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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쟁호투> 이소룡 액션피겨과 함께한 김형언 작가
<용쟁호투> 이소룡 액션피겨과 함께한 김형언 작가 ⓒ 오마이뉴스 천호영
"어린 날의 마음속엔 … 수많은 스타들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꼽으라 한다면, 그는 단연코 이소룡이었다. … 그의 출연 이후, 우리들의 대중문화에 관한 온갖 잡담들은 이소룡이라는 쿵푸 스타에게 집약되었다. 그리고 <당산대형> <정무문> <용쟁호투> <맹룡과강>을 거치는 동안 우리들 가슴속에 그는 어느덧 신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이소룡에 대한 열애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 이소룡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주었다." - 유하,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 중에서

어디 시인 유하뿐이랴. 70년대 초중반 극장이 있는 도시 어름에 살면서 이소룡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내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기자 역시 이소룡 신도였고, 액션피겨(action figure, 관절 등을 움직일 수 있는 작은 인형) 작가 김형언(43)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초등학교 때 동네 작은 극장에서 <정무문>을 보고, 영웅을 만나고, 이소룡이란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어릴 때 또래하고 똑같았죠. 또래 친구들보다 더 이소룡 광이었던 것 같아요. 흉내 내려고 굉장히 애를 썼어요. 쌍절곤을 독학해서 친구들에게 전수하고, 이소룡 바지도 맞춰서, 그때 저희 집이 양장점을 했었거든요, 입고 그랬어요. 태권도도 배웠는데, 발차기를 꽤 잘했었죠.(웃음)"

부활한 이소룡의 분신들

전시중인 이소룡 액션피겨들
전시중인 이소룡 액션피겨들 ⓒ 김형언 블로그
이소룡과 할리우드 유명 영화배우의 피겨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형언 작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 벨벳갤러리를 찾았을 때, 그는 먼저 지하 전시장으로 안내했다. 서늘한 지하 공간, 다소 어두침침한 조명 밑, 거기 이소룡이 있었다.

웃통을 벗어젖힌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이소룡(<맹룡과강>), 노란 트레이닝복 차림에 쌍절곤을 들고 있는 이소룡(<사망유희>), '동아병부(東亞病夫)'라 쓰인 액자를 옆에 세운 채 울분을 삼키고 있는 이소룡(<정무문>). 또 거울방 안의 이소룡은 가슴과 배에 상처를 입은 채 날카로운 눈매로 노려보고 있다(<용쟁호투>).

비록 12인치, 실제 크기의 약 6분의 1에 불과한 모형이지만 마치 부활한 이소룡의 분신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지하 전시실 어디선가 쌍절곤의 붕붕거리는 소리와 이소룡 특유의 괴조음이 들려오는 듯도 했다.

김형언 작가가 피겨 제작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2001년. 중학교 시절 누나에게 선물 받은 '지아이조'라는 액션피겨에 대한 추억에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소룡 피겨를 발견했다.

"그래 구입했는데 너무 조악한 거예요. 이소룡이 굉장히 잘 생겼는데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 게 화도 나고 어처구니도 없고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또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던 이소룡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며 그 결심을 더욱 부추겼다.

"다른 캐릭터와 달리 이소룡은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 만든 거예요. 입체적으로 보고 싶어서. 그런 열정이 다른 캐릭터보다 훨씬 강했죠. 사실 밀랍인형에도 관심이 많은데 브루스 리는 밀랍인형조차 완벽한 게 없어요. 그리고 밀랍인형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잖아요. 그걸 축소하면 어떨까 많이 생각했었죠."

인터넷을 통해 피겨 재료를 찾고, 눈동냥 귀동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금속공예를 전공한 게 도움이 됐다. 또 이미 고교 시절 지점토를 이용해 이소룡을 만들어본 경험도 있었다. 2002년 11월 첫 작품을 완성했다.

"<사망유희>에 나오는 이소룡을 18인치로 만들었는데, 얼굴이 너무 엉망이었죠."

