉넉한 수용과 또한 흔들리지 않는 온고의 신념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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