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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초가 많이 돋아나 있는 우리집 잔디밭, 그러나 나는 부끄럽지 않다.
ⓒ 정철용

창문을 통해 뒤란의 잔디밭을 내다본다. 삐쭉 돋은 질경이꽃, 노란 민들레꽃, 하얀 토끼풀꽃 등이 군데군데 피어나 있다. 나가서 보면 쇠비름, 괭이밥, 왕바랭이도 금방 눈에 띨 것이다. 잔디밭이 아니라 잡초밭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이다.

하지만 내 마음까지 잡초밭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묶음으로 '잡초'라고 싸잡아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제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야생초'이며 그들도 잔디 못지않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해 전인가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를 읽고서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배웠다.

하지만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처음에는 나도 남들처럼 잔디밭에 제초제를 뿌리곤 했다. 잡초 하나 없이 마치 녹색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푸르고 푹신푹신한 몇몇 이웃들의 잔디밭을 보고는 너무나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잔디밭의 잡초를 손으로 일일이 뽑는 것으로는 별로 진척이 없자, 나는 잡초만 골라 죽이는 제초제를 사다가 집 앞 뒤 잔디밭에 온통 뿌려댔다. 과연 며칠이 안 되어 잔디밭의 잡초는 말라서 고스라지고 잔디는 더욱 푸릇푸릇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며칠 동안이었을 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우리집 잔디밭에는 다시 잡초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잡초 하나 없는 잔디밭이 단지 제초제를 뿌리는 것만으로는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매일 최소한 한두 시간 이상을 잔디밭 관리에 쏟아부어야만 이룰 수 있는 노동의 대가라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포기한 '카펫 잔디밭'의 꿈을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는 위로해 주었다. 잔디밭에 돋아난 잡초들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소중한 생명들이라고 생각하니 잡초가 잔뜩 돋아나 있는 잔디밭을 바라보는 것도 기쁨이 되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잡초가 돋아나 있는 우리집 잔디밭이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보도 블록 사이에 돋아나 번지는 잡초나 잔디밭에서 너무 크게 자라 보기 흉한 잡초 등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제초제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나는 고수했다.

그런데 최근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다 보니, 제초제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또 한 가지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제초제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다른 식물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생명인 잡초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름 아닌 제초제를 뿌리고 있는 인간 스스로를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비용이 얼마가 들건 정원의 왕바랭이는 모두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원치 않는 유해 식물'을 없애주는 제초제 포대를 정원에 쌓아놓는 것을 마치 그 집주인의 신분을 말해주는 것처럼 여긴다. 잡초를 없애는 화학물질은 그 주요 성분이나 특징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표를 달고 팔린다. 여기에 클로르덴이나 디엘드린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려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성분 분석표를 읽어야 한다.

공구상이나 원예용품점에서 볼 수 있는 제초제 설명서에는 이런 물질을 다루거나 뿌릴 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 아무런 말도 없다. 대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잔디밭에 제초제 뿌릴 준비를 하고 있고, 어린아이들은 개와 함께 잔디밭에서 뒹굴고 있는 행복한 가족이 등장할 뿐이다."(215쪽)


물론 클로르덴이나 디엘드린은 현재 치명적인 독극물로 분류되어 더 이상 제초제의 성분으로 이용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바람 없는 맑은 날을 택해 뿌리고 피부와 눈에 닿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사항이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예전보다 제초제의 독성이 많이 순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인체에 유해함이 틀림없어 보인다. 45년 전에 발간된 <침묵의 봄>이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유효한 경고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적 환경운동의 시발점이 된 <침묵의 봄>

ⓒ 에코리브르
오늘날에도 환경생태학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레이첼 카슨의 역저 <침묵의 봄>은 살충제와 제초제 등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통제하기 위하여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독성 화학물질의 가공할만한 폐해를 파헤치고 있다. 1962년 출간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환경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중적 인식을 끌어냄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환경운동의 출발점이 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침묵의 봄>이 이러한 평가를 받은 것은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인 기준에 의해서 수집·분석한 무궁무진한 사례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알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서도 독자들을 깊이 설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낭만적으로 자연을 예찬하거나 자연 보호를 위해 단지 목소리를 조금 더 높이는데 그쳤던 기존의 자연주의자들의 저작과는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전에 사용할 약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합성화학살충제가 모기·이·나방 등의 곤충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 곤충들을 먹고 사는 새들과 작은 포유동물들까지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충제에 노출된 물과 토양까지도 오염시키고 있다는 점, 이에 따라 물과 땅을 생명의 기반으로 삼는 식물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1950~1960년대 미국 전역에서 보고된 수많은 살충제 피해 사례들을 통해서 꼼꼼하고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먹이사슬이라고 부르는 생명의 연결망이 독성 화학물질의 개입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죽음의 연결고리로 바뀐 것이다. 그 먹이사슬의 정점에 인간이 있기에, 우리가 독성 화학물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머리 위에 죽음의 비를 퍼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저항과 과학자들간의 찬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보다 효과적인 해충 방제라는 명분을 앞세워, 숲과 경작지 뿐만이 아니라 마을과 도시에서도 대대적인 살충제 공중살포가 여러 차례 있었던 것이다.

