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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민예총 주최로 '다시, 민족을 고민하며' 포럼이 열렸다.
지난 13일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민예총 주최로 '다시, 민족을 고민하며' 포럼이 열렸다. ⓒ 컬처뉴스

지난 1월 27일 민족문학작가회의(작가회의) 정기총회에선 단체 이름 변경 안건을 놓고 회원들간 격론이 오갔다. "시대가 변한 만큼 '민족'이란 명칭을 떼어내자"는 주장과 "문학을 포기하더라도 '민족'을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으나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개명 결정은 무기한 연기됐다.

총회는 끝났지만 논쟁은 이어졌다. '민족문학' 찬반론이 잇달아 각 언론지상에 실렸다. 또 논쟁은 확산됐다.

현재 '민족'을 돌림자로 쓰고 있는 진보적 예술단체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비롯 한국민족극운동협회, 민족미술인협회, 한국민족음악인협회, 민족사진가협회, 한국민족서예인협회, 민족굿위원회 등. 이들 역시 단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작가회의와 비슷한 갈등을 겪고 있다.

특히 단순히 명칭 변경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고민은 더 깊어져 가고 있다. 명칭만의 문제라면 요령껏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민예총은 국제사회에서 '극우 민족주의'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영문 명칭으로 'The Korean People's Artists Federation'을, 즉 '민족(National)'이 아니라 '민중(People's)'을 사용하고 있다.

민족문학 또는 민족예술 논쟁의 핵심은 '명칭'이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이고, 향후 노선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이 논쟁은 '민족예술이 실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성찰부터, '여전히 민족예술(운동)이 유효한가'라는 실천적인 인식까지 아우르고 있다. 과연 민족예술의 '이후'는 어떻게 될까.

지난 13일 민예총이 서울 충무로아트홀에서 '대화 : 다시, 민족을 고민하며 - 민족과 민족주의, 민족예술의 문제들'이란 주제로 민족예술 찬반론자들이 함께 참석하는 토론의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

[임지현 교수] "임권택 감독의 '한'은 서양 겨냥한 것"

임지현 교수
임지현 교수 ⓒ 컬처뉴스
먼저 첫 발제자로 탈민족주의의 대표 논객인 임지현 교수(한양대 역사철학부)가 나섰다. 임 교수는 <당대비평>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우리 안의 파시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등의 저서를 통해 '민족주의의 극복'이라는 뜨거운 이슈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이날의 주제도 화끈했다. '민족예술은 실재하는가'. 그리고 부제는 '민족으로부터 예술 구하기'.

임 교수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 결론부터 내놓았다. "'실재'로서의 민족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퇴적물을 민족의 잣대로 재단하는 민족예술은 '지각된 현실'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임 교수는 한국미술사를 중심으로 "문화와 미술을 민족이나 국민국가의 잣대로 재단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회의"를 드러냈다.

그는 "민족미술(예술)론은 식민지 시기 주변부 민족주의의 인정투쟁에서 출발했다"며 "해방 이후, 특히 197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건 유신 독재의 시대정신이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을 절실하게 요청했던 상황과도 관련돼 있다"고 주장했다.

"박진영을 보라, '민족예술'의 낙인은 억압이다"

임 교수는 "'민족예술'은 그 틀에 맞지 않는 다양한 예술 활동이나 작품들을 '잡동사니'로 억압한다"고 비판하면서 "'민족예술'이라는 억압적 추상을 벗어버리고,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퇴적물로서의 문화와 예술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와 관련 임 교수는 '한'을 앞세우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대해 "한국의 영화 관객이 아니라 '서양'의 영화 평론가들을 겨냥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직접 비판했다.

반면, 박진영의 '한류' 관련 발언에 대해선 "자신의 음악적 작업을 '한류'의 틀로 묶어버리는 데 대한 대중음악가 박진영의 항의는 '민족예술'이라는 낙인이 한 예술가에게 얼마나 큰 억압으로 다가오는가를 잘 드러내주는 예"라고 간접 옹호했다.

