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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구>
ⓒ 창딩니 그림, 1980년.

봄의 기척은 여러 가지이지만, 곤충들의 활동도 한몫을 한다. 곤충들 가운데는 엄동을 건너온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곤충들은 봄이 되면서 알에서 깨어 나와 애벌레가 되고 성충이 된다. 봄은 곤충들과 함께 온다.

곤충은 나비나 잠자리와 같이 아름다운 것도 있으나, 모기나 바퀴벌레 같이 혐오감이나 경계심을 주는 것이 훨씬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인상에는 곤충이라 하면 해충이든 익충이든 그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벌레 같다”는 말은 맹목성과 무가치성을 나타내는 욕이 되기도 한다. 사실 한자에 있어 ‘곤충’(昆蟲)의 ‘곤’과 ‘충’이란 말에는 각각 ‘많다’는 뜻이 들어가 있다. 한자 옥편에서 ‘벌레 충’ 부수를 열면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 나온다.

▲ <나비>
ⓒ 장톄펑(蔣鐵峰) 천즈촨(陳之川) 그림, 1978년.

원래 ‘충’(蟲)이란 말은 갑골문에서는 살무사(虺)의 모양 형상화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고대 중국어에서 ‘충’이란 오늘날의 곤충만을 가리킨 게 아니라 모든 동물들을 다 포함시킨 말이었다. 보통 갑각류나 조류만이 아니라 포유류까지 말이다. 지금도 중국말의 구어에서는 ‘대충’(大蟲)은 호랑이를, ‘장충’(長蟲)은 뱀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놀랍게도 ‘충’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물론 “야, 이 식충아!”라고 할 때의 비유적인 ‘충’이 아니다. 실제로 <대대례기>(大戴禮記)에서는 “과충(倮蟲)은 삼백육십 종 있는데 성인(聖人)이 가장 뛰어나다”(倮之蟲三百六十, 而聖人爲之長)고 했다.

더 명확한 설명으로는 당대 이양빙(李陽冰)의 말을 들 수 있다. 그는 ‘충’은 “털 있는 것, 털 없는 것, 깃털 달린 것, 비늘 달린 것, 껍질 있는 것의 총칭이다”(裸毛羽鱗介之總稱)고 했다. 사람은 ‘털 없는 것’에 들어가며, 그래서 ‘과충’(倮蟲)이라고 한다.

이러한 ‘충’이 나중에는 크기가 작고 숫자가 많은 ‘곤충’의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동물분류학에서 곤충은 그 범위가 훨씬 좁아져, 지렁이류는 아예 곤충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간주되며, 절지동물 안에서도 거미는 곤충에 포함되지 않는다. 거미는 곤충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인 탈바꿈 즉 ‘변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과학을 사랑해>
ⓒ 류중(劉中), 9세. 1978년.

중국의 고대 문명의 중심지인 황하 중류에서 옛 사람들은 토굴 생활을 하였다. 이 토굴을 ‘야오둥’(窑洞)이라고 한다. 서안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야오둥이 더러 눈에 뜨이는데, 오늘날에도 야오둥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마오쩌둥에 관련된 화보를 보다보면 그가 옌안(延安)에 있을 때 야오둥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다. 야오둥은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천연적인 주거형태라 할 것이다.

그런데 고대인들이 황토고원의 야오둥에서 살면서 긴 겨울을 지나면서 봄을 기다릴 때 무엇으로 맨 먼저 봄의 도래를 알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토벽을 뚫고 나오는 여린 벌레들이었을 것이다. 고물고물 기어 나오는 어리고 작은 벌레에 대한 그들의 놀라움과 기쁨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 벌레들은 그야말로 “봄이 왔다”라고 하는, 더 나아가 “이제 살 수 있다”고 알려주는 전언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지구에 나온 지 3백만년밖에 안되지만 곤충들은 3억 5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람보다 더 오랫동안, 말할 수 없이 더 많은 봄을 겪었고, 그래서 기후에 대해서 더 민감하고 봄에 대해서도 더 잘 알 것이다.

