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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7일자 성한용 칼럼
<한겨레> 7일자 성한용 칼럼

정치의 계절이 올 때마다 말의 무게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원래 정치 행위가 말로써 이뤄지는 것이니 말이 많아지는 당연한 일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남루하고 공허한 말들이 풍선처럼 떠돌아다니기 마련이다. 그런 일들이 정치 행위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것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런 현상에 대하여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시선으로 사태의 전말을 분석해야 할 언론마저도 서푼어치 말들로 더욱 남루해지는 형국이다.

언론의 소명 가운데 하나는 '말을 지키는 일'이다. 무릇 말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비단 어문 규정을 정확히 따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급한 문제에 즉하여 그 현상과 본질을 직시하되 이를 나름의 판단에 따라 시론을 펴고자 할 때는 마땅히 정언을 구하여 이로써 당대의 비판적 사유를 함께 모색해 나가는 것이 큰 소명일 것이다. 더욱이 중견들이 도맡는 각 언론의 사설과 칼럼이라면 이를 준엄히 따라야 할 것이다.

언론의 소명은 '말을 지키는 일'

예컨대 <한겨레>의 지난 7일자 칼럼을 보자.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의 칼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이다. 본래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증세가 악화됐다. 버럭 화를 내고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참모들은 '솔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솔직함'에 상처를 받는다."

한미FTA(자유무역협정) 타결로 우리 경제와 삶이 근본에서부터 위협을 당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정부의 대비는 상대적으로 미약해 보이며 이에 대한 국회와 전문가들의 질의와 비판에 대해서도 아직까지는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는 대형 언론들이 이 화급한 의제를 장밋빛으로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시선이 더없이 귀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성격인데 당선 이후 그 증세가 악화되어 버럭 화를 내고 막말도 서슴지 않는 노 대통령"이라는 전제로 시작한다면 이는 재빨리 귀를 씻고 싶을 만큼 그 자체가 '막말'에 가까운 것이다.

FTA 타결 직후의 뒤숭숭한 정황 속에서 쓴 칼럼이라서 시정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고자 하는 뜻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성한용 기자의 칼럼은 도가 지나쳤다. 그래서 그의 본의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주 고약하게 의역하자면 그는 평소의 정치적 취향과 그에 따른 언어 관습을 'FTA 타결'에 얹어 아주 맹렬하게 쓴 것처럼 읽힌다.

예의 칼럼에서 그는 '2007년 12월 대선은 끝났다. 여권의 재집권 가능성은 1%에서 0.1%로 줄었다'고 판단하고 특히 호남에서는 이 협정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산업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호남은 '작살'이 나게 되어 있다"고 썼다. 또한 "요즘 보수 인사들은 화장실에서 웃고 있다고 한다. 노 대통령 덕분에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풀었기 때문이다. 정권을 공짜로 먹게 생겼기 때문이다"고도 썼다.

나는 지금 그의 정세 판단에 대한 의견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 민심에 대한 그의 독법에 대해 가부의 토를 다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원론의 차원에서 이와 관련해 말한다면 그와 그리 다르지 않은 의견을 나 또한 갖고 있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증세 악화', '작살', '공짜로 먹게 생겼다'는 등의 말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진심을 조금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성 기자는 FTA 타결에 대하여 "일을 덜컥 저질러 놓고, 지금부터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정성이 없다"고 썼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심하게 말하면, 그건 '박정희식', '전두환식'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그가 FTA 타결에 따른 우리 삶의 위기에 대해 언론인으로서 '진정성' 있게 우려하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어휘들은 그가 FTA 타결에 기대어 평소의 정치적 소신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처럼 보이게 할 뿐이다.

그것은 단순히 '노무현 대통령'이기 때문이 아니다. 박정희를 포함한 여러 전직 대통령이나 차기 대선에서 승리하게 될 지금의 유력 후보들이나 어떤 중차대한 정책을 그렇게 '진정성이 없이 일을 덜컥 저질러 놓는'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일국의 행정 수반과 그 참모들이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덜컥 저질러 놓는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그 어떤 심오한 판단과 면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그 정책이 장차 삶의 근간을 뒤흔들고 위기까지 몰고 올 수 있다면 비판과 저항은 당연한 권리가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일국의 중차대한 정책을 '덜컥 저지른 진정성 없는' 결정이라고 손쉽게 말하는 것은 사실 헛헛한 냉소나 자아낼 뿐인 무딘 칼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범국민대회'에서 한미FTA 저지 범국본 대표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밝게 웃고 있는 '죽음의 동맹' 사진을 해머로 부수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한미FTA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시각이 귀한 때이나 그것이 '도'에 지나치면 '막말'일 수밖에 없다.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범국민대회'에서 한미FTA 저지 범국본 대표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밝게 웃고 있는 '죽음의 동맹' 사진을 해머로 부수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한미FTA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시각이 귀한 때이나 그것이 '도'에 지나치면 '막말'일 수밖에 없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언론의 비판적 시선이 귀한 때이나 '도'를 지나쳐서야

