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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 3거리에서 바라본 계룡산. 길가의 벚꽃들이 아직 활짝 피지 않았습니다.
박정자 3거리에서 바라본 계룡산. 길가의 벚꽃들이 아직 활짝 피지 않았습니다. ⓒ 김유자
계룡산, 그 익숙한 곳으로의 여행

산봉우리가 마치 닭벼슬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국립공원 계룡산. 사는 곳에서 멀지 않다는 이유로 일년이면 적어도 예닐곱 번 정도 오르게 되는 제겐 너무나 익숙한 산이지요. 그러나 익숙한 곳이라고 해서 새로운 감흥이 솟아나지 않는 건 아니지요. 매번 새로운 느낌을 받고 돌아오니까요.

오늘(7일)은 계룡산 자락에 있는 절집을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동학사 벚꽃 축제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벚꽃이 얼마나 피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해마다 4월이면 공주로 가는 길과 동학사로 가는 길이 갈리는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 들머리에 이르는 3km가량 길은 활짝 피어난 벚꽃 향기로 어지럼증이 날 정도랍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 들머리에 이르는 길엔 벚꽃이 활짝 피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동학사 주차장에서 매표소에 이르는 길에 서 있는 벚나무들은 아직 망울도 채 커지지 않았더군요.

경복궁 자경전 꽃담 여덟 번 째 구역에 있는 화심을 박은 석쇠무늬(2005.11).
경복궁 자경전 꽃담 여덟 번 째 구역에 있는 화심을 박은 석쇠무늬(2005.11). ⓒ 김유자
석쇠 무늬를 흉내낸 계룡산 국립공원 내 화장실.
석쇠 무늬를 흉내낸 계룡산 국립공원 내 화장실. ⓒ 김유자
벚꽃 터널을 거니는것 같은 흥취를 아쉬워하며 동학사를 향해 걸어갑니다. 조각공원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오른쪽 언덕받이에 예쁜 화장실 건물이 있습니다. 계룡산 국립공원 내에 있는 화장실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장실입니다.

경복궁 자경전 꽃담 8번째 구역에 있는 화심을 박은 석쇠 무늬를 흉내냈기 때문이지요. '석쇠 무늬'란 고기 구울 때 사용하는 석쇠를 닮아 그렇게 부르는 듯 합니다. 비록 흉내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전통 무늬를 실제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가상해 보이지 않는지요?

저만치 앞서가는 등산객 두사람.
저만치 앞서가는 등산객 두사람. ⓒ 김유자
4월 초파일이 되려면 아직 한달 이상 날짜가 흘러야 하지만 동학사로 가는 길엔 벌써부터 꽃등이 죽 달려 있습니다.

이제 아침 7시. 아직 이른 시각인데도 벌써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이 간간히 눈에 띕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부터 본격 산행을 서두르는 분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곁을 스쳐가기도 합니다.

저만치 앞서서 등산객 두 사람이 걸어 겁니다. 꼭 바랑을 걸머진 스님이 아니라도 표표히 새벽길을 떠나는 사람. 아직 잠에서 덜 깬 산천을 깨우며 길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계곡 건너편에 자리한 동학사 부도밭.
계곡 건너편에 자리한 동학사 부도밭. ⓒ 김유자
이윽고 동학사 직전 길상암 등 동학사 부속암자가 뭉쳐있는 곳이 나옵니다. 근처에는 동학사 부도밭이 있습니다. 부도밭에 가려고 계곡을 건너 갑니다. 석축을 반원으로 쌓아 단정하게 만들어진 부도밭에는 11기의 부도와 3기의 공덕비가 있습니다.

가장 큰 부도는 뒷줄에 있는데 2m 가량 되는 몸돌의 가운데 '추월당'이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습니다. 뒷줄 오른쪽 부도는 사각의 고임돌과 복련을 모각한 아래 받침돌, 앙련을 모각한 윗받침돌, 둥근 몸돌, 2단으로 된 지붕돌을 갖추고 있는 원구형 부도인데 주인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부도들은 길상암 뒤편 등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199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라는데 계곡 건너편에 있는 탓인지 찾는 이가 드문 듯 합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8호 계룡산 초혼각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18호 계룡산 초혼각지. ⓒ 김유자
마침내 동학사에 도착합니다. 절로 들어가기 전 범종각 옆에 있는 숙모전으로 갑니다.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모둠발을 한 채로 담장 안을 넘겨다 봅니다. 숙모전은 단종을 폐위할 때 끝까지 의를 지키며 죽었던 사육신 이하 여러 충신 열사를 모셨던 곳입니다.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와서 단종의 제단을 마련하고 초혼제를 지냈던 자리라고 하는데 세조가 세조 3년(1457)에 단종을 비롯 정순왕후·안평대군·금성대군·김종서·황보인·정분 등과,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사육신 등의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이곳에 초혼각을 짓도록 했다고 합니다. 단종의 원한을 풀어주면 자신의 지병이 나을까 해서였겠지요.