이렇게 많은 곤충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중국 고대인들은 이에 대한 합당한 해설을 만들기가 어려워 무척 곤혹했을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진 데 대해서는 여와(女媧)가 황토를 반죽하여 사람을 만들었다느니, 혹은 거인 반고(盤古)가 죽자 몸에 있던 이(虱)가 사람으로 되었다느니 등의 이야기를 붙일 수 있다지만, 형태도 다양하고 색깔도 가지가지인 그 많은 곤충에 대해 어떻게 일일이 다 탄생설화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온 게 ‘기’(氣)라는 개념이었다. 만물은 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주역>에는 “정기가 변하여 사물이 된다”(精氣爲物)고 했다. 여기서의 ‘사물’은 무기물과 유기물을 포함한다. 왕충(王充)도 <논형>(論衡)에서 “하늘과 땅의 기가 모아져 만물이 절로 생겨났다”(天地合氣, 萬物自生)라고 하였다. <회남자>는 사람까지 언급하였다. “두 신이 뒤섞여 생겨난 후 하늘과 땅을 만들었는데 …탁한 기는 동물이 되고, 깨끗한 기는 사람이 되었다.”(有二神混生, 經天營地. …煩氣爲蟲, 精氣爲人) 다시 말해 벌레도 기(氣)고, 사람도 기(氣)인데, 기가 모이면 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 “혼자 말없이 거미줄을 걷나니, 나비가 짝을 잃지 않도록”
ⓒ 펑쯔카이(豊子凱) 『호생화집』(護生畵集)에서.

이러한 사상을 되새겨보면 도교에서 말하는 “기가 변하여 형태가 되고, 형태가 변하여 기가 된다”(氣化而形生, 形化而氣生)는 말도 쉽게 이해가 간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노자>와 같이 ‘도’(道) 혹은 ‘자연’(自然)이 ‘하나’(一)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는 식으로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중국 문화 속에 있는 무수한 변신담도 그 연원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동물과 곤충 사이의 변신담이 그러하다.

물고기 알이 변하여 벼메뚜기(蝗蟲)가 된다.
―<비아>(埤雅)

바다의 푸른 새우가 변하여 잠자리가 된다.
―<고금주>(古今注)

감귤의 좀이 변하여 나비가 된다.
―<북호록>(北戶錄)


고대인들은 꼭꼭 닫아둔 장독 속에 어떻게 구더기가 슬었는지 의아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된장이 구더기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어디에나 들끓는 곤충들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하게 되었다.

고대 중국인의 사유 속에 특히 나비에 관한 변신담이 많은 게 눈에 뜨인다. 곤충이 나비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된 일도 그렇고, <양산백과 축영대>에서도 두 연인은 나비가 된다.

▲ <나비와 메뚜기>
ⓒ 치바이스(齊白石) 그림.

사실 곤충들은 알, 애벌레, 성충의 과정을 거치지만, 나비는 고치의 단계를 하나 더 거친다. 고대인이 볼 때 작은 알이 애벌레로 변하는 일은 무척 신기했을 것이다. 더구나 고치를 찢고 화사한 나비로 날아오른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미물인 곤충도 우화(羽化)를 하는데 천지의 가장 뛰어난 기의 응결체인 사람이 어찌 우화(羽化)할 수 없겠는가. 이러매 그들이 어찌 신선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변신은 뚜렷한 현상이며 계절의 추이를 나타내는 기호였다.

二月靑蟲初化蝶, 음력 이월엔 푸른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고
三月紅蠶欲斷葉. 음력 삼월엔 누에가 잎사귀를 먹는다네
―청 혜사기(惠士奇) '농가의 노래'(田家行)


곤충의 변신 가운데는 “썩은 풀이 반디가 된다”(腐草爲螢)는 것은 아주 널리 퍼진 상식 가운데 하나이다. 주희(朱熹)도 물론 이 의견을 믿었다. 그는 나아가 이를 ‘물극필반’(物極必反) 설로 해석하였다. “사물의 성질이 극한에 이르면 반대 성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짚이나 대나무 뿌리 등이 오랫동안 땅속에 묻히거나 어두운 곳에 있으면, 거꾸로 빛을 내는 반디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썩은 짚에서는 인광 때문에 약간의 빛이 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과학적인 이시진(李時珍)도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동의하였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러한 설이 잘못됨을 초등학생들도 안다.

