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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1500원이면 한끼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는 집이다.
ⓒ 강기희
서울 종로 거리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비다. 그럼에도 나는 우산을 구입하거나 비를 피해 건물로 들어서지 못했다. 내리는 비를 그냥 맞기로 했다. 도심의 한복판에서 배가 고파왔다. 집을 떠나서인지 배고픔은 자주 밀려왔다.

견디다 못해 길거리에서 붕어빵 두 개를 뜯었다. 500원의 지출. 500원으로 허기진 배를 감추기엔 부족했다. 다시 찾아든 곳은 낙원상가 앞에 있는 '소문난 해장국' 집이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실내엔 손님이 많다.

이 집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 전에도 얇은 지갑을 들고 자주 찾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식값은 변함없다. 어느 간판엔 추어탕집이라 적혀있지만 실제 나오는 음식은 우거짓국이다. 빈자리에 앉으면 따로 주문할 것도 없이 음식이 날라진다.

하루 한 끼 식사로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

나오는 음식은 우거짓국과 밥 한 그릇, 고춧가루가 듬성듬성 박힌 깍두기가 전부다. 그렇게 차린 음식값이 1500원. 붕어빵 6개 값이자 라면 두 봉지 값이다. 이 집을 찾는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이 우산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산 마련할 돈이면 사흘치 밥값을 치를 수 있기에 이들은 차라리 내리는 비를 그냥 맞는다. 우거짓국 냄새와 비에 젖은 몸냄새가 적당히 버무려진 집에서 배를 채운다. 밥을 국에 말아 훌훌 떠먹는다. 깍두기는 반찬이라기보다 안주로 더 쓰인다.

맞은 편에 앉은 사내는 홀로 술을 마신다. 술은 사내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사내의 몰골은 여느 음식점에선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다. 식탁마다 사내와 같은 이들이 앉아있다. 이 집은 적어도 사람의 외모만으로 출입금지를 규정짓지 않는다.

서민이라면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집이지만 값비싼 옷을 걸친 이들은 부담스러운 곳이다. 의자에 혹은 오랜 땟국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식탁에서 서민의 때가 묻을까 염려하는 이들은 이곳을 찾지 않는다. 이곳엔 하루 한 끼 식사를 위해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지난 10일 오후 4시, 서울의 한복판에서 있었던 풍경이다.

배를 채우니 살 것 같다. 밀려드는 한기는 우거짓국이 밀어냈다. 젖은 옷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비 오는 거리로 나와 종로구 돈의동에 있는 '쪽방촌'을 찾아 나섰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좁은 골목, 우산조차 펼 수 없었다

▲ 쪽방촌 입구. 막힌 골목처럼 보여 입구를 찾기 쉽지 않다.
ⓒ 강기희
▲ 쪽방촌 입구로 들어서는 골목. 빛보다 어둠이 더 많다.
ⓒ 강기희
거리에서 쪽방촌을 물었다. 양복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이들에게 물은 건 실수였다. 그들이 쪽방촌의 존재를 알 리 없다는 걸 잠시 잊었다. 지나치는 여인에게 다시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이 골목 입구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를 찾아갔다.

구멍가게 여주인은 쪽방촌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여주인의 말을 곱씹으며 쪽방촌으로 갔다. 그럼에도 나는 한참이나 쪽방촌으로 가는 골목을 찾지 못했다. 쪽방촌은 나같이 배부른 사람에겐 그 속을 쉽게 열어 보이지 않았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입구를 찾아 헤맸다. 몇 개의 골목을 기웃거리다 좁은 입구를 발견했다. 입구는 앞이 막혀있는 듯 보여 골목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비좁은 골목이 이어졌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 알맞은 골목이라 우산은 애초 필요 없었다. 우산이 있다 해도 겸손하게 접고 맨몸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골목이었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집과 집 사이는 골목이라 칭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좁았다.

골목을 들어서니 비로소 쪽방촌이 나타났다. 나무 한 그루, 화분 하나 없는 쪽방촌은 삭막하기만 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쪽방촌 골목엔 사람이 들고 났다. 일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둘 셋씩 모여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사십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사내들의 입에선 술냄새도 풍겼다.

삶이 힘든가. '쪽방촌'을 둘러보라

눌러 쓴 모자가 우산을 대신하는 이들의 오후는 긴 듯 보였다. 대부분 일용직 종사자들이 많은 쪽방촌 사람들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니 그날은 공치는 날인 것이다. 노는 날 하는 일이라는 게 술 마시는 일 아니면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쪽방촌을 기웃거리는데 골목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빈 방 있는데 자고 갈겨?"라고 물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8000원이란다. 하룻밤 묵어가는 비용이 8000원이라는 거다. 방 구경을 하고 싶다니 보여준다.

할머니를 따라 방 구경을 나섰다. 경사가 급한 계단은 비상 탈출로보다 못했다. 억지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야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2층 계단을 오르자 방이 몇 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굽은 등을 하고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뒤따라 가기에도 힘겨운 계단을 오르니 3층이 나타났다. 할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보여준 방은 정확하게 방문 크기만 했다. 쪽방이라 이름 붙여진 연유를 짐작게 하는 방이었다. 방은 혼자 눕기에도 비좁아 보였다. 얼마나 좁은지 뒤척일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방은 옆 방에서 나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방음 시설도 되어 있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조차 감출 수 없는 쪽방에서 사람들은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난색을 표하자 할머니가 물었다.