현재의 건물은 1869년에 중건한 것이며 1904년에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답니다.

전각은 비록 고졸한 맛은 떨어지지만

동학사 대웅전. 꽃문살이 아름답습니다.
동학사 대웅전. 꽃문살이 아름답습니다. ⓒ 김유자
세한삼우(소나무대나무매화) 중 매화를 새긴 문살.
세한삼우(소나무대나무매화) 중 매화를 새긴 문살. ⓒ 김유자
비구니 강원이 있는 동학사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절의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이후 서서히 중건한 절집입니다. 건물이 모두 근래에 지은 것이라 고졸한 맛은 드물지요.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을 진작했던 경허(1849-1912)스님이 한때 이곳에서 강의를 열기도 했던 유서깊은 전통이 있습니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작고 앙증맞은 3층석탑이 먼저 미소를 짓습니다.

대웅전은 1980년 당시 주지였던 비구니 봉민스님의 원력으로 개축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건물양식은 석조기단 위에 복련판주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3간의 다포식 건축이지요.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협시불로 모셨습니다.

국화와 대나무,소나무,난초(사군자)의 문양을 새긴 정면의 3짝 분합문들이 동양화 액자처럼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매화는 이미 다 저버린지 오래지만 부처님 나라에 심어진 매화는 아직 지지 않았나 봅니다.

충남 문화재 자료 제 57호 삼성각.
충남 문화재 자료 제 57호 삼성각. ⓒ 김유자
대웅전 바로 왼쪽에는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치성광 여래불과 독성(벽지불), 산신을 모신곳입니다. 아직도 고졸한 느낌을 잃치 않아 제가 동학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물이랍니다. 예전의 대웅전이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후기 건물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 충남 문화재 자료 제 57호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삼성각 옆에는 야트막한 담이 있고 사립문 같은 작은 중문이 있습니다. 승가대의 주요 건물들이 모여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지요. 출입을 금하면서도 막상 담장의 높이는 사람의 배꼽 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혹 사람의 배꼽 위치가 일반인의 호기심과 금지를 적절히 충족시키는 황금비율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처럼' 혹은 초발심으로 산다는 것

대웅전 마당에서 올려다 본 계룡산 봉우리.
대웅전 마당에서 올려다 본 계룡산 봉우리. ⓒ 김유자
다시 대웅전 마당으로 터벅터벅 내려옵니다. 강사 스님들의 연구실로 사용되고 있는 동림당의 지붕 위로 계룡산 봉우리 들을 올려다 보다가 문득 '처음처럼'이란 신영복 선생의 글씨를 떠올립니다.

사람이 처음 먹은 마음을 변치않고 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수행자가 초발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 역시 그럴 테지요. 초발심 혹은 '처음처럼' 산다는 건 아마도 삶의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말일 겁니다. 긴장을 풀고 살면 사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흘러 보내기 십상이라는 걸 제 경험은 누누히 경계합니다.

관음봉을 넘으려고 청법당 앞에 있는 향아교를 건너갑니다. 다리를 건느기 전과 건넌 후. 그새 제 마음엔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요? 어쩌면 제행무상의 세상에서 '처음처럼'이란 불가능한 화두인지도 모릅니다. 나그네에게 제행무상을 가르치려고 그러는지 아침해가 나타났다 숨었다를 반복합니다.

오늘 하루, 햇님이 제행무상 대신 초발심으로 세상을 비추기를기대하며 서두르지도 늦지도 않는 발걸음으로 관음봉을 향해 올라갑니다.

덧붙이는 글 | ☞오는 길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 I.C → 23번국도 → 월송교차로 → 32번국도(대전방향) → 박정자삼거리 → 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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