그러나 만일 이 설을 우리가 시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깊은 겨울의 끝에서야 봄이 오고, 모든 곤충들이 죽음을 지나야 삶이 다시 온다고 할 수 있다. 봄의 생명력이 여름보다도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 전화카드에 나타난 잠자리와 나비. 하늘을 나는 연의 모습이다.
ⓒ 서성 소장.

곤충 가운데는 매미나 귀뚜라미 같이 잘 우는 놈이 있다. 특히 가을이 되면 지르지르, 뚜르뚜르 등으로 우는 벌레가 많다. <시경> '칠월'의 귀뚜라미는 특히 인상 깊다. 그러나 어떤 시인은 초봄에 들리는 벌레의 울음을 주의하고 있다. 당대(唐代) 유방평(劉方平)의 '밤달'(夜月)을 보자.

更深月色半人家,밤 깊어 달빛 그림자는 인가를 반으로 나누고
北斗闌干南斗斜。북두는 드러눕고 남두(南斗)는 기울어
今夜偏知春氣暖,오늘밤에야 봄기운 따뜻해짐을 비로소 아나니
蟲聲新透綠窓紗。창문에 벌레 울음 처음으로 들려오네


달이 뜬 적막한 봄밤에 녹사(綠紗) 걸린 창문을 뚫고 들려오는 벌레 소리. 그 소리는 분명 가늘고 미약하리라. 그러나 긴 겨울 끝에서 여리기만 한 벌레가 봄의 기후를 호흡하며 처음으로 내지르는 소리에는 무한한 생명의 힘과 온기가 서려있다. 시인은 그 소리를 생명의 움직임과 함께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신호로 듣고 있다.

시인은 우연히 봄벌레 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 봄소식을 오랫동안 기다린 듯 하다. 봄이 도래했음을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나 두루 알리라(偏知)고 성급하게 선포해버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들려온다는 말도 ‘초투’(初透)가 아니라 ‘신투’(新透)라고 일부러 ‘신’(新)자를 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창문에 걸린 커튼(窓紗)이 녹색(綠)이지 않은가.

▲ 중국에서 최근 들어 많아진 곤충 표본 공예품. 백 가지 곤충을 투명한 호박 속에 넣었다. 가격은 한화 20만원 정도.
ⓒ 서성.

봄에 벌레 울음을 들은 기억은 얼른 떠오르는 게 없지만, 위의 시를 읽고 나서 봄이 되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조용한 밤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디선가 무수한 벌레들이 꿈틀대고 있는 듯하다. 원대 조맹부(趙孟頫)의 '경직도에 쓰다'(題耕織圖)는 누에가 처음 알에서 깨어나온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三月蠶始生, 음력 삼월의 누에는
纖細如牛毛. 소털처럼 가늘어


고대에는 특히 누에를 길렀기에 알의 색이 변하고, 탈피를 하고, 자라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잠서> 등을 보면 그 과정을 날짜별로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그러한 누에의 변화에서 시절의 추이를 잘 알았으리라.

縹緲靑蟲脫殼微, 껍질 벗은 푸른 벌레 너무나 애리애리해
不堪煙重雨霏霏. 짙은 안개와 휘날리는 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오대(五代) 서인(徐夤) '나비'(蝴蝶)


사람들은 봄이 오면 매화를 찾고 산수유를 찾고 벚꽃과 신록을 찾는다. 그러나 벌레는 어떤가. 고물고물 움직이는 연약한 모습이야말로 천지의 기운이 통하여져 나오는 신호가 아닌가.

그런 미약하기만 한 놈들이 다가올 폭풍과 폭우와 폭양을 견디려면 시간이 좀 더 가야만 하리라. 봄이 되면 나는 언제나 그러한 곤충들이 꿈틀거리는 시편들을 찾아내 읽곤 한다. 보이지 않는 무수한 곳에서 분명 벌레들의 숨구멍이 열리기 시작했으리라.

덧붙이는 글 | 서성 기자는 열린사이버대학교(www.ocu.ac.kr) 중국어전공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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