천적이나 미생물 등을 이용하는 생물학적 방제법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성공 확률도 높으며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도 거의 없는데도 학계와 정부가 유독한 살충제를 뿌려대는 화학적 방제법을 더 선호한 것의 배후에는 거대 화학회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침묵의 봄>은 고발하고 있다.

"1960년 전체 응용곤충학자 중 단지 2%만이 생물학적 방제 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나머지 98%는 화학살충제 관련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화학회사들은 살충제 연구와 관련해 많은 대학에 연구비를 퍼부었다. 대학원생들을 위해 매력적인 연구원 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원으로도 채용했다.

하지만 생물학적 방제 연구에는 지원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물학적 방제는 화학방제처럼 확실한 이윤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생물학적 방제는 국가와 주 정부가 맡게 되고 관련 업무의 임금은 훨씬 더 낮은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295쪽)


따라서 <침묵의 봄>은 독성 화학물질이 가져다줄 재앙에 대한 경고장인 동시에 거대 화학회사들이 벌이고 있는 죽음의 비즈니스에 대한 고발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경고와 고발은, 세상에 이름을 알린 지 얼마 되지 않는 일개 과학저술가에 불과했던 레이첼 카슨으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터이다.

또한 살충제 DDT의 개발에 노벨상이 수여된 지 겨우 10년을 넘긴 시점에서 이 책이 집필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학계가 인정하는 학문적 배경이 든든하지 못했던 레이첼 카슨으로서는 많은 부담이 따르는 작업이었으리라.

그런 악조건을 무릅쓰면서도 그녀가 침묵하지 않고 <침묵의 봄>을 써낸 것은,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절멸 가능성과 더불어 심각한 해악을 불러일으키는 화학물질들로 인한 환경 오염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앞선 통찰력과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츠의 싯구를 빌려 그녀가 묵시록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호수의 풀들은 시들어가고 새들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 침묵의 봄'을, 그녀 덕택에 우리는 빗겨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아직도 매년 새 지저귀고 꽃 만발하는 봄을 우리가 누리고 있음은, 어쩌면 지난 세기에 살았던 한 여성 생태학자와 그녀가 써낸 <침묵의 봄>이라는 책 한 권에 빚지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지구 온난화라는 새로운 위협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위협에 처해 있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거쳐 인간의 몸에까지 축적되는 화학물질의 위협은 많이 줄어들었지만(또는 그렇다고 믿고 싶지만), 온실가스의 지속적인 배출로 인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온난화는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중대하고도 시급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경고한 독성 합성화학물질 문제와는 달리 지구온난화 문제는 전지구적 차원의 기후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즉각적이고 대규모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도 없는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그것을 우리가 못 느끼는 것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고발한 것과 마찬가지로,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인 화석연료의 채굴과 유통으로 돈을 버는 거대 연료회사들이 학계와 정부를 대상으로 로비를 벌이면서 그들의 입을 막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몇 년간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서서히 데워지는 솥 안에 담긴 개구리처럼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침묵의 봄'은 피했지만 '침묵의 여름'이 우리를 덮칠 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UN 등의 국제기구를 통하여 이 문제의 심각성이 점차 알려지면서 임박한 대재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여름'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지만, <침묵의 봄>에서 만나게 되는 생명과 자연과 과학에 대한 통찰력 있는 그녀의 글들은 우리가 '침묵의 여름'을 빗겨가는 방법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과학적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겸손함인 것이다.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도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살충제와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312쪽)

덧붙이는 글 | <침묵의 봄 (Silent Spring)>

ㅇ 레이첼 카슨 (Rachel Carson) 지음
ㅇ 김은령 옮김 / 홍욱희(세민환경연구소 소장) 감수
ㅇ 에코리브르 펴냄
ㅇ 2003년 11월 20일 초판 7쇄
ㅇ 값 15,000원

이 기사는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독자리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에코리브르(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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