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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당신이 가르쳐준 태백산맥 속의 소광리 소나무 숲에서 이 엽서를 띄웁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소나무 숲에 들어서니 당신이 사람보다 나무를 더 사랑하는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 -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중

신영복 선생은 참 나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는 소나무를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운 혈육과도 같은 나무"라고 표현했다. 그의 글을 읽은 후, 저 찻길 옆 매연을 들이마시는 가로수만 봐도 마음 한구석이 아려 오곤 했다.

사실 굳이 신영복 선생을 언급할 것도 없다. 나무와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다. 나무는 이미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축복이다. 파란 하늘과 어울리는 초록빛의 경쾌함을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끔은 우리에게 쉬어갈 그늘을 주기도 한다. 그것뿐인가. 나무는 우리에게 정신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소나무는 고절(高節)의 상징으로 우리의 정신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왔다.

문학적인 언급을 자제한다고 하더라도,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축복 중 누구나 알고 있고 너무도 중요한 것이 있다. 이는 과학과 밀접히 연결된 부분이다.

초등학교의 수업을 떠올려 보자.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한다. 그 잎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한다. 이는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다. 때문에 나무와 숲을 보존하는 것은 요즘 세계적 화두인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나무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나무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 오랜 상식을 깨는 발표가 나왔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Economist)가, 지역에 따라 나무를 자르는 것이 지구의 온도를 낮추는 데 기여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현재 세계사회가 지구 온난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음은 그 기사의 핵심을 정리한 내용이다.

<<캘리포니아의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 실험실(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의 발라(Bala) 박사는 컴퓨터를 통해 지구 온난화에 관한 한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 숲의 조건을 달리 했을 때, 지구가 온실가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발라 박사는 지구 안에 숲이 차지하는 지역을 풀만 있는 지역으로 대체했다. 즉, 가상으로 숲을 모조리 없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실가스가 얼마나 변화하는 가를 측정하고, 그 변화가 지구의 온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알아보았다.

결과는 이렇다. 박사가 숲의 나무를 다 잘라내는 것을 가정했을 때, 지구의 온도는 섭씨 1.3도 가량 높아졌다. 이산화탄소 증가 때문이다. 그러나 반사율의 증가로 인해서(나무가 없으니 눈이 온 후 덜 어두워지게 됨, 결국 태양열 흡수 감소) 지구의 온도는 섭씨 1.6도가 낮아졌다. 발라 박사가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한 논문의 결론은 결국 벌목은 지구 온도를 0.3도 가량 낮출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단, 이것은 고위도 지방에 국한된 이야기다. 반면에 저위도 지방은 온도가 더 높아졌다. 왜냐하면 나무가 없어져 땅의 수분을 대기로 증발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매개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무조건 나무를 자르는 것이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다고 단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발라 박사의 가상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 있다.

러시아나 캐나다와 같은 북반구 지역에서는 나무를 자르는 것이 지역 온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산화탄소가 온도를 높이더라도, 이 지역은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기에 반사율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빽빽한 숲 속 나무들 위에 걸려 있는 눈들 때문에 어두워진 지역이 흡수하는 태양열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적도 지역에서는 나무를 자르는 것은 해가 된다. 지구의 온도를 더욱 높이는 결과만 낳는다. 땅의 수분을 증발시켜줄 매개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

발라 박사의 주장은 기존 통념에 비춰볼 때 일종의 충격이다.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라 박사의 연구는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좀 더 현명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산화탄소를 위시한 온실가스 배출 외에도 지구 온난화의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음을 각인시키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지역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온난화 피해가 온실가스가 야기하는 것만큼이나 크다는 것이다. 연구결과가 좀 더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다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겠다고 고위도 지역에 나무를 심는 것은 정말 비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좀 더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발라 박사 주장의 설득력이 높아지려면 컴퓨터를 통한 가상의 결과가 아닌 실제 연구 결과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만약 그 과정을 거쳐 현실에서도 발라 박사의 주장이 입증된다면 이 연구는 지구 온난화 문제를 푸는 데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 점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1970년 미국의 자연보호론자들이 모여 만든 이날은, 전 인류에게 환경오염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행사가 열렸다.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기후변화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수준도 그리 높지 못하다.

기후에 대한 관심은 일회성 행사로 그쳐도 안 되고, 정치적인 행사로 전락되어서도 안 된다. 이는 우리의 미래이자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관련 연구에 관한 지원도 늘어날 것이다. 발라 박사의 연구는 단순히 믿어오던 통념이 해(害)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속적인 연구와 끊임없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관행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뉴 인터내셔널리스트(New Internationalist)" 공동 편집자 중 한 사람인 디냐르 고드레지(Dinyar Godrej)는 그의 저서 "기후변화, 지구의 미래에 희망은 있는가?"에서 이렇게 썼다.

"열병으로 아플 때 우리 몸의 온도는 정상 상태인 36.7도에서 37도까지 치솟는다. 0.3도의 미약한 상승에도 정상이었던 우리 몸은 당장 아프다는 신호를 보낸다. 온도 변화에 대한 인간 몸의 반응은, 전 세계 언론의 머리기사로 자리 잡은 기후변화 현상을 인식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지구의 날을 맞아, ‘기후 변화’와 ‘환경 전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의 수준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한국문학번역원 교류홍보팀 김아영님이 번역을 도와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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