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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내려다 본 송용억 가옥 풍경.
길 위에서 내려다 본 송용억 가옥 풍경. ⓒ 김유자
어제(18일)는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송용억 가옥의 봄이 얼마나 진척되었나 염탐하러 갔습니다. 해마다 커다란 꽃뫼를 만드는 이 집의 크고 오래된 자산홍과 영산홍이 언제 쯤에나 피어날런지 들여다 보러 간 것이지요.

이 집의 영산홍과 자산홍은 빨라야 5월 초에나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5월이 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에 벌써 꽃이 피었으리라곤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의외로 이곳은 벌써 꽃이 피어 야단법석입니다. 지구의 배꼽 시계가 왜 잘못됐는지 알 수 없지만 송용억 가옥의 영산홍과 자산홍은 벌써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년보다 거의 보름 정도는 빠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송용억 가옥 대문 주위 풍경.
송용억 가옥 대문 주위 풍경. ⓒ 김유자
대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큰 사랑채 앞 뜨락엔 활짝 핀 자산홍 아래서 아주머니들이 호미로 잡초를 솎아내고 있었고 작은 사랑채인 오숙재 앞 마당 자산홍 꽃뫼 앞에는 저처럼 꽃냄새를 맡고 찾아온 구경꾼들이 벌써부터 기념 촬영에 열중이었습니다.

방문객들이 작은 사랑채 오숙재 앞마당에 핀 자산홍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작은 사랑채 오숙재 앞마당에 핀 자산홍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 김유자
송용억가 옆에 자리한 연못.
송용억가 옆에 자리한 연못. ⓒ 김유자
오숙재 앞 마당 자산홍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산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곳을 '꽃뫼'라고 부르지요. 꽃뫼는 아직 만개하지 않아서 제가 지어준 이름에 걸맞는 면모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자산홍에 섞인 자주색 때문일까요? 뒷곁의 고려 영산홍이 요염하고 거침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여기 이 자산홍은 약간 처연하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제 자신이 소심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전 거침없는 아름다움보다는 그늘이 진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 좋아한답니다. 영산홍보다는 자산홍을 더 좋아한다는 얘기지요.

오숙재 토방에 서서 담장 밖을 내다보니 한 방문객이 조용히 연못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문득 책에서 읽은 장자와 혜자의 대화가 떠오릅니다. 연못에 물고기가 노는 걸 보고 장자가 '어락(魚樂)"이라고 하자 혜자는 "당신이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는가?"라고 비아냥 거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자는 혜자에게 다시 반박합니다. "자네가 내가 아닌데 어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단정)하는가?"라고 했다는 얘기.

장자가 물고기의즐거움을 알았건 몰랐건 상관없이 고요한 수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큰 사랑채인 소대헌 앞 뜨락에 핀 자산홍.
큰 사랑채인 소대헌 앞 뜨락에 핀 자산홍. ⓒ 김유자
큰 사랑채인 소대헌 앞으로 다가갑니다. 이곳의 자산홍은 벌써 만개해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래 바라보면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그런 아름다움입니다. 이젠 화려했던 꽃 시절을 다 보내고 빈 가지로 남은 담장 밖 살구나무가 자산홍을 약간 질시어린 표정으로내려다 보는 듯 합니다.

"이봐, 자산홍. 너무 그렇게 으스대지마. 너만 그런 시절이 있는게 아니야. 내게도 그런 꽃시절이 있었거든. 꽃이 피는 건 잠깐이야. 꽃은 어디까지나 열매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인 거야. 난 이제 조용히 그 열매를 기다리고 있어. 사람들은 시고 달고 때로는 떫은 내 열매를 몹시 좋아하거든."

"저도 알아요, 살구나무님. 모든 꽃들이 덧 없다는 거. 하지만 덧이 있느니 없느니 너무 따지진 마세요. 너무 시시비비가 분명하면 즐거움이란 사라지는 법이니까요. 어떤 꽃에게나 나름대로 그 시절을 즐길 권리는 있는 거라구요."

둘의 다툼을 보다못한 모란꽃 봉오리가 그만 두 귀를 막고 돌아앉습니다.

"아, 꽃의 세계나 인간세계나 기성세대란 왜 한결같이 저 모양이지?"

소대헌 뒤안에 핀 자산홍.
소대헌 뒤안에 핀 자산홍. ⓒ 김유자
소대헌 뒤안의 고려영산홍이 망울진 채 피어날 때를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소대헌 뒤안의 고려영산홍이 망울진 채 피어날 때를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 김유자
안채인 호연재 지붕과 고려영산홍.
안채인 호연재 지붕과 고려영산홍. ⓒ 김유자
이번엔 소대헌의 뒤뜰로 돌아가 봅니다. 이곳의 자산홍도 이미 활짝 피었습니다. 그 곁의 수령 350년이나 됐다는 고려 영산홍은 아직 봉오리를 굳게 닫은 채 필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습니다만. 스타는 맨 나중에 "짠~"하고 나타난다지요? 아마도 이 고려영산홍은 그렇게 이 집안의 모든 꽃이 피고나서 맨 나중에 필 것 같습니다.

소대헌 뒤안의 자산홍과 바로 그 옆에꼭 붙어있는 영산홍은 마치 부부 같습니다. 자색을 띤 자산홍과 진홍색 영산홍이 함께 피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은 몇 배로 상승하는 듯 합니다. 처량한 홀아비 같은 자산홍은 이제나 저제나 화려하고 요염한 고려영산홍이 피어나서 자신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길 고대하지 않을까요?

호연재 뒤에 자리한 장독대.
호연재 뒤에 자리한 장독대. ⓒ 김유자
안채인 호연재 뒤엔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독대엔 크고 작은 독아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장독대를 보면 살림 돌아가는 깜냥을 알 수 있다는데 이 집의 안 주인의 살림살이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안주인인 윤자덕 여사는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 송순주 보유자랍니다.

장독대 주위도 온통 꽃천지지요? 뒤로는 아주 커다란 자목련이 만발해 있구요, 그 앞에는 흰철쭉과 왜철쭉이 나름대로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습니다. 여기선 웬만해선 내가 꽃이라고 함부로 명함도 못 내밀 형편이랍니다.

호연재 시비 주변에 피어난 왜철쭉.
호연재 시비 주변에 피어난 왜철쭉. ⓒ 김유자
아쉽지만 이 쯤에서 꽃구경을 끝낸 다음 송용억가를 나섭니다. 호연재 시비 주변에도 갖가지 꽃들이 만발했습니다. 얼핏보면 송용가의 마당에 핀 자산홍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곳의 꽃들은 거의 키가 작은 왜철쭉입니다. 왜철쭉은 요즘 길가를 가다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지요.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긴 하지만 송용억가의 영산홍과 자산홍을 만나러 가는 길은 즐겁습니다. 3~400년이나 늙은 집이 어느 땐 자신의 한 구석을 여백으로 놔뒀다가 어느 땐 그 여백을 부랴부랴 채워넣는가를 바라보면서 깨닫습니다. 아, 저렇게 늙은 집도 자신을 가꿀 줄아는 전략을 숨겨놓고 있구나. 수일내로 다시 한 번 다녀가리라고 다짐하면서 길을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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