<용쟁호투> 이소룡 액션 피겨
<용쟁호투> 이소룡 액션 피겨 ⓒ 김형언 블로그
뺨의 흉터에 여드름까지 만들어 넣었지만...

<사망유희> 이소룡 피겨의 얼굴 모습
<사망유희> 이소룡 피겨의 얼굴 모습 ⓒ 김형언 블로그
그는 이소룡의 무술과 무도보다 얼굴과 골격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어니의 작은 세상', blog.dreamwiz.com/gud2js)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나는 브루스 리가 남성으로서 가장 완벽한 골격을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의 이목구비는 동서양의 결합으로 완성된 신의 예술작품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지기에… (그의 모친이 독일계 혼혈이다)… 단지 그 때문에… 내가 브루스 리를 만들게 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당연히 그만큼 작품에 공을 많이 들였다. <용쟁호투>의 이소룡 피겨를 만들 당시 블로그에 올린 작업노트에서 그가 얼마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는지 엿볼 수 있다.

"뺨의 흉터는 복제 과정 중 조금 흐려지므로 조금 강조했다. 여드름 몇 개 더 만들어야 되는데… ETD(Enter The Dragon, <용쟁호투>의 영문 제목 - 기자) 촬영 당시 BL(Bruce Lee - 기자)의 피부상태는 좋지 못했다. 브루스 리의 얼굴을 파고든 지 어느덧 3년 6개월이 흘렀다."

이번 전시회의 디렉터인 정형탁씨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일반 피겨와는 달리 표정과 골격이 세밀하다"면서 "무엇보다 그의 작품의 진수는 눈매의 생생함에 있다"고 평했다.

이어 정씨는 "'인물의 형상보다는 사람의 정신적 내면을 전해야 하는 것이 초상화의 생명이며, 그것은 눈동자의 묘사에 있다'고 한 옛 고개지의 말을 김형언은 입체작품으로 살려내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그렇지만 정작 그 자신은 만족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이소룡 하면) 포효하는 인상이나 액션하는 표정을 많이 상상하는데 사실 이소룡은 그 얼굴이 아니에요. 실제 그만의 표정이 있거든요. 그걸 만들어내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요. 아직 완성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려운 얼굴입니다."

이소룡의 미망인과 딸을 만나다

2003년 이번엔 좀 더 제대로 된 작품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그게 운명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마침 이소룡 사후 30년이 되는 해였다. 피겨 동호인과 이소룡 팬 등 소수지만 네티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해외에서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04년 홍콩사람이 운영하는 한 미국 피겨업체로부터 사업 제의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쉽게 얘기해서 샘플을 갈취해 갔어요. 샘플은 돌려주지 않고 그걸 복제해서 팔았죠. 결과적으로 사기를 친 거죠." 그는 실의에 빠졌다.

출시예정인 <맹룡과강> 액션피겨 시리즈
출시예정인 <맹룡과강> 액션피겨 시리즈 ⓒ 엔터베이
그러던 2005년 9월 홍콩의 피겨업체인 엔터베이에서 연락이 왔다. 아픈 경험 때문에 몇 번 거절했으나 그들은 메일로 계속 설득했다. 그렇다면 와서 얘기하라고 했더니, 1주일 만인 그해 10월 그들이 서울로 날아왔다.

무엇보다 제품의 질을 우선한다는 데 동의했다. 계약을 맺고, 초상권에 대한 라이센스도 확보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첫 제품인 <사망유희> 시리즈를 출시했다. 3500개 한정판, 가격은 300달러. 적지 않은 금액이다.

"사실 그 정도 가격에 3500개가 팔릴 수 없는 거였죠. 1000개 팔기도 힘든 게 피겨시장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힘을 좀 줬죠. 이소룡이니까 가능하다, 제품의 퀄리티만 생각하자. 결국 엔터베이 사장이 모험을 한 거죠."

