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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수많은 영웅중에서 제갈량만큼 시작부터 끝까지 화려했던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수많은 영웅과 책사들이 명멸했던 후한말의 삼국시대에서 제갈량은 당대의 선구적 지식인이자 뛰어난 정치가, 군사전략가, 외교전문가를 넘나들며 맹활약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제갈량이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이자 '만능 엔터테이너'의 원조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대중이 비범한 천재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경외심 혹은 거리감이다. 오늘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제갈량의 이미지는 99% 이상이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하여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관중은 '촉한정통론'에 대한 동경과 미화가 지나쳤던 나머지, 그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제갈량 역시 현실속의 인물을 벗어난 기인이나 초인에 가깝게 그려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촉한정통론에 비판적인 현대의 역사가나 문학 작가들이 그동안 과대포장된 제갈량의 정치업적이나 군사 능력을 재조명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제갈량이 당대 사회변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반동적이고 비주류에 가까운 유비 집단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활용한 출세주의자이자, 삼국분열을 가속화시켜 전란의 세월을 오히려 장기화시킨 인물이라는, 기존과는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는 과대포장됐나?

그렇다면 제갈량은 그저 과대포장된 인물일 뿐일까?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여명협은 <제갈량 평전>(지훈출판사)을 통해 연의의 신격화된 이미지를 벗어내고 '인간 제갈량'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한다.

일단 저자가 제갈량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우호적이다. 제갈량이 과연 천재이자 비범한 인물인가 하는 질문에 저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연의에서 등장하는 삼고초려나 출사표처럼 제갈량을 빛내주는 일화들에 대하여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기초하여 묘사되는 평전 속 제갈량은 결코 연의에서처럼 신출귀몰한 도사나 신선 같은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냉철하리만큼 합리적 이성과 신중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에 가깝다.

예를 들어 적벽대전에서 하늘의 기운을 빌려 바람의 방향을 되돌리고 화살 10만개를 하루 만에 만들어내는 기적이 사라진 대신, 저자가 주목한 것은 손권과의 연합을 통하여 조조를 격퇴해 '외교전'의 중요성을 보여주거나 형주와 서천 진출을 통해 '천하삼분지계'를 구체화 한 제갈량의 선견지명이다.

평전을 통해 드러나는 제갈량은 '전술가'라기보다는 '전략가'다. 초창기 일개 군사집단에 지나지 않던 유비 세력에게 중장기적인 국가비전의 큰 틀을 제시했으며, 누구보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밝아서 '실리주의 외교'의 중요성을 앞장서서 설파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여기서 저자는 제갈량을 타고난 천재이기 이전에 '준비된 인재'로 규정한다. 연의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세상에 등장하여 천재적인 정치-군사 재능을 발휘한 것 같지만, 제갈량은 일찍부터 제세안민(濟世安民)의 포부를 가지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으며 세상에 나아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사람이 하늘의 뜻도 제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의 정책과 사상에서 일관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라든가, 천하의 정세를 내다보는 정확한 안목과 구체적인 전략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제갈량의 새로운 면모

제갈량이 단지 완벽하고 빈틈없는 천재형 인물이기만 했다면 지금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회자되는 인물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의 제갈량이 파격적인 신분상승을 거듭하며 성공신화를 개척하는 초인적인 영웅이라면, 후반부의 제갈량은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 시행착오 과정 속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고독한 영웅으로 변한다.

주군(유비)의 사후 무능한 후계자(유선)를 보좌하며 보여준 변함없는 충절과 신의, 개인의 사리사욕에 집착하지 않았던 청렴함, 대의를 위하여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충복마저 과감히 처단하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일화 등은 공과 사가 분명하고 신념에 충실한 제갈량의 모습이다.

반면 이루지 못할 꿈을 향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불살랐던 한 남자의 열정이 안겨주는 로망은 제갈량의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준다.

연의에서 북벌의 최대고비였던 사마의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제갈량이 "뜻을 세우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일 뿐"이라며 탄식하는 장면에서 보듯 제갈량은 결코 그 '시대의 승자'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역사의 승자'로 남았다.

비범한 재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실패한 영웅에 대한 아쉬움이야 말로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갈량에 대한 대중의 지지와 연민을 유발하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 신원봉 옮김 | 지훈 펴냄)


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신원봉 옮김, 지훈(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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