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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오랜만에 고향에서 맞은 어느 일요일 오전 예배시간이었다. 헌금하는 시간이 지나고 목사님이 감사 헌금한 신자들을 호명하는데 내 이름이 섞여 나오는 게 아닌가? '난 감사 헌금 낸 적 없는데 이게 뭐지?' 범인(?)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이번만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형님과 내 이름으로 감사헌금을 내신다고 해명하셨다. 이역만리와 타 도시에 떨어져 사는 형님과 내 이름이 고향의 작은 교회에서 어김없이 매주 울려 퍼진다는 사실이 영 못마땅했다.

참다못해 어머니께 넌지시 말씀드렸다. "엄마, 요즘엔 교회 헌금도 대납이 되우? 하느님도 그다지 반가이 여기지 않으실 것 같은데…." "너도 알잖아, 교회 사정…."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돈 몇 푼으로 자식들의 복을 비셨던 게 아니라, 열악해진 교회 재정에 헌금을 구실 삼아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으셨던 거였다. 겉으론 비이성적 또는 반신앙적으로 보이던 어머니의 행위가, 실은 주어진 조건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반응이었던 셈이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사람들의 행동이, 언뜻 보기에 비합리적인 것처럼 비치는 경우도, 사회 환경에 대한 합리적 반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식 과외비를 대느라 부업에 '알바'까지 하는 수많은 엄마들의 극성스러움은, 겉으로는 비이성적으로 보여도 따지고 보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세상은 불안정해 보이기만 하고, 결국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 안정적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 기를 써서라도 주류사회에 진입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도 빠른 길은 역시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이다. 그러니 교육열 과잉을 두고 어머니의 탐욕을 탓하거나 심성을 고치라고 윽박지를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총합이 사회 전체에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며 때로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교육 부문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사교육비의 절반만 공교육 투자로 이어져도 세계 최첨단의 공교육 시설을 갖출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사교육 시장 규모는 비대할 대로 비대해져 있다. 사교육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전반적으로 가계소비를 위축시킨다. 가계 소비가 쪼그라드니 내수는 부진할 수밖에 없고 경기침체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경기가 불황이니 사회는 흉흉하고 미래는 더욱 불안해진다. 그러니 교육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경쟁 활성화는 대체로 장려할 일이나, 그것이 과열로 이어지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경기과열이 국민경제에 반드시 이롭지 않듯, 사교육 과열은 오히려 교육을 멍들게 하고 민생까지도 황폐화하기 십상이다. 적어도 제대로 된 사회라면 정도를 넘어선 열을 식히지는 못할망정 기름을 끼얹지는 말아야 한다.

얼마 전 논란이 된 3불 정책은 대학경쟁력과는 무관한, 사교육 경쟁의 지나친 과열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냉각장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난 3불 정책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건설경기 붐이 일 때마다 재미를 봤던 부류는 일부 건설업자들이다. 거품이 걷히면 다수 서민의 삶은 도리어 피폐해지기 일쑤였다. 마찬가지로 3불 정책 폐지로 이득을 챙기는 건 몇몇 집단일 뿐이지 다수 국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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