[정지창 교수] "민족 의미 바뀌는 것 당연하지만, 통일될 때까지는"

정지창 교수
정지창 교수 ⓒ 컬처뉴스
반면,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정지창 교수(영남대 독문과)는 "'민족'이라는 개념도 시대 상황이 바뀌면 필요가 없어지거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점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민족이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해도 좋을 것"이라는 유보적 입장을 표명했다.

정 교수는 또 "그동안 왜곡되고 조작된 민족 담론의 폐해와 모순을 파헤치고 까발리는 작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민족통일을 위해 민족주의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 교수는 민족예술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1970년대와 80년대 진보적 예술가들은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연관된 예술을 민족예술로 불러왔다"며 "그러나 이제 민족예술은 뿌리부터 위협받고 있고, 무의식과 일상에서의 민족예술은 존재하지 않는 게 문화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마지막으로 "지금은 분명 민족적 특수성보다는 세계시민적 보편성이 환영받는 시기지만, 보편성은 대개 강자의 논리"라고 경계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한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특수한 현실이며 이것은 여전히 민족문학과 민족예술의 존립근거가 되고 있다"면서 "그렇다면 민족통일을 이룰 때까지 민족문학과 민족예술의 기치를 내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고 주장했다.

[토론자들] 민족예술은 여전히 진보적인가

이날 토론자들은 크게 긍정과 부정으로 입장이 갈렸다.

주장의 근거는 각자 다른 부분이 있었지만 강성원 미술평론가와 임동확 시인이 긍정론을, 윤해동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와 홍기돈 문학평론가는 부정론을 펼쳤다. 한편 백원담 교수(성공회대 중어중국학)는 시야를 확장해 '아시아 민족주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먼저 긍정론. 강성원 미술평론가는 "임 교수의 민족예술 비판이 안휘준의 '아트워크로서의 민족미술', 박정희의 '국가동원 민족문화'와 민미협·민예총의 '진보적 민족주의로서의 민족예술'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예총이나 민미협 등이 했던 것은 바로 '민족'이란 개념 밑의 그 같은 은폐된 작동방식을 비판하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또 임동확 시인은 우선 "서구문명의 침략·분단모순·독재체제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민족예술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죽은 개'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나아가 지금 "민족문학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자칫 미국 중심 신자유주의 노선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을 넘어, 스스로 안방을 내주고 유무형의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홍기돈 문학평론가는 "민족적인 위기상황이 여전히 위협이라면, 이와 관련한 논의들은 6ㆍ15민족문학인협회를 통해 가능하다, 작가회의는 열린 자세로 다른 일들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는 "현재 작가회의는 고답적인 민족문학의 틀에 갇힌 나머지 젊은 세대의 문학을 끌어안지 못하고, 날로 변두리로 밀려가는 형편"이라고 진단한 뒤 "'민족문학'이란 이름으로 다른 가능성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해동 교수는 "70·80년대 민족문화 담론이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은 인정한다"면서도 "민족예술은 관변민족주의가 내세운 전통ㆍ민족문화의 파생물이고 양자는 '비의도적 공모'의 결과"라고 규정했다.

그는 특히 "역사에서 보더라도 민족이라는 집단적 가치가 우세한 사회에서는 예술인들의 상상력·창의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한국 민족주의' 넘어서 '아시아 민족주의'로"

한편 백원담 교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장한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 일국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지역주의ㆍ세계주의로서 '아시아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날 포럼 자리에선 주제가 뜨거운 현안인 만큼 예정시간을 넘겨 4시간 이상 열띤 공방이 전개됐다. 물론 대부분의 토론회가 그렇듯이 합의점 도출보다는 인식 차이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 채 끝났다. 그렇더라도 이날 포럼에서 주제 앞에 명시한 대로, 이를 계기로 우리 시대 예술의 소명에 관한 '대화'가 더욱 치열하게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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