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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회복해 가고 있는 버지니아 텍
정상을 회복해 가고 있는 버지니아 텍 ⓒ 김윤주
버지니아 텍 참사로 이곳, 블랙스버그 전체가 우울함에 젖어 있던 지난 주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가족이 공부를 마치고 다른 주로 이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성이 조(Cho)인 이 가족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버지니아 텍에서 온 조 가족(Cho family from Virginia Tech)', 혹은 '블랙스버그에서 온 조 가족(Cho family from Blacksburg)'라고 인사를 건네며 새 이웃들을 만나고 있다는 우스개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걸 보면 그새 다들 많이 안정된 상태이긴 한가 보다.

어제(미국시각으로 23일)는 버지니아 텍 캠퍼스에서 열리고 있는 희생자 추모 행사 중 하나인 '풍선 날리기'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조승희의 추모석이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선 굵은 필체로 쓰여진 단호한 어조의 편지가 한 장 놓여져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단호한 어조의 편지

추모석은 사라지고 편지 몇 장과 꽃송이들만 남아 있는 조승희의 추모석 자리
추모석은 사라지고 편지 몇 장과 꽃송이들만 남아 있는 조승희의 추모석 자리 ⓒ 김윤주
"조, 너는 우리의 강인함과 용기, 동정심을 과소평가했다. 너는 우리의 가슴을 찢어 놓았지만 우리의 영혼에까지 상처를 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그 어느 때보다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버지니아텍 일원(Hokie)인 것이 지금처럼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 결국엔 사랑이 승리할 것이다. 에린 제이(Erin J.)."

감상적인 '이해'나 '용서'를 넘어선 비장한 다짐으로 다가왔다.

처음 추모석이 등장했을 때 희생자 32명과 나란히 가해자의 그것까지 세워 놓은 미국의 '아량'과 '포용'에 많은 이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게다가 추모석 위에 편지 두어 장이 놓여진 후로는 마치 전미 대륙이 상처 투성이의 '조'를 껴안기라도 한 듯 많은 이들이 감동해마지 않았다.

학생들이 마련해 놓은 32개의 애도의 촛불들
학생들이 마련해 놓은 32개의 애도의 촛불들 ⓒ 김윤주
미국은 진정으로 성숙한 선진국이라며,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안해 하고 불편해 했던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가 반성하는 이들마저 등장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추모석이 세워져 있던 어제도, 추모석이 없어진 지금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 설치해 놓았던 33개의 추모석과는 별개로 캠퍼스 곳곳에 자발적인 참가자들에 의해 설치된 애도의 전시물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게중엔 조승희를 제외한 희생자 32인을 상징하는 전시물들이 벌써부터 늘어서 있었다.

장미 32송이, 국화 32송이, 불 밝힌 초 32개…. 마침내 어제 대대적인 공식행사였던 침묵의 추도식에서 눈물 속에 날려 보낸 하얀 풍선 32개는 '가해자'와 '희생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겠다는 의지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상처 투성이로 떠난 젊은 영혼의 안식과 그 가족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해도 32명의 희생자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가해자를 동일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늦은 밤, 버지니아 텍 희생자 추모석 앞
늦은 밤, 버지니아 텍 희생자 추모석 앞 ⓒ 김윤주
애도의 글을 남기고 있는 학생
애도의 글을 남기고 있는 학생 ⓒ 김윤주
아직 꿈꿔야 할 날이 훨씬 더 많은 한 젊은 영혼이 그렇게도 끔찍하게 상처 받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마침내는 자신과 수많은 소중한 목숨을 앗아가는 파멸로 치달은 것, 가슴 아프고 기가 막히고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그가 그렇게 증오심으로 뭉쳐가는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은 현대사회의 우울한 일면을 보는 듯해 더욱 허탈하기만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분노와 절망도 이런 식으로 표출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외로움과 절망을 짐작할 수도 있고 비슷한 이를 보면 손내밀겠다고 다짐은 해도 좋지만, 그가 저지른 그릇된 행동을 '이해한다'고 쉽게 말해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끝에선 이런 종류의 파멸도 용납될 수 있다고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겨날까 걱정스럽다.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받고 싶어하는 또다른 조승희가 나올까 두렵다.

'치유의 손길들(Hands That Heal)'이라는 제목으로, 손바닥 물감찍기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과 동참하고 있는 시민들
'치유의 손길들(Hands That Heal)'이라는 제목으로, 손바닥 물감찍기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과 동참하고 있는 시민들 ⓒ 김윤주
버지니아 텍이 그동안 내세워 온 학교 슬로건은 'Invent the future'다. 미국 역사에 남을 만한 악몽을 경험하고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는 캠퍼스에서, '미래를 창조하자'는 이 구호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심장한 구호로 들린다.

'침묵의 추도식'에서 희생자의 수만큼 32개의 하얀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다.
'침묵의 추도식'에서 희생자의 수만큼 32개의 하얀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다. ⓒ 김윤주
침묵의 추도식, 파란 하늘을 물들이며 날아 올라간 1000개의 오렌지색, 적갈색 풍선들
침묵의 추도식, 파란 하늘을 물들이며 날아 올라간 1000개의 오렌지색, 적갈색 풍선들 ⓒ 김윤주

덧붙이는 글 | 뉴욕중앙일보에도 중복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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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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