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벽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걸려온 아들녀석의 전화였습니다.

오전 7시니까 새벽은 아닙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세탁업을 하는 저희 부부에겐 일요일이 유일한 휴일이고 지난 일주일의 피로를 푸는 일요일 오전 7시는 잠에 빠져 있는 새벽과 다름없습니다.

그토록 싫어하던 이민생활을 접고 이민 온 지 5년만에 한국으로 되돌아가서 중학검정과 고교과정 검정시험을 막 마치고 시험 잘 보았다는 기쁜 소식을 엄마 아빠께 조금이라도 빨리 알리려는 아들의 성급한 전화벨이었습니다.

"엄마, 나 시험(고교검정고시) 잘 보았어!"

그 한마디로 시작된 아들과의 통화는 1시간을 넘겼습니다. '나는 한국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란 차디찬 말을 남기고 이곳을 떠난 녀석이 우여곡절 끝에 어제 고교과정을 마치는 검정고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다들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한국을 떠나는 마당에 우리 아들은 이곳 캐나다의 교육과정을 채 마치지 못하고 다시 자신이 한국에서 마친 초등 6학년 과정에 이어 중학과정, 고교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것입니다.

지난해 3월 검정시험에 대비하여 1년 남짓의 기간에 중고교 과정을 마친 것입니다.

물론 교육열이 높은 한국의 학부모들에겐 시답지 않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01년 2월 두아이를 데리고 이곳 캐나다로 이민 온 이민가정에서 5년간의 캐나다 학업을 완전하게 '무(無)'로 돌리고 배낭을 메고 떠난 아들은 이제 부뚜막에 놓아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아이가 아닙니다.

한국간 지 5개월만에 중학검정을 마치고 이어 어제 한국시간으로 4월 15일 일요일에 실시된 고교검정을 마친 것입니다.

여기서 10학년을 마쳤으니 의당 중검과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고모가 살고 있는 부산의 교육청 장학사란 교육공무원은 7학년 성적부가 없다는 이유로 '이 아이는 중검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거죠.

이곳 북미의 학교는 알다시피 9월에 학년이 시작됩니다. 초등학교 6년 졸업 후 2월에 이민온 우리는 이곳으로는 7학년 2학기가 되는 봄에 입학을 했습니다. 당연히 이곳 성적표에는 불과 2~3개월만 7학년 공부를 한 우리 아이에게 점수를 주지 않았고 아이는 바로 8학년으로 진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 차디찬 공무원은 거절하였습니다. 제가 이민생활과 아이들 조기유학에 얽힌 이야기를 연재식으로 오마이뉴스에 올리려는 시도를 한 이유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정을 알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기유학으로 인한 폐단이 너무도 눈에 보이는데도 서울의 강남역등에 있는 '이민 브로커' '유학 브로커'들에게 등 떠밀려 오는 아이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입니다.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진실의 양면성'이란 문제로 기사 게재를 접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 아들 자랑을 해야 합니다. 왜 조기유학을 보내려 야단들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공교육이 무너졌다고 야단이지만 이곳에서 바라본 한국의 교육은 너무나 건실하게 보입니다. 저희가정의 눈에는 말이죠.

아들은 빼앗긴 한국에서의 중·고교 6년과정을 그리도 애석하게 느꼈고 자신은 검정을 통해서라도 그 과정을 밟고 한국아이들과 똑같이 '수능시험'을 통하여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가끔은 '역유학'에 대한 기사도 신문에 나더군요. 우리와 같은 가정도 있구나 싶어 반갑게 읽어보면 미국사회에서 더 뛰어난 차별화를 추구한 그런 자랑거리 기사였습니다. 우린 승자독식의 한국사회에서 견디기 어려워 이민을 왔습니다. 못난이들의 가족들이죠. 그런 아들이 이곳 외국학교에서 겪은 생활을 되새길 적마다 이민 온 것을 눈물로 후회했습니다.

아들녀석은 단 한 명의 친구 없이 '실어증'에 가까운 5년간의 학교생활을 묵묵히 견디다가 살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것입니다. 영어라고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어설프게 배운 실력이 전부인데 반하여 우리가 캐나다에 올 적의 이곳 아이들은 7학년으로 영어로 에세이를 적어내는 실력이었죠.

소심한 성격의 아이는 점차 말문을 닫았고 학교생활은 고문에 가까운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코스라고 신규이민자 학생을 돕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닫힌 아이의 마음까지 열지는 못했습니다.

'페리'라는 콧수염 더부룩한 이태리계 남자ESL선생은 저를 만나자고 하더니 아이가 전혀 말을 하지 않으니 '이 아이의 목에 이상이 있으니 의사께 진찰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세컨더리(고교)학교에 진학해서도 같은 말을 들은 우리 부부는 이비인후과 전문의까지 찾아서 아이의 목을 검사했으나 전혀 이상이 없었습니다.

생업으로 택한 세탁소의 격무로 지친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돌볼 여유, 특히 심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주위의 '기러기' 아줌마들은 아이 자랑이 대단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몽땅 거짓말이기 일쑤입니다. 체면문화에 익숙한 이곳 한국인들은 다들 아이 교육은 얼버무리기 십상이고 많은 수고를 들였으니 그 수고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아들은 경기도 이천의 이모집, 그리고 부산의 고모집을 이어 홀로 서울에 하숙을 정하고 수능대비 학원을 다니려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랑캐 문화'라고 그토록 싫어하던 이곳 캐나다생활을 접고 한국역사에 대한 책만 유독 탐독하던 아이가 자신에게 맞는 대학을 선정하고 묵묵히 재수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실어증'이라는 판정까지 받은 캐나다에서의 수모를 자신이 태어난 한국땅에서 한 꺼풀씩 벗겨내고 있습니다.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수만리를 돌아가듯 이곳 캐나다의 겨울 빙판길을 5년간 걸어서 친구 없는 외국학교를 단 한 마디 말없이 다닌 녀석입니다. 생각할수록 대견하고 생업을 다 포기하고 달려가 배려해주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세탁소를 지켜야 역유학 비용이라도 댈 수 있습니다. 조기유학을 보낼 때는 우리 아이와 같은 아이도 있을 수 있으니 정말 잘 살펴 보내세요.

두서없는 글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 떨어져 이제 수능을 대비하는 학부모로서 적었습니다. 다시금 소심했던 우리 아들이 대견합니다. 팔불출이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캐나다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는 이민자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한국에서 대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