'조중동'의 칼럼 지면이 몇 해 동안 아주 저열한 비방의 수준으로 추락하여 이 나라의 언어를 남루하게 만든 바는 불행히도 어느덧 익숙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도 <조선일보>의 강천석 주필은 자신의 기명 칼럼 지면(3월 15일)에서 좌파는 "천둥 벽력이 치는 날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타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인 듯 행세"하는 특징이 있다며 가히 무협지를 모욕하는 불미스런 언어를 나열하더니 이들은 "전통이나 예의범절이나 미풍양속도 구닥다리들의 묵은 생각으로 치부" 한다고 썼다.

강천석 주필은 그가 혐오하는 좌파에게는 몰라도 무엇보다 입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미리 사죄부터 해야 할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논술 시험을 준비하면서 각 언론사의 사설과 칼럼을 많이 읽는다. 또한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다수 언론도 자사의 뉴스 콘텐츠를 활용한 논술용 상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만약 어떤 학생이 논술 시험에서 좌파를 규정하기를 '천둥벽력이 치는 날 회오리 바람을 타고 나타난, 예의범절이나 미풍양속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는 입시에서 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지극히 주관적이며 더욱이 정치적 감정까지 엿보이는 사례는 이른바 '짝퉁시사저널'로 불리는, <시사저널> 김행 편집위원의 글에서도 자주 보였으나 그저 정치 계절이 돌아오면서 그에 편승하는 남루한 언어들의 행렬로만 여길 뿐이었는데, 그만 <한겨레>의 성한용 칼럼에서도 자칫 그와 다르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읽게 되니 이러한 현상이 정치적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언론이 말의 품위를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다루는 격조에 큰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품위와 격조라고 말했지만 짧은 문장에 우리말을 연거푸 쓴다고 해서 고운 글이 되는 것도 아니요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일부러 장중한 한문투로 엮는다고 해서 격조있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비판과 풍자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에서 바로 그 비판과 풍자의 기조를 잃어버린 것에 따른 '품위 상실'이다.

비판과 풍자는 당사자가 면전에서 직접 들어도 우선 웃지 않을 수 없으되 등골은 서늘한 것이어야 한다. 밤늦게 잠에 들었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예리해야 하는 것이다. 결코 비판과 풍자는 그저 상대방의 속을 긁어놓는 게 목적일 수는 없다.

특히 언론이 권력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통하여 정치 권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그와 같은 비판과 풍자를 통해 건강한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고 그 정서적 공감대로써 권력에 대한 실질적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게끔 조력하는 것이다.

이른바 '조중동'의 칼럼이 사회적 공감을 널리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공연한 시비에 그쳤기 때문인데, 이를 모르지 않을 <한겨레>의 유력한 기명 칼럼이 FTA 타결이라는 중차대한 일의 여러 측면에 대해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증세가 악화된 대통령이 덜컥 저지르고 본' 것으로 버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조선> 3월 15일자 강천석 칼럼
<조선> 3월 15일자 강천석 칼럼 ⓒ 조선닷컴

비판과 풍자의 기조를 잃은 것이 바로 언론의 '품위 상실'

오해마시길! 나는 지금 노 대통령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선 경쟁이 과열될수록 유력 언론들의 이같은 남루한 언어가 더욱 많아질 것이 우려되거니와 연말의 선거에서 어느 쪽이 당선 되더라도 이처럼 신경질적인 언어로 그 당사자와 정책을 비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한다. 이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보다는 덜 중요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누구든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비판하고 풍자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말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그 바른 뜻이 훼손되어 이 한반도의 공기가 허튼 소리들로 의하여 황사 때 만큼이나 우중충해진다면 이에 대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이 나라 모든 언론은 심각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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