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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에서 올려다 본 계룡산. 좌측으로부터 천황봉, 관음봉, 삼불봉.
동학사에서 올려다 본 계룡산. 좌측으로부터 천황봉, 관음봉, 삼불봉. ⓒ 김유자
대전·공주·논산의 중심에 자리잡은 계룡산

계룡산은 1968년, 지리산에 이어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높이 845m밖에 되지 않는 산이지만 일찍부터 명산 또는 영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나온 차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가다가 금강의 침식으로 허리가 잘리면서 떨어져나온 잔구가 계룡산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떨어져 나와 대전,공주, 논산이 이루는 삼각형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산이 된 것입니다.

계룡산이란 이름은 천황봉(845m)에서 관음봉(816m) 삼불봉(775m)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마치 닭볏을 쓴 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계룡산을 오르는 코스는 많이 있지만 저는 오늘 관음봉을 넘어서 연천봉을 들린 다음 신원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연천봉을 넘어서 갑사까지 가려고 합니다. 등산을 겸해서 계룡산의 3대 사찰을 모두 돌아볼 작정이니 약간 '빡센' 일정이지요.

아침 7시. 동학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제 스스로 잡은 오늘 일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새벽같이 서둘러 온 것이랍니다. 봄으로부터 꽃소식을 전해받지 못했는지 아직 동학사 계곡은 '신장개업'을 하지 않은 채 겨울 모습 그대로 있습니다. 이 계곡은 길고 넓은 데다 길 옆으로 바짝 붙어 흐르기 때문에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사람들은 봄의 화려한 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무에서 막 움트는 연한 녹색의 잎파리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니다. 1984년,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계룡8경을 기준으로 1년여의 논의 끝에 새로이 계룡8경을 선정했는데 동학사 계곡 신록이 제 5경에 뽑혔답니다. 봄이 더욱 깊어지면 계룡산에 다시 와서 풋풋한 신록이 주는 녹색을 가슴에 품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느긋하게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아침 8시 30분. 동학사를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본 다음 관음봉을 향해 올라갑니다. 우선 은선폭포를 목표로 삼고 올라가기로 합니다. 이정표를 보니 은선폭포까지 1.6km의 거리입니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진달래꽃이 피어 '동지 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고 가라고 손짓하지만 그냥 못본 척 지나갑니다.

쌀개봉(828m)
쌀개봉(828m) ⓒ 김유자
어느덧 은선폭포에 가까워졌나 봅니다. 지금까지의 완만한 오르막과 달리 길이 거의 수직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길 옆에는 손을 잡고 오를 수 있도록 철제난간이 붙어 있습니다. 철제난간을 거의 다 올라서자 쌀개봉에 대한 안내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쌀개봉은 생긴 모양이 마치 디딜방아의 쌀개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쌀개란 디딜방아를 양쪽으로 고정시키는 걸개를 말하지요. 언젠가는 마치 하늘로 오르는 석문처럼 생긴 저 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쌀개봉은 제게 미완의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테지요.

쌀개봉의 앞을 살짝 가리고 있는 봉우리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입니다. 이곳에 오면 절벽에 몸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저 소나무들의 생명력이 제게 끝 모를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요. 겨울날, 눈 쌓였을 적에 이곳에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마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속 소나무처럼 고고하게 다가옵니다. 패배를 모르는 어떤 정신의 표상같아 절로 마음이 절로 숙연해집니다.

은선폭포.
은선폭포. ⓒ 김유자
쌀개봉 관망대에서 10여 m가량 올라가면 계룡 8경 중 7경으로 뽑힌 은선폭포가 등산객을 마중합니다. 약 20m 높이의 폭포는 제법 웅장합니다. 약간 붉은빛이 도는 절벽에서 하얀 물결이 흘러내리니 마치 수 십 필의 광목을 펼쳐 놓은 것 같습니다. 비가 내린 뒤 안개에 감싸인 폭포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환상적이더군요.

은선폭포라는 이름은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곤 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선녀들은 지상에 내려와 목욕을 하다 옷을 감춘 나무꾼의 술수에 걸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몇 년 만에 겨우 날개옷을 되찾아서 하늘로 돌아왔다는 선녀의 소문을 듣지 못한, 정보에 아주 어두운 선녀들이었나 봅니다.