모험이 적중했다. 일본 시장에서만 2000개 가까이 팔렸다. 그에 힘입어 이달 말이나 내달 초 두 번째 시리즈인 <맹룡과강>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에는 좀 더 넓은 시장, 미국시장을 겨냥해 "고민 끝에" 250달러로 가격을 내렸다.

지난해 7월 롱비치 마샬아트 페스티벌에서 이소룡의 미망인(가운데)과 딸을 만났다.
지난해 7월 롱비치 마샬아트 페스티벌에서 이소룡의 미망인(가운데)과 딸을 만났다. ⓒ 김형언 블로그
지난해 7월, 제품 출시를 앞두고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만화·애니메이션박람회 코미콘에 초청받아 시제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코미콘은 공교롭게도 7월 20일, 이소룡의 기일에 열렸다. 이어 롱비치 블랙벨트 마샬아트 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 그때 이소룡의 미망인 린다 여사와 딸 샤논 리가 그의 부스를 방문했다.

"사진집에서만 보던 양반들이잖아요. 굉장히 흥분했었죠. 사람들도 많이 모여 사진도 찍고, 기자회견장 같은 분위기였죠."

편지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린다 여사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온 많은 남편 인형들 가운데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마치 꿈만 같았다.

CF감독, 뮤지션에서 피겨 작가로

89년 대학을 졸업할 당시부터 그가 피겨 작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는 졸업과 함께 한 CF프로덕션에 조감독으로 입사했고, 2년 만에 가장 어린 나이로 감독에 '입봉(데뷔)'했다. D변비약 등 CF도 찍었다. 그런데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새끼감독' 노릇을 해야 했다.

1년 만에 CF 감독생활을 접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죠." 그의 꿈은 가수, 뮤지션이었다.

지난해 7월 마샬아트 페스티벌에서 전시 작업 중인 김형언씨.
지난해 7월 마샬아트 페스티벌에서 전시 작업 중인 김형언씨. ⓒ 김형언 블로그
"솔로 앨범 내고, 망하고(웃음), 듀엣 앨범 2장 내고, 또 망해 2001년 완전히 백수가 됐죠. 2002년은 굉장히 힘든 시기였는데 월드컵이 열리는 바람에 정신적으로는 아주 즐거웠습니다(웃음). 제가 축구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이때의 감동을 간직하기 위해 만든 차범근 감독과 히딩크 감독의 피겨도 이번에 함께 전시되고 있다. 어려운 시기 피겨 작업은 그에게 정서적 안정을, 그리고 이후 경제적 여유도 가져다주었다. 그 덕에 '사이먼 앤 가펑클' 동호회원들과 '싱글즈 밴드'를 구성해 공연도 하고 있다(사이먼과 가펑클의 흉상도 전시돼 있으며 전시회 마지막 날인 5월 6일 갤러리에서 자축 공연할 계획이다).

"저는 원래 뮤지션이라고 하죠. 음악은 항상 마음속에 있으니까. 제가 추구하는 음반을 꼭 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두각을 나타내는 건 피겨 쪽이기 때문에(웃음), 취미나 부업이 본업이 된 것 같아요."

취미가 본업이 되면서 또 하나의 꿈이 더해졌다.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들을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표현해내서 그림과 피겨가 있는 작은 전시회를 갖고 싶다"는 소망은 이번 전시회에서 일부 이뤘다.

앞으로 그는 "이번엔 게을러서 못했는데" 이소룡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일대일 크기를 비롯해 다양한 크기의 이소룡을 만들고도 싶다. 작품이 준비되는 대로 다시 작은 전시회를 열려고 한다. "언젠가는 그 꿈도 꼭 이루고 싶어요."

덧붙이는 글 | ※ '김형언의 피겨세계' 전시회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벨벳갤러리 홈페이지(www.velvet.or.kr)를 참고하세요. 전화 736-7023.


#이소룡#김형언#액션피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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