"돈이 모자라?"
"잘 건 아니구요. 언제 기회가 되면 올까 싶어서요."
"에이, 돈이 없구먼."


할머니가 고개를 흔들며 계단을 내려갔다. 가진 돈이 없어 쪽방에서조차 잘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봐 온 모양이었다.

"하룻밤 자고가는데 8000원, 돈이 모자라?"

▲ 쪽방촌 골목. 미안해서 사람이 없기를 기다렸다가 찍었다.
ⓒ 강기희
▲ 쪽방촌. 집과 집이 연결되어 있으며 방과 방이 붙어 있다.
ⓒ 강기희
다시 할머니를 따라 골목으로 나섰다. 골목을 오가다 '쪽방 선교원'을 발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선교사의 방이 바로 나타났다.

입구가 있고 방문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문을 벌컥 열었던 것이 실수였다. 미안하다는 인사를 보내며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젊은 선교사의 방도 쪽방이라 함께 앉을 자리도 없었다. 선교사와 골목에 서서 쪽방촌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선교사는 자신은 쪽방촌에 온 지 오래되지 않았다며 정확한 것을 알고 싶으면 '종로 쪽방 상담소'로 가보라고 한다. 선교사가 일러준 골목을 따라 상담소를 찾아갔다. 골목이 어찌나 복잡한지 상담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나갔던 길을 몇 번이고 오가며 상담소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지나치는 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 짐작하고 물었지만 상담소를 아는 이는 없었다.

같은 길을 몇 번이나 오가며 물은 끝에 상담소를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가 일러준 상담소는 골목 하나만 꺾으면 되었다. 십여 미터도 되지 않은 곳에 상담소가 있었지만 찾는 일이란 쪽방촌 입구를 찾는 일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상담소는 3층 건물로 1층은 할머니들, 2층은 할아버지들의 공간이었다. 상담소 사무실은 3층에 있었으며 방문했을 땐 마침 회의 중이었다.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상담소의 터줏대감인 김종한 실장을 만났다.

하루 만원 벌이도 힘든 사람들이 사는 쪽방촌

먼저 쪽방촌의 현황이 궁금했다.

"건물은 90동입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쪽방의 수는 758개에다 800여 명이 들고 납니다."
"장기 투숙자는 몇 분이나 됩니까?"
"550여 분 됩니다. 하루나 며칠씩 묵어가는 분들이 사용하는 방은 200여 개가 조금 넘는 셈이지요."
"장기투숙자의 경우 몇 년이나 계시나요?"
"길게는 10년 넘게 계신 분들도 많습니다."


10년 넘게 쪽방 생활을 하는 분들의 경우 쪽방촌은 집과 다름없었다. 그들의 경우 한 달씩 방값을 계산한다고 한다. 하루 7000원씩 한 달에 21만원을 방값으로 낸다는 것이다. 쪽방촌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그 역사에 대해 물었다.

"예전 종로 3가 일대는 집창촌이었다고 합니다. 종3거리라고 서울에서 유명한 집창촌이 있었는데 67년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분이 거리를 지나다가 여성들에게 잡혀 혼쭐이 난 모양입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서울 시장은 '나비정책' 추진했고 68년 집창촌이 종로3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대의 건물이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사라졌지만 돈의동의 건물들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 건물의 방들이 지금 쪽방촌을 형성하고 있는 겁니다."

쪽방촌의 역사라는 게 길기도 했다. 집창촌 여성들이 떠난 자리에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찾아들었다는 설명이다.

"쪽방촌을 둘러보았습니다. 시설이 열악한 것도 문제지만 사람으로서 저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모든 게 열악합니다. 당장의 생계가 걱정인 분들이 많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이야 무슨 일을 해서라도 하루 벌이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이 대다수거든요. 자녀가 있는 분들도 계시는데 인연을 끊었는지 찾아오는 자식들도 없습니다."


자식이 있다면 쪽방촌에 부모를 모시지도 않을 것이었다. 김 실장은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도 못 하는 노인들이 가장 문제라고 한다. 이럴 땐 푸념 삼아 하는 말처럼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김 실장과 함께 쪽방촌의 한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다들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라 선뜻 방문할 수는 없으니 먼저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했다. 김 실장이 김 할아버지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서 김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이 곳에 계신 분들은 세상에 노출되는 걸 꺼려합니다. 힘겹게 살지만 세상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는 거죠. 흥밋거리로 접근하는 언론에 대한 불신도 있겠고요."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언론이라는 게 기자나 신문사에서 의도한 대로 기사가 만들어지니 피해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었다. 김 실장은 할아버지 댁을 일러주고는 곧장 돌아갔다. 함께 앉을 자리가 없기도 하지만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나마 나는 살만해, 다른 분들이 걱정이야"

▲ 쪽방촌 상담소 직원들. 이들이 쪽방촌과 세상을 잇는다.
ⓒ 강기희
▲ 할아버지가 거처하는 방. 통로에서 찍은 사진. 가장 멀리서 찍는다고 했지만 사진이 이렇게 가깝게 나왔다. 할아버지 혼자 방에 앉았는데도 방이 꽉 찼다.
ⓒ 강기희
김 할아버지 댁은 쪽방촌 골목의 2층에 있었다. 1층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도꼭지 하나가 있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1층엔 아주머니 한 분이 기거하고 계셨으며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2층 계단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덩치 큰 사람은 올라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계단의 규모나 경사를 다락방이나 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연상하면 이해가 될 듯싶다. 몸을 틀면서 계단을 오르니 할아버지 방이 바로 보였다.

거실이라고 할 수 없는 통로는 계단을 빼면 한 사람이 앉으면 딱 맞았다. 2층엔 할아버지 방 말고도 두 개의 방이 또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3층에도 같은 구조의 방이 만들어져 있어 위급 상황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김 할아버지(70)의 방도 할아버지 혼자 눕기에 벅차 보였다. 작은 방엔 장난감 같은 선풍기가 한 대 놓여 있고 낡은 TV와 최소형 냉장고 한 대, 야외용 가스버너 하나가 살림의 전부였다.

"한 달에 25만원을 지원받아 21만원을 방세로 내고 나면 4만원 남아. 그걸로 부탄가스도 사고 하지."

어디선가 후원을 받는 할아버지는 그나마 지금은 살만하다고 한다. 쪽방촌에서 자신처럼 후원을 받는 이가 몇 안 된다고.

"다른 노인들에게 미안해. 그래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벌어서 그분들을 도와주고 싶어."

할아버지는 자신만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몇 번이고 미안해했다.

"이 곳에 온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11년 되었지. 처음엔 돈벌이도 했지. 아파트 경비도 했고. 그러다가 백내장에 걸렸어. 실명할 뻔 했는데 김 실장이 도와주어 살아났지."
"가족은요?"
"내 고향이 광장동이야. 여기서 가깝지. 젊어서 운수업을 하다 실패한 게 떨어져 살게 된 원인이야. 그땐 천호대교에 자주 갔어. 나 혼자 죽어버리면 되겠다 싶었지만 자식들 때문에 그렇게 못했어. 아들 하나 있는데 건강이 안 좋아. 딸은 둘 있는데 다들 먹고 살만하다고 해. 헤어진 지 15년 되었으니 그 이후는 몰라."
"지금 건강은 요?"
"당뇨가 있지만 살아갈 만해. 이 나이에 당뇨는 병도 아니냐. 다른 분들은 나보다 더해. 그분들이 걱정이지 나는 괜찮아."


할아버지는 자신은 괜찮다며 쪽방촌에 있는 노인들을 걱정했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룻밤 보내며 말벗이라도 되어 드리고 싶지만 앉을 자리도 누울 자리도 없는 쪽방이라 떠나야 했다.

골목을 돌아나오니 '바깥세상'은 딴 세상

다음에 꼭 찾아 뵙겠다고 약속하고 할아버지 댁을 나왔다. 쪽방촌 골목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빈 방을 채우기 위해 비를 맞고 골목에 앉아 있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밖으로 나오니 바깥세상은 딴 세상 같았다.

그러나 쪽방촌과 바깥세상 그 어느 곳도 낙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쪽방촌을 사이에 두고 화려한 네온을 한 건물들과 여관들이 즐비했다. 그 시간 여관으로는 고급 승용차가 드나들고 거리의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거대한 서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쪽방촌의 존재라는 것이 입구를 찾지 못할 정도로 폐쇄되어 있건만 어느 누구도 그 문을 쉽게 열려 하지 않았다. 쪽방촌 사람들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힘겹게 오르는 계단조차 한없이 깊은 나락과 같았다. 쪽방촌 사람들의 얼굴에 비친 어둠의 그림자를 걷어줄 이를 이 땅에서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일까. 그런 사람 어디 없을까. 요즘 들어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말을 들어본 지도 오래지만, 그런 말을 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낮임에도 어둡다.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이다.
ⓒ 강기희
▲ 쪽방촌 옆의 건물들.
ⓒ 강기희

덧붙이는 글 | 자원봉사, 물품, 제정 후원문의: 종로쪽방상담소 02) 747-9074~5 
WWW.jcsw1.or.kr 

쪽방촌의 이야기를 다 담아내기엔 글이 턱없이 짧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시는 방과 다른 방에도 화장실이 없습니다. 물론 싱크대도 없습니다. 수도꼭지는 1층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1층 방문 입구에 있는 수도꼭지 하나를 3층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쓰고 있었습니다. 흔히 연상하는 세면장 수준이 아니라 그냥 수도꼭지라 표현합니다. 세수대야 하나 놓을 수 없는 공간에 있는 수도꼭지가 쪽방촌 사람들의 공간입니다. 그저 몸만 누일 수 있는 그런 공간에서 탐욕에 찬 우리네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사정이 어느 집이고 다르지 않다는 점 사족으로 남깁니다.


태그:#쪽방촌, #빈곤, #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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