지천으로 피어난 현호색이 아름답습니다.
지천으로 피어난 현호색이 아름답습니다. ⓒ 김유자
은선폭포에서 관음봉까지는 0.8㎞ 가량 더 올라가야 합니다. 아주 가파른 오르막길에다 돌이 많은 너덜지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길을 오르다 보니 길가에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현호색이 지천으로 피어 있습니다.

연한 홍자색 현호색 꽃이 앙증맞을 만큼 귀엽고 아름답습니다. 이 현호색은 꼭 군락을 이루며 피더군요. 꽃도 홀로 피어있는 것보다 무리지어 피어있는 것이 훨씬 이뻐 보입니다. 산에 피는 꽃이 집안에서 기르는 꽃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꽃이름에 오랑캐 호자가 끼어있는 걸 보니 아마도 처음에 북쪽에서 내려와 차츰 자생하기 시작한 꽃인가 봅니다.

관음봉 정자에서 바라본 연천봉(738m) 과 관음봉(816m)
관음봉 정자에서 바라본 연천봉(738m) 과 관음봉(816m) ⓒ 김유자

좌측으로부터 신선봉(565.4m) 갑하산(469m) 도덕봉(535m) 황적봉(664m)
좌측으로부터 신선봉(565.4m) 갑하산(469m) 도덕봉(535m) 황적봉(664m) ⓒ 김유자

관음봉 좌측의  삼불봉(775m). 저 멀리 우산봉(573m)이 보입니다.
관음봉 좌측의 삼불봉(775m). 저 멀리 우산봉(573m)이 보입니다. ⓒ 김유자
동학사를 출발한 지 1시간 반. 마침내 관음봉 고개에 도착했습니다. 관음봉 정상에 올라서 계룡산의 줄기들을 바라봅니다.

남쪽으로는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이 바라다 보입니다. 천황봉의 일출은 계룡8경 중 제1경으로 꼽는 경치지요.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현재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입니다. 곧 철탑으로 훼손된 정상부를 복원하고 개방한다고 하니 그때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별 것은 아니지만 전 이 천황봉이란 봉우리 이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제가 일본천황에 대한 경외심을 고취시키려고 개명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지리산 정상도 천왕봉이라 부르는데 그보다 2배도 더 낮은 봉우리가 천황봉이라니 좀 이름이 과한 듯 싶습니다. 모든 산의 꼭데기는 그냥 상봉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 아닌가요?

계룡 8경 중 제4경에 관음봉 한운이 끼어 있습니다. 계룡산은 산이 높지않아 구름이 잘 끼지는 않지만 가끔 운해가 들 때면 기막힌 장관을 연출합니다. 동쪽으로는 삼불봉이 보이고요, 서쪽으로는 연천봉이 빤히 건너다 보입니다.

동학사 계곡을 중심으로 바라보니 정면에 국립 현충원 뒷산인 갑하산과 신선봉이 보이고요, 갑하산 건너편엔 도덕봉이 있고 그 옆에는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 같다해서 황적봉이라 부르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어디를 바라보나 계룡산 줄기는 장쾌합니다. 아마도 이 맛을 느끼려고 산에 오르는 것일 테지요.

관믕봉을 내려와 우측으로 뻗은 연천봉 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관음봉에서 육안으로 볼 적엔 아주 가깝게 보였지만 여기서 연천봉까지는 1㎞의 거리입니다.

연천봉. 등산객이 천황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연천봉. 등산객이 천황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김유자

연천봉 좌측의 문필봉(756m)과 삼불봉.
연천봉 좌측의 문필봉(756m)과 삼불봉. ⓒ 김유자
연천봉에는 등산객이 많습니다. 연천봉은 주로 신원사에서 올라온 분들과 갑사에서 올라온 분들이 만나는 곳이지요. 관음봉보다 이곳에서 천황봉이 훨씬 잘 바라다 보입니다. 왼쪽 바로 옆에 있는 봉우리가 문필봉이고요 그보다 멀리 있는 세 개의 봉우리가 삼불봉입니다.

계룡3경으로 칠 만큼 연천봉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아주 아름답습니다. 논산과 공주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을 배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은 환상적입니다. 천황봉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도 진경이라는데 아쉽게도 아직 본 적이 없답니다.

연천봉 정상 바위들에는 갖가지 명문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方百馬角(방백마각) 口或禾生(구혹화생)'이란 암각문도 있지요.

방백(方百)이란 네모진 100년이다. 네모진 100년이란 400년이다. 마(馬)는 십이지로 환산하면 오(午)가 된다. 오를 파자하면 80(八十)이다. 각(角)은 뿔이 두 개라는 소리다. 이를 전부 합치면 482년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구혹(口或)을 합치면 국(國)자가 된다. 역시 화생(禾生)을 합치면 이(移)자가 되고.

이것을 뜯어 맞추면 482년 만에 나라(조선)를 옮긴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선왕조 창업이 1392년이니 여기에 482년을 합하면 1874년이 나온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시작되는 강화도조약이 1876년에 맺어졌으니 대략 이 무렵에 조선은 나라를 옮긴다. 즉, 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등운암 안내판 요약)


이 '방백마각 구혹화생'이란 비결을 이용해서 일본학자들이 '조선 합병은 하늘의 뜻'이라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연천봉 아래에 있는 등운암을 들렀다 가려고 우측으로 난 길을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길에 본 소나무들이 참 멋 있습니다. 멀리 서쪽으로 논산 경천저수지가 바라다 보이는군요. 등운암은 몇 년 전부터 공사 중입니다. 신라시대의 대도인 부설거사의 딸인 월명은 지금의 변산 월명암에서, 아들인 등운은 이곳에서 수도하여 득도했다고 해서 등운암이랍니다.

고깔제비꽃
고깔제비꽃 ⓒ 김유자
줄기없는 고깔제비꽃, 등뼈없는 삶

이제 신원사를 향해 내려갑니다. 연천봉 고개에서 신원사까지 1.7㎞라고 안내판은 설명해줍니다. 내리막길이니 30분 후면 신원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천으로 피어난 현호색 군락 옆에서 지난 가을의 낙엽더미 사이로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는 고깔제비꽃 두 송이를 보았습니다. 더 있을까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더 이상의 개체는 찾을 수 없더군요.

고깔제비꽃은 제비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양면에 가는 털이 나 있는데 4∼5월에 붉은 자주색 꽃이 핍니다. 보시다시피 꽃잎이 5개입니다.

꽃이 필 무렵에는 뿌리의 양쪽 밑부분이 안쪽으로 말려서 고깔처럼 되므로 고깔제비꽃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 꽃은 희한하게도 땅위 줄기가 없습니다. 잎 사이에서 나온 가는 꽃대 끝에 달려서 꽃이 핍니다. 꽃대는 높이 10~15cm 정도 되지요. 줄기가 없다 보니 꽃대가 좀 긴 것 같습니다.

낮 12시가 조금 못돼서 신원사에 도착했습니다. 신원사엔 벚꽃이 한창입니다. 난만히 피어난 벚꽃들 속에서 가는 세월을 막지 못하고 점점 퇴색해가는 신원사 중악단의 고풍스러움이 더욱 빛납니다. 헌 것이 가진 은은함이 새 것이 가진 화려함을 이기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오후 1시 30분. 신원사를 떠나서 갑사를 향해 다시 산을 오릅니다. 이정표로 환산해 보니 약 4.5km의 길이네요. 그렇게 되면 오늘 산행 거리가 약 9㎞ 가량 될 것입니다. 9㎞라면 그리 많은 산행거리는 아니지요.

그러나 한 번 내려왔던 산을 다시 올라간다는 게 좀 맥이 빠지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일체 유심조라 하지 않던가요? 신원사에서 처음 오늘의 산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마음을 고쳐 먹은 다음 힘차게 산을 올라 갑사를 향해 갑니다.

계룡산은 참 등산 코스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에 올라보면 알겠더군요. 길이 많다는 건 길을 잃기 쉽다는 것과 같을 때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산도 그렇고 세상살이 역시 그렇더군요. 아까 보았던 그 자리에서 다시 줄기가 없는 고깔제비꽃과 눈이 마주칩니다.

슬며시 제 등뼈를 만져봅니다. 등뼈가 없는 육체란 직립하기가 가능할까요? 줄기가 없는 삶이란 얼마나 자주 흔들릴까요? 내 삶의 줄기는 직립할 만큼 충분히 튼튼할까요? 전 삶의 줄기가 허약하다 싶을 때 등산을 합니다. 어떤 때는 고행에 가까울 만큼 무리한 코스를 다녀오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제 등뼈가 허락하는 한 걸을 겁니다. 연천봉 고개를 내려서서 갑사를 향해 천천히 내려갑니다. 마음이 때때로 내게 조그만 여